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81화 (81/127)

#81

산부인과 대기실은 온통 배가 불룩한 임산부들과 보호자들로 가득했다. 모두가 설레고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건 오직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임신 7주시네요.”

의사는 선고를 내리듯이 말했다.

요구하지도 않았건만 당연하다는 듯 임신 확인서를 발급해 주었고, 앞으로 지켜야 할 수칙들과 주의사항에 관해서도 설명을 이어 갔다.

초음파 화면을 보면서도 우선경은 이 모든 게 실감이 나질 않았다.

“여기가 아기집이에요. 크기도 좋고 난황도 잘 보이네요. 아기 심장 소리도 한번 들어 볼까요?”

의사가 초음파 기계를 고쳐 잡았다. 미끌거리는 젤과 함께 아랫배가 지그시 눌렸다.

잠시 후, 바람 소리 같은 잡음이 흐르더니 다소 빠르게 뛰는 박동 소리가 들렸다. 의사는 심장 소리도 건강하다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하지만 우선경은 좀처럼 웃을 수 없었다. 신기하긴 하지만 그렇게 막 기쁘진 않았다. 분명히 축복해야 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반겨 주지 못하는 게 못내 안타까웠다.

선경이 초음파 화면을 보면서도 내내 침묵만 지키고 있자, 그의 속마음을 눈치챈 의사가 조용히 제 의견을 보탰다.

“모든 산모가 아이를 갖자마자 기뻐하는 건 아니에요. 특히 계획에 없는 임신일 땐 놀라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모성애라는 게 배 속에 아이가 생기자마자 저절로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엄마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죠.”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까요?”

“그럼요. 앞으로 주 수별로 커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기분이 또 달라질 겁니다. 지금은 덩어리 같은 형태만 보이지만 다음번에 오시면 팔다리도 선명하게 나타날 거예요. 쑥쑥 커 가는 게 얼마나 기특한데요.”

“…….”

“아, 그리고 남자 오메가는 자궁이 약한 편이라 각별히 더 조심해 주셔야 합니다. 밖에서 저희 간호사 선생님이 다시 한 번 더 설명해 주실 거고요, 보호자께도 교육해드려야 하니 다음번 내원 시엔 꼭 같이 오세요.”

의사는 2주 뒤에 보자고 말했다.

진료실 밖으로 나온 우선경에게 간호사는 다이어리 모양의 산모 수첩과 초음파 사진, 주의 사항이 빼곡하게 적힌 종이를 건넸다.

무슨 영양제를 챙겨 먹어야 하고, 어떤 걸 하지 말아야 하는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지만, 귀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달력을 보며 다음 내원 일을 정하는데, 날짜를 확인하던 선경은 그 주에 전시회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단… 토요일로 해 주세요.”

“토요일은 산모분들이 많으셔서 예약된 시간보다 더 오래 대기하셔야 되실 수도 있어요. 괜찮으신가요?”

“네, 상관없어요. 그날로 해 주세요.”

전시회 다음 날로 내원 일을 정하고, 병원을 나섰다. 차에 올라탄 선경은 잠시 고민하다 갤러리가 있는 방향으로 출발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저녁을 한참 넘긴 시각이었다.

먼저 와 있던 한지석이 선경의 늦은 귀가를 반겼다. 그 역시 일하던 중이었는지, 서재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늦었네. 요즘 계속 바쁜가 봐?”

“…어.”

“저녁은?”

“먹었어.”

선경은 지친 듯 발을 느리게 끌며 부엌 쪽으로 걸어갔다. 손에 쥐고 있던 종이봉투를 식탁 위에 내려놓고 깨끗한 유리컵을 집어 들었다.

어딘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지석은 그 곁으로 다가왔다.

식탁을 왼손으로 짚은 채 선경이 물 마시는 모습을 지켜봤다. 조용히 기색을 살피던 시선 끝에 종이봉투가 걸렸다. 그곳에 적힌 병원 이름을 보는 순간 갈색빛이 도는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지석은 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수첩과 사진, 확인서 등을 차례로 꺼내 들었다.

“이게 뭐야?”

“…….”

“…너 임신했어?”

물 한 잔을 천천히 다 비워낸 선경은 컵을 내려놓고,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응.”

작게 대답하는데 두 눈은 바닥에 박혀 올라올 줄을 몰랐다. 왜인지 차마 지석의 얼굴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석이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말도 안 돼! 정말이야?!”

그는 우선경을 품에 가득 안고 뺨과 목덜미에 연신 입을 맞췄다. 벅찬 마음을 감출 수가 없는지 귓가에 붙은 숨소리가 거칠었다.

“왜 말을 안 했어! 병원도 혼자 다녀온 거야? 얘기를 바로 해 줬어야지.”

“그게…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뻐하는 반응에 선경은 뭐라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복잡한 마음을 꾹꾹 눌러 참느라 미간에 주름이 졌다. 눈가가 온통 뜨끈뜨끈했다.

“잘 모르겠어.”

죄를 고백하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한지석은 곧장 몸을 뒤로 물렸다. 그제서야 괴로워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석은 허리를 살짝 굽혔다. 눈높이를 맞추고 엄지로 선경의 주름진 미간을 부드럽게 쓸었다.

“왜 그래, 무서워?”

“난 형만큼… 기쁘지가 않아.”

선경은 제 얼굴을 만지는 손을 붙잡고 끌어내렸다. 여태 긴장을 하고 있었던 탓에, 손목을 잡은 손가락은 땀으로 축축이 젖어 있었다. 우선경은 묵혀 두었던 속마음을 전부 토해냈다.

“뱃속에 아기가 있다는데, 심지어 우리 아이인데… 기쁘기는커녕 한숨만 나와. 짐스럽고 부담스럽고, 마음이 너무 착잡해. 나도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너무 끔찍하고 싫은데, 조금만 더 늦게 와 주지 하는 마음만 자꾸 들어.”

“괜찮아, 놀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어. 내가 더 잘할게. 너 힘들지 않게….”

“우리 아이 꼭 지금 낳아야 해?”

결국은 해서는 안 될 말을 던졌다. 중간에 말이 잘린 한지석은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메가를 바라봤다.

눈을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하건만, 우선경은 고집스럽게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지금 한창 노력해야 될 때잖아. 형도 회사에서 자리 잡아야 하고, 나 갤러리 이제 막 시작했어. 여기에만 신경 쓰기도 하루가 모자란데, 어떻게 애를 낳고 키워. 나는…. 난 못 해. 자신 없어.”

“너 혼자 하게 안 둬. 나도 있고 도와주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거야. 선경아, 네가 원하면 아이 낳고 몸 회복되는 대로 바로 일해도 돼. 할 수 있어.”

떨리는 어깨를 쓰다듬었다. 한지석은 진심을 다해 선경을 달랬다. 그가 느낄 두려움과 부담감이 어느 정도인지 오롯이 체감할 수는 없었지만, 최대한 이해해 보려 애썼다.

“난 지금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니까!”

하지만 선경은 그런 노력마저 버거운지 진저리치며 거부했다.

격하게 팔을 떨치느라 식탁 위에 놓인 물병이 넘어갔다. 봉투에서 꺼낸 물건들이 짙게 젖어갔다. 한지석은 말없이 초음파 사진을 집어 물기를 툭툭 털어냈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애를 지우자고?”

“그렇게 쉽게 얘기하지 마.”

“네가 지금 바라는 게 그거잖아.”

내 말이 틀려? 뱉지도 않은 뒷말이 선경의 귀에 환청처럼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말없이 입술만 깨물고 서 있자, 지석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 상태로 더 얘기해 봤자 싸움만 커지지 둘에게 좋을 건 없다.

“늦었어. 일단 씻고 자. 걱정은 내일 해도 되니까.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하아, 또 한 번 한숨이 크게 밀려 나왔다. 그의 큰 손이 답답한 표정을 감추기 위해 눈가를 덮었다. 아마 본인은 연거푸 한숨을 쉬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선경은 도망치듯 침실로 들어갔다.

씻을 새도 없이 무기력해진 몸을 침대에 던졌다. 베개에 얼굴을 처박자 답답한 숨이 헐떡거리며 새어 나왔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치 그 속에 울음이 녹아든 듯 숨이 덥고 무거웠다. 기도가 꽉 막힌 것처럼 속은 여전히 갑갑했다.

저 역시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

전시회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갤러리는 말 그대로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다들 아침부터 새벽까지 불철주야 야근을 이어 갔고, 몇몇은 아예 양주 작업실에서 상주하며 작가를 케어했다. 다행히 견 작가가 뒤늦게 물이 오른 덕분에 예상 마감일보다 하루 일찍 작업을 끝낼 수 있었다.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었지만, 워낙 컨트롤해야 하는 일들이 많으니 티가 나질 않았다. 우선경은 여전히 정신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직원들은 아직 그의 임신 사실을 모른다. 심지어 다른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은 현재 선경이 전시회 준비를 핑계 삼아 얼굴을 피하는 탓에 며칠째 제대로 말도 섞지 못했다.

정장 차림에 머리를 질끈 묶은 큐레이터가 디자인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작업 현장에서 그대로 올라왔는지 어울리지 않는 미세분진용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그녀가 문틈으로 고개를 빼꼼 들이밀며 직원들 속에 섞여 있는 우선경을 찾았다.

“대표님. 방금 조명 설치 끝났어요! 확인하실 거죠?”

“네, 여기 컨펌만 끝내고 바로 내려갈게요. 여진 씨, 나 차 한 잔만.”

“넵!”

우렁찬 대답과 함께 굽 높은 하이힐이 또각거리며 계단을 밟고 내려간다. 여진은 1층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가 우 대표가 즐겨 마시는 캐모마일을 대신 주문했다.

얼마 전부터 대표의 취향이 변했는지 매일같이 찾던 커피는 끊고 따뜻한 차를 마신다.

뭐 따로 좋은 거라도 챙겨 먹나? 커피 없이 살인적인 스케줄을 버텨내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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