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78화 (78/127)

#78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짧게 대답하자 김주원이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손에는 문제의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생화에서 풍기는 향기가 아찔했다.

선경은 꽃병을 보기 좋게 세팅하고 있는 김주원을 흘낏 쳐다보았다.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며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강 비서 그렇게 바꿔 놓은 거 수석님이에요?”

“아니요, 꽃 사는 건 저도 처음 봤어요.”

“진짜 안 어울리던데.”

꽃을 솎아내던 김주원이 웃음을 픽, 터트렸다.

“그래도 꽤 낭만 있잖아요. 요즘 꽃 사다 주는 남자가 어디 있어요. 볼수록 섬세한 구석이 있다니까요.”

이래 봬도 2년 동안 반강제적으로 강 비서를 데리고 다니며 나름 쓸 만한 솜씨로 키워냈다 자부할 수 있었다.

처음엔 운전 실력과 경호 실력만 출중한 덩치 큰 아저씨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제법 꼼꼼하게 스케줄도 챙길 줄 안다.

무엇보다 겉보기엔 상당히 위협적이고 듬직한 편이라 의전 역할만큼은 톡톡히 했다.

“강 비서랑 일하는 건 괜찮아요?”

“네, 저랑 잘 맞아요.”

“잘됐네요. 계속 김 수석님께 붙여드릴게요.”

“그러면 대표님은요?”

“새로 구해야죠.”

안 그래도 헤드헌터에게 이메일을 보낸 참이다. 영어와 불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한 베타 남성, 혹은 여성이란 조건을 달았는데 마침 몇 명의 후보자들을 추천해왔다. 조만간 날짜를 잡아 모두 만나 보기로 약속했다.

선경은 의자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할 말이 있는 듯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오자마자 일 시키는 거 완전 별로라는 거 아는데요.”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앞으로 3개월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예요. 일단 기획팀과 홍보팀은 새롭게 편성할 겁니다. 전시기획팀, 작가관리팀, 아트투어팀 이렇게 세 개로 나눌 거고 명단은… 방금 김 수석님 메일로 보냈어요. 혹시 증원이 필요한 팀이 있다면 보고서 제출하라 해 주세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직원들에게 공고하고, 내일까지 소속 변경하라고 알려 두세요. 그리고 미팅은 수요일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관련 내용은 오늘 오후 5시까지 각 부서별 팀장님들에게 따로 공지해두겠습니다.”

“네, 대표님.”

내용을 전달한 우선경은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가 계획한 목표를 이루려면 직원들은 물론이고, 본인 역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노트북을 꺼내 연결하고 미리 구상해 둔 기획안을 살폈다. 순식간에 업무 모드로 돌입했다.

할 일을 끝마친 김주원이 조용히 자리를 비키려 할 때였다.

“김 수석님.”

“네.”

“기다려 줘서 고마워요.”

우선경은 여전히 화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무심히 말했다.

김주원은 방금 그 말이 아주 오래 전, 특별전에서 만난 우선경에게 자신이 했던 말의 연장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뚝뚝했지만, 진심이 느껴지는 인사였다. 덕분에 그녀의 얼굴에도 모처럼 보람된 미소가 번졌다.

***

신혼집은 둘이 살기엔 너무 넓었다. 한국에 들어온 지도 일주일이나 되었건만 새로운 보금자리는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다.

집에 빨리 정을 붙여야 하는데,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았다. 곳곳엔 아직 풀지 못한 이삿짐 박스도 눈에 띄었다.

한지석이 집에 도착한 건 밤 10시가 다 되어 갈 즈음이었다. 첫날부터 귀가가 늦었다.

“왔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선경이 인기척이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살짝 젖혔다.

그의 무릎 위엔 노트북이, 소파 주변은 온통 서류들로 가득했다. 한지석을 기다리며 겸사겸사 늦게까지 일하고 있던 참이었다.

지석은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걸어갔다. 재킷을 벗어 소파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뒤 쓰러지듯 기대 누웠다.

소파 옆자리가 푹 꺼지자 그제야 선경이 힐끗 눈길을 돌렸다.

노트북은 잠시 닫아 옆으로 밀어두고, 한지석을 향해 상체를 반쯤 틀었다. 비스듬히 머리를 괸 채 유난히 지쳐 보이는 알파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하루 만에 사람이 너덜너덜해졌네.”

눈을 감고 있던 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동감하는 바였다.

“날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네.”

“몰랐어? 원래 사람들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 싫어해. 피해 입은 것도 없는데 어떻게든 하나라도 트집 잡으려고 하거든.”

우선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말했다. 늘 겪어 왔던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한지석 그동안 너무 곱게 자랐네. 이제는 욕먹는 것에도 적응해야지.”

“그런 건 어떻게 하면 적응이 되는데?”

“한 귀로 흘려듣거나, 정 못 참겠으면 아무도 욕하지 못하게 싹 다 밟아 주든가.”

본인이 말해 놓고 가만히 생각하던 우선경은 입꼬리를 씨익 들어 올렸다. 상상이 꽤 마음에 들었나 보다.

“괜찮은데? 이왕이면 섹시하게 다 밟아버려.”

그 소리를 들은 한지석이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고개를 가로젓더니 늘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소파에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는 파일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글보다 사진이 많았다. 아마도 누군가의 포트폴리오인 것 같았다.

“일이 많아?”

“들여다볼 게 한두 개가 아니야. 다른 건 몰라도 갤러리에 소속된 작가들은 내가 직접 챙겨야 하거든. 비위 맞춰 주려면 별수 있나, 어떤 사람인지부터 미리 알아놔야지.”

“네가 작가들 비위를 맞춰 준다고?”

“왜, 못할 것 같아?”

한지석은 대답 없이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가 들고 있던 포트폴리오로 선경의 어깨를 툭툭 내리찍었다.

“이봐요, 우 대표님. 나 이런 식으로 대우해 주면 같이 일 못 해.”

제법 그럴듯한 상황극에 선경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 대표, 그림 모델 해볼 생각 없어? 내가 예쁘게 그려 줄게.”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같아서 더 무서운 거 알아?”

눈물까지 찔끔 흘려가며 웃던 선경은 습관처럼 머리를 넘겼다.

왁스를 발라 뻣뻣해진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켰다. 그러고 보니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 여태 세팅된 상태로 있었다.

선경은 몸을 늘어트리며 작게 하품했다. 시간이 늦긴 했는지 피곤함이 몰려왔다.

“안 되겠다. 일단 좀 씻고 올래. 그거 그냥 놔둬. 이따가 다시 볼 거야.”

그리곤 곧장 일어나 거실을 벗어났다.

죽죽 바닥을 스치는 슬리퍼 소리가 욕실이 있는 쪽으로 향한다. 잠시 후 욕조에 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소파에 기대 누운 채 그 소리를 듣고 있던 지석은 넥타이 매듭을 끌어 내렸다. 손목에 찬 시계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몸을 일으킨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풀며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문을 열자 뽀얗게 찬 수증기가 그를 반겼다.

***

잘 차려진 밥상 앞에서 숨 막히는 탐색전이 벌어지는 중이다.

태연하게 젓가락을 움직이면서도 귀로는 상대의 대화를 주워듣고, 시선은 바쁘게 가족들을 관찰했다.

혹시나 말실수는 하지 않으려나, 저 대화에 내가 파고들어 갈 곳은 없나. 다음 질문이 나에게 돌아오면 무슨 말을 해야 될까….

복잡하고 치밀한 심리가 뒤엉켰다. 우 회장의 주도하에 모이는 가족 식사 자리는 언제나 늘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얼마 전부턴 식구가 늘어 예전보다 더 북적거리는 맛은 있다. 작년 우선우는 한성일보 장녀, 최수연과 결혼해 성북동 저택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이밖에도 우정화는 구도경과 구예진을 모두 데리고 왔고, 우선경은 당연히 제 짝인 한지석과 함께였다.

우재경이 없음에도 한자리에 모인 식구가 총 8명이라 꼭 대가족이 된 것만 같았다. 우 회장은 이제서야 사람 사는 집 같다며 연신 만족스러운 웃음을 터트렸다

“지석이 이제 두 달 정도 됐던가. 듣기로는 곧잘 하고 있다던데. 그래, 요즘 회사 분위기는 어떻더냐? 아직도 뒷말이 많아?”

우 회장의 질문이 돌아오자, 한지석은 씹던 음식을 티 나지 않게 삼켰다. 묵직한 놋쇠 젓가락을 내려놓고 빈손을 식탁 위에 자연스레 올려놓는다. 어느새 정갈해진 얼굴로 우 회장을 돌아봤다.

“모든 이들에게 호응을 얻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습니다. 뒷말이야 당연히 나올 수 있겠지만 휘둘리지 않고 제 일 하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지금은 이번에 열리는 핵심 소재 컨소시움 총괄에만 집중하고 있습니다.”

“안 그래도 보고 받았다. 산업부에서 단단히 각 잡고 밀어주려나 보던데.”

“재정 자금 예산이 5년간 1조 원 정도로 책정되었다고 합니다. 경쟁이 치열하지만, 충분히 승산 있습니다.”

“정부 사업 따내려면 로비와 접대 필수인 건 알죠? 한 상무가 그거 할 수 있겠어요?”

우정화가 재주 좋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뜯는 하이에나 같았다. 지석은 동요하지 않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제가 못 할 거 같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한 상무 기개 높은 선비 체질인 거 여기 모르는 사람 있어? 그런 인물이 어디 접대나 제대로 할 수 있겠냐 이거지. 일머리 좋고 센스 있는 건 나도 인정하는데 대규모 사업은 그런 식으로만 굴러갈 수 있는 게 아니거든. 특히 기업을 대표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을 휘어잡을 줄 알아야 된단 말이야. 그렇죠, 아버지?”

“고모님이 말씀하시는 로비와 접대가 어느 수준인지는 모르겠으나, 전 제 나름의 방식대로 진행할 겁니다. 다만 누구처럼 난잡하게 술집에서 뒹구는 짓은 지양하겠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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