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크흡! 콜록, 콜록!
물을 마시던 구도경이 사레에 들린 듯 밭은기침을 뱉었다.
겨우 진정을 하고 숨을 가다듬는 그의 얼굴은 피가 몰린 탓에 목부터 두피까지 온통 검붉었다.
구도경은 얼마 전, 백화점 거래처 사장들에게 금품과 향응을 접대받았다가 검찰 단속에 걸린 일이 있었다. 하필이면 홀딱 벗고 오메가와 뒹굴던 중에 수사관들이 들이닥쳐 망신을 제대로 당했다고 한다.
우정화가 힘쓴 덕분에 다행히 기소는 겨우 면할 수 있었지만 이후 집안에선 찬밥보다 못한 신세가 되어버렸다.
“말조심해.”
“고모님이야말로 제 걱정은 그만해 주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저보다 더 급한 사람부터 챙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앞가림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요.”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에 밥을 먹고 있던 몇몇 식구들은 조용히 눈치만 살폈다.
이제 열여섯 살 된 구예진은 어른들의 기 싸움에 짓눌려 숟가락도 제대로 들지 못했고, 우선우의 처 최수연은 둥그렇게 솟은 배에 손을 올리며 불안하게 주변을 훑었다. 이런 상황에 밥이 입에 들어갈 리 만무했다.
그때 유일하게 식사를 이어 가던 선경이 대뜸 최수연을 불렀다.
“형수님.”
“네?”
“찰떡이 성별 나왔어요?”
그의 입에서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귀여운 이름이 나오자 최수연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었다. 이제는 제법 부른 배를 쓰다듬었다. 아이에 관한 이야기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네. 딸이래요.”
“딸 좋죠. 부모가 다 인물이 좋으니까 분명 예쁠 거예요. 형이 엄청 좋아하지 않았어요? 딸 갖고 싶다고 매일 노래 불렀었는데.”
“선우 씨, 같이 병원 갔다가 아기 성별 듣고 울었어요.”
그녀의 말에 모두가 우선우를 쳐다봤다. “아악! 그 얘기는 하지 않기로 했잖아!” 당사자는 부끄러운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췄다.
저 푼수 같은 놈, 우 회장이 한 소리를 던지자 시중을 들던 고용인들까지도 웃음을 터트렸다. 덕분에 날 선 분위기가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최수연은 습관처럼 배를 어루만졌다.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가족들을 둘러보다, 옆에 앉은 우선경에게 조용히 말을 붙였다.
“도련님도 어서 가지셔야죠.”
“우린 좀 천천히요.”
선경은 익숙하다는 듯 둥글게 대답했다. 누가 언제 물어보든, 매번 똑같은 답변이었다.
차에 타자마자 알약과 마시는 소화제부터 꺼냈다.
지난번에 단단히 체했던 전적이 있어서인지, 한지석은 챙겨 주는 것을 순순히 받아 갔다. 그가 약을 입에 털어 넣는 걸 보고 나서야 선경은 안전벨트를 끌어당겨 버클에 꽂았다.
그가 할아버지와 반주를 함께한 탓에, 운전은 우선경이 대신하기로 했다. 준비를 끝낸 선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
두통이 이는지 관자놀이를 누르던 한지석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차는 곧 부드럽게 움직였고, 길게 늘어진 담벼락을 따라 넓은 골목을 빠져나갔다.
차 안은 숨소리만 가득했다.
이따금 방향 지시등에서 똑딱거리는 소리가 더해지고, 창밖 너머로 바깥 소음이 작게 섞여 들어오곤 했지만 대화가 없으니 적막감은 도드라졌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피곤해 보이는 한지석을 배려해 선경은 일부러 말을 걸지 않았다.
그때 고요함을 뚫고 핸드폰이 드르륵,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흘낏 훑은 선경은 운전대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차량에 연결된 스피커를 타고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
-대표님, 전데요.
“무슨 일이에요.”
-견태화 작가님이요, 지금 당장 대표님 불러 달라고 난리에요. 대표님이 안 봐 주시면 그림 한 장도 안 그리실 거래요.
황당한 전언에 선경은 인상을 왈칵 구겼다. 하필이면 앞차가 갑작스레 멈춰 서기도 했다. 욕설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전면 창 너머로 보이는 자동차 번호판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림을 왜 안 그려. 당장 전시회가 다음 달인데, 정신 나갔대?”
-저희도 계속 설득하고 있는데, 도통 말이 안 통해요. 그냥 대표님만 계속 불러 달라는데… 어쩌죠?
가뜩이나 정신력이 약한 작가였다. 하지만 그만큼 감수성이 짙어 작품만큼은 언제나 기깔나게 그렸다.
자신 없다던 그를 설득해 개인전을 준비하던 중이었는데, 결국엔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얼마 전 과한 스트레스로 슬럼프가 찾아온 그에게 선경이 작품에 대해 솔직한 조언과 감평을 내려 준 것이 화근이었다. 견태화는 최근 우선경에게 심각할 정도로 의존하고 있었다.
우선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열을 받아 뜨거워진 이마를 짚었다.
“견 작가 작업실이 어디였죠?”
-양평이요. 직접 가시게요?
“일단 주소 문자로 보내 봐요. 가서 붓을 다시 쥐여 주든지, 정 못하겠다고 하면 계약서를 찢어 버리든지 뭘 하긴 하려면 직접 면상을 봐야 할 테니까. 혹시라도 내가 가서 작업실 뒤집어 놓을지 모르니까 변호사 준비시켜 놓고요.”
-아… 제발 좋은 소식만 들려주세요.”
전화가 끊기자 순식간에 차 안은 썰렁해졌다. 함께 통화를 듣고 있던 한지석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작가?”
“응, 이번에 개인 전시회 준비하는 작가인데 작업이 잘 안 풀리나 봐.”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이 시간에 오라 가라 해?”
“…….”
할 말이 없었다. 밤 9시에 갤러리 대표를 찾는 작가라니.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예술가란 으레 그렇듯, 얇은 유리 조각처럼 예민하고 섬세한 존재인 것을. 당장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정말로 전시회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었다.
우선경이 고민하는 것을 알았는지, 한지석은 하기 힘든 말을 대신 꺼냈다. 그가 조수석 창문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밖을 가리켰다.
“저 앞 정류장에 세워 줘. 택시 타고 갈게.”
“미안….”
“내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걱정 마. 그 작가 남자 오메가야.”
세상에서 가장 안심해도 되는 성별과 형질 조합을 말해 주자, 내내 표정이 굳어 있던 한지석은 그제서야 가볍게 미소를 짓는다.
그를 버스 정류장에 내려 준 뒤, 서둘러 목적지를 입력했다. 양평에서 서울까지 왕복하는 데만 최소 3시간이 걸렸다.
견태화, 이번엔 진짜 가만 안 둬. 짜증 섞인 혼잣말과 함께 액셀을 힘껏 밟았다. 우선경이 모는 차는 가차 없이 속력을 내며 떠났다.
***
“면담 일정 잡혔습니다.”
오전 회의가 끝난 직후였다. 팀원들이 회의실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던 전략기획팀장이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그는 악수하듯 손을 내밀었다. 맞붙은 손바닥 안으로 작은 쪽지가 전달됐다.
한지석은 남들이 볼 수 없도록 의자를 반쯤 돌리고, 은밀한 지령이 담긴 쪽지를 열어 보았다.
산업통상자원부 기획조정실
제1차관 원기준, 통상차관보 배재욱.
x월 x일 오후 6시.
강남구 삼성로 19-3번 길 금강.
쪽지를 확인한 한지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을 곧장 분쇄기에 갈아 넣었다. 접대 날짜는 당장 내일이다.
“제가 알아 둬야 할 것은요.”
“술 무척 좋아하십니다. 둘 다 말술이라 각오하셔야 될 겁니다. 차관보가 여자를 좀 밝히긴 하는데, 기조실 차관이 그쪽으론 좀 깔끔 떨어서 아마 크게 요구는 못 할 겁니다.”
“다행이네요.”
“특이한 게 원기준 차관은 판사 경력이 있어요. 어쩌면 상무님과 대화가 잘 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판사 출신이라….”
그게 과연 이득이 될까, 독이 될까. 만나기 전까진 알 수 없다. 지석은 잇자국이 난 볼 안쪽을 혀로 진하게 훑으며,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회동은 미리 섭외해 둔 고급 한정식집에서 이루어졌다.
접대부도 없었고, 대놓고 머리를 조아리는 식의 아부성 멘트도 없었지만 걱정과 달리 접대는 나름 순탄하게 진행되는 중이다. 어렵게 모신 손님들은 한지석이 제공하는 점잖고 고급스러운 향응을 제법 마음에 들어 했다.
다만 어찌나 술을 좋아하는지 만난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한지석은 본인의 주량을 한참 넘어설 정도로 마셨다. 혀가 꼬이지 않도록 정신을 단단히 붙잡아 둬야 했다.
술을 못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뜩이나 주당으로 소문난 정부 부처 관계자들을 혼자 상대하려니 그들보다 곱절은 더 들이부어야 했다.
컨소시엄에 관한 이야기는 기분을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지속적으로 꺼냈다. 비위를 맞춰 주다 보면 귀한 정보들을 캐낼 수 있었다.
그러다 술을 받아 마시고, 따라 주고 또 주제를 돌리고를 반복했다. 맨정신으로도 하기 힘든 것을 만취한 상태로 하려니 죽을 맛이다.
다행인 것은 차관보가 가끔식 술이 확 깨는 이야기를 꺼낸다는 거였다. 바로 지금처럼.
“요즘 제가 오메가한테 그렇게 관심이 갑니다. 아니 걔들은 어쩜 그렇게 생긴 것부터 맛있게 생겼는지. 그래서 오늘 한 상무님 만나면 한번 여쭤보려고 했죠. 우성 알파시니까 오메가들 많이 만나 보셨겠죠? 어떻습니까, 정말로 뭐가 다릅니까? 남자도 막 뒤가 젖고 그런다면서요? 아니 그보다 정말로 발정기 때는 일주일씩 붙어먹고 그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