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
“어허, 이 사람.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지.”
“우리는 베타라서 평생 모를 것 아닙니까.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오메가 전용 술집이 오픈했다던데, 거긴 베타도 출입 가능하더라고요. 원 차관님 혹시 관심 없으세요?”
“관심 없어, 아니 있어도 지금은 없다고 해야지.”
질문을 가장한 희롱이 난무했지만, 한지석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차관보의 빈 술잔에 양주병을 기울였다.
“제가 재미가 없어서 두 분 흥을 많이 돋워드리지를 못하는군요.”
“조금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요. 사람이 너무 점잔을 빼도 안 좋은 법이거든. 놀 때만큼은 같이 분위기 맞춰서 즐겨야죠. 사실 나는 오늘 여기 우리 셋밖에 없어서 조금 아쉬웠습니다. 고급스러운 건 좋은데… 영 심심하네요.”
“다음번에는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술잔이 한 번 더 돌았다. 높은 도수의 양주가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테이블 위엔 벌써 빈 병들이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귀한 재료로 만든 요리들보다 술 줄어드는 속도가 빨랐다.
마찬가지로 취기가 조금 올라온 원기준 차관이 한지석에게 슬쩍 질문을 던졌다.
“아버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십니까?”
“…….”
그는 판사로 재직하다 정무직 공무원으로 채용된 케이스였다. 대법원장이셨던 아버지와는 인연이 꽤 깊다고 했다. 그가 서울고등법원의 초임 판사로 일하던 시절, 아버지는 부장 판사로 계셨는데 그렇게 많이 혼났다고 한다.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여태껏 잘 버텨오던 지석의 표정이 사뭇 뻣뻣하게 굳었다.
“…잘 지내십니다. 요즘 제주도에 내려가 계셔서 못 뵌 지는 좀 됐군요.”
“근황을 알 수가 없어서 말이죠. 통 얘기가 안 들린다 싶었는데, 결국 은퇴하시고 내려가셨군요. 참… 알다가도 모르는 게 사람 일이라지만 대법원장님은 생각할수록 내가 다 아쉬워요. 평생을 흠잡을 것 없이 살아오신 분이셨는데… 하필이면 아드님이 재벌가와 결혼을 해가지고서, 쯧.”
원기준은 유감스럽다며 혀를 찼다.
“그 불똥이 그분께 튈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청렴하시기로 유명하신 양반이 억울하게 욕먹고 불명예 은퇴를 하셨으니 속이 말이 아니시겠군요.”
“…….”
“제가 초임 시절 청탁 좀 몇 번 받았다가 한 부장님께 걸려서 개같이 까였었는데 말이죠. 지금은 이렇게 아드님께 접대를 받고 있군요. 참 뭐랄까…. 감개무량하네요. 아버님은 한 상무가 이러고 있는 거 짐작이나 하고 계실까요? 하하! 나중에 꼭 좀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원기준 차관은 실없이 웃으며 한지석의 어깨를 두드렸다.
오늘 만날 사람이 한동준 대법원장의 아들이란 소리에 며칠 전부터 벼르던 참이었다. 그는 자극적인 접대보다 지금이 더 재밌고 즐거웠다.
잇따른 모욕에도 한지석은 꿋꿋하게 참았다. 여전히 입가엔 조용한 미소를 띤 채 술잔을 마저 비웠다. 독한 폭탄주가 식도를 긁고 내려갔다.
속에서 홧홧한 불길이 치밀어 오르는 건 아마 도수가 높은 술 때문일 거다.
이 정도쯤은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었다. 아니, 버텨야 했다.
***
자정이 넘은 시각, 띠리릭-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뒤엉킨 구둣발이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고 비서가 문짝만 한 알파를 부축하느라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젖 먹던 힘까지 끌어다 썼더니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다. 평범한 체력의 베타 남성은 이마부터 목덜미까지 온통 땀범벅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본 선경이 경악하며 현관까지 달려 나와 부축을 도왔다. 그러나 허리를 붙드는 순간 휘청이는 한지석의 몸에 깔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술에 취한 알파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웠다.
“형, 형. 한지석! 일어나 봐. 괜찮아?”
“…선경아.”
완전히 정신을 놓은 건 아니었는지 한지석은 이름을 부르며 제 오메가를 꼭 끌어안았다. 이미 고 비서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따뜻한 몸에 정신없이 얼굴을 비비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 너만 있으면 다 괜찮아….”
“으, 술 냄새.”
“난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 아. 버틸 수 있어.”
“미치겠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우선경은 답답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뒤에 서 있는 고 비서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왜 이렇게 취했어요?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하아…. 오늘 혼자서 접대하시느라 많이… 좀 많이 드셨습니다.”
여전히 숨을 헐떡거리고 있던 고 비서는 후들거리는 무릎을 붙잡고 겨우 허리를 세웠다.
“그러면… 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실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선경은 주저앉은 상태로 고 비서를 배웅했다. 술에 취한 한지석을 끌어안고 있느라 제대로 인사할 수가 없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난 뒤에야, 아차 싶었다. 침실까지만 좀 데려다 달라고 할걸.
인사불성이 된 한지석을 혼자 옮길 생각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음 날 아침, 평소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문득 올려다본 시계는 새벽 6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선경은 일어나자마자 비어 있는 옆자리를 더듬었다. 이불 속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다. 그새 출근을 한 거였다.
한지석의 출근 시간은 매일 아침 6시 30분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오늘 같은 날은 좀 늦게 가도 좋지 않나….
“해장도 못 했을 텐데.”
걱정이 담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미적미적 일어났다.
게으르게 욕실로 걸어가 잠옷을 벗고 욕조엔 뜨거운 물을 받았다. 하품이 쩍쩍 나왔지만, 모처럼 일찍 일어났으니 선경도 이른 출근을 하기로 결심했다.
***
갤러리 운영을 직접 맡은 이후 처음으로 여는 행사다 보니 이번 전시회는 어느 때보다 공을 들이고 있었다. 총책임자인 우선경은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신경 쓰느라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다행히 실력 있는 직원들 덕분에 전시회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날 손님 명단은 완전히 픽스 됐나요?”
“네.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딱 100명만 선정했습니다. 초대장은 그저께부터 등기로 발송되었고요. 벌써부터 소문이 돌고 있는지 먼저 연락 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김주원 큐레이터가 초대객 이름이 적힌 리스트를 건넸다.
내로라하는 재력가부터 미술계에 명성이 높은 평론가들, 심지어는 요즘 핫한 크리에이터에 이르기까지 대상은 다양했다.
우선경은 꼼꼼하게 명단을 확인했다. 집중하는 사이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볼펜이 빙글빙글 춤추듯 돌아갔다.
“원래 비공개라고 하면 더 궁금한 법이거든요, 게다가 나만 빼고 다 초대받았다? 그러면 더 미치지.”
“그러면 연락 주시는 분들께는.”
“다음에 초대해드린다고 하세요. 개나 소나 다 부르면 프라이빗 전시회 하는 의미가 없죠.”
선경은 웃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물병을 집었다. 꽉 다물린 뚜껑을 돌려 따고 생수를 한 모금 마셨다.
“우웁.”
역한 물비린내가 솟구쳤다. 참을 수 없는 구역감에 선경은 인상을 찡그리며 입을 막았다.
결국, 넘기지 못하고 물을 뱉었다. 회색 카펫에 축축하고 짙은 물 자국이 배겼다.
“괜찮으세요?!”
“하아, 물맛이… 왜 이러죠?”
“맛이 이상해요? 늘 드시던 건데.”
물이 상할 리도 없는데 이상하다며, 김주원은 서둘러 휴지를 찾았다.
“요즘 너무 무리하셔서 그런 거 아닐까요. 어제도 계속 현기증 느끼셨잖아요.”
“그런가 봐요.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탓인가 보죠.”
“안 되겠어요. 대표님 한 시간 만이라도 좀 쉬세요. 다른 것엔 일절 손도 대지 마시고요.”
“괜찮은데….”
“어서요!”
김주원의 잔소리에 어쩔 수 없이 소파에 등을 붙여야 했다. 눕는다고 딱히 잠이 오는 것도 아니고 되레 마음만 더 불편해졌다.
잠시 후 김주원은 불을 모두 끄더니 대표실 문까지 잠그고 나갔다.
누워 있던 선경은 길게 한숨을 내쉬다 억지로나마 눈을 붙였다.
‘…내가 그때 피임약을 먹었던가.’
그 순간 번뜩 스쳐 가는 생각에 눈이 떠졌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두 달 전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늘 콘돔을 쓰려고 하지만, 가끔씩 눈이 돌아갈 땐 챙길 여유도 없이 관계를 맺어버리곤 했다.
분명 그날도 제 기억으론 그랬다.
안쪽 깊이 사정하는 한지석의 어깨에 매달려 반드시 사후 피임약을 먹어야겠다 생각했는데, 정작 챙겨 먹은 기억은 없다. 일에 정신이 팔려 깜빡했던 게 분명했다.
불안한 마음에 더는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선경은 겉옷과 지갑을 챙겨 들고 서둘러 대표실을 나갔다.
빨간 두 줄이 선명한 임신 테스트기 두, 세 개가 화장실 타일 위를 굴러다녔다. 선경은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감쌌다.
“안 돼, 왜 하필 지금이야….”
손바닥 틈새로 절망스러운 탄식이 새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