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대표님, 여기요.”
“고마워요.”
잠시 후 제3 갤러리로 넘어온 우선경은 건네받은 종이컵을 손에 쥐고 천천히 내부를 돌았다.
눈으로 세심하게 조명을 살피면서 종이컵을 입술에 붙였다. 허브향이 진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한 모금 삼키자 따뜻한 찻물이 바싹 마른 입안을 기분 좋게 적셨다.
새하얀 벽면엔 전시될 그림 대신 같은 사이즈의 테스트용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그 주위로 새로 설치한 조명들이 미세하고 보드라운 빛을 쏟아냈다. 선경은 동선대로 이동하며 수정해야 할 부분들을 하나하나 짚어 갔다.
“입구 쪽 너무 어두워요.”
“조도 더 높여 달라고 할까요?”
“네. 켈빈 값 설정은 지금 바로 바꿀 수 있죠?”
지시를 받은 여진이 컨트롤러를 조작했다. 다이얼을 돌리는 대로 색온도가 뒤바뀌었다. 지켜보던 선경이 어느 순간 딱, 하고 손가락을 튕겼다.
“지금 좋네요. 몇이죠?”
“5200 정도요.”
“응, 이걸로 픽스해 두고 이따가 8시에 맞춰서 한 번 더 확인을… 아!”
선경이 말을 멈추고 허리를 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진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대표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랫입술을 어찌나 꽉 깨무는지 앞니에 짓눌린 곳은 금방이라도 찢어질 듯 보였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잠깐… 만요.”
으윽, 배를 움켜잡은 선경이 몇 번이나 숨을 참았다. 요 며칠 알싸한 통증이 계속 이어지는 것 같더니만 결국엔 한번 크게 터졌다.
아픔을 참느라 이마에서 진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결국 못 참고 쭈그려 앉았다. 통증은 괜찮아지는 듯싶다가도 파도처럼 밀려들기를 반복했다.
“어디가 아프세요? 119 부를까요?”
“아니… 괜찮아요. 잠깐만 있으면 괜찮아지니까….”
“지금 얼굴이 말이 아닌데요! 병원 가셔야 해요.”
“여진 씨… 나 그럼, 하아, 택시만, 좀 불러 줘요.”
“택시요, 네네! 잠시만요!”
당황한 여진이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택시를 호출했다. 선경은 겨우 바닥을 짚고 일어나 숨을 골랐다. 몰아닥친 통증과 사투를 벌인 탓에 앞머리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통증이 언제부터 시작되셨죠?”
“사흘 정도… 됐습니다.”
“혹시 아래에서 피가 비치거나 한 적은 없고요?”
“네. 아직은요.”
담당의는 침음하며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 초음파를 확인하는 동안 내내 표정이 좋지 못했다.
선경은 등받이 없는 진료 의자에 걸터앉아 의사가 입고 있는 분홍색 가운만 멍하니 바라봤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죠. 우선경 씨와 같은 남성 오메가는 일반 모체보다 초기 유산 위험성이 50%는 더 높습니다. 물론 우성 오메가는 자궁 내막이 좀 더 튼튼한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는 건 굉장히 안 좋은 시그널이죠.”
“안 좋다는 게….”
“절박 유산 가능성이 보입니다. 일단 오늘은 호르몬 주사를 놔 드릴게요. 다음 내원하실 때까지는 무조건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절대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최대한 누워 계시는 게 좋아요. 혹시라도 내원 일 이전에 또 통증이 있거나 피가 보이거나 하면 시간 상관없이 바로 병원으로 오시고요.”
의사의 지시는 하나도 지킬 수 없었다. 전시회 오픈이 당장 이틀 뒤다. 해야 할 일이 태산이었다.
선경은 주사만 맞고서 다시 갤러리로 돌아왔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업무에 복귀했다.
호르몬 주사의 효과인지 이후 통증은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부터는 제법 멀쩡한 상태로 버틸 수 있었다.
그날도 저녁 11시가 넘어서야 귀가했다.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현관 앞엔 한지석이 버티고 서 있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와.”
“…….”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고 서 있는 그를 보는 순간 선경은 부담스러움에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꼈다. 신발을 벗으면서 아무것도 없는 목을 괜히 한 번 쓸어 만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지석은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들어와서 잠깐 얘기 좀 해.”
“다음에. 나 오늘 너무 피곤해.”
“오늘 병원 다녀왔었다면서.”
무시하며 복도를 지나치던 선경은 그 말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연해진 채로 뒤를 돌아봤다.
“그거 누구한테 들었어?”
“지금 그게 중요해? 왜 아픈데도 나한테 얘길 안 하는데.”
“누구한테 들었냐니까!”
“혹시 몰라서 병원에 내 연락처 남겨 뒀어. 보호자 연락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왜, 내가 가서 몰래 애라도 지울까 봐? 그게 그렇게도 걱정됐어?!”
그가 한걸음에 다가왔다. 소리를 지르다 못해 부들부들 떠는 우선경을 진정시키듯 꽉 끌어안았다.
“알았으니까 흥분하지 마, 너 이러다 잘못될까 봐 겁나.”
“나 좀… 그냥 내버려 둬.”
“…….”
“우리 전시회 끝나고 얘기하자. 그때까지만 형이 나 좀 봐줘.”
“알았어. 그렇게 해.”
그는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토록 안쓰럽게 떨어대는데 차마 반대할 수 없었다.
전시회 당일이 되었다.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다행히 말끔히 그쳤다. 웬일인지 그날은 평소보다 몸 상태도 좋았다.
행사 시간 한 시간 전, 우선경은 모든 준비를 마친 갤러리를 둘러보며 안도하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김주원 큐레이터가 다가왔다. 파티 분위기에 맞춰 짙푸른 명품 정장을 입고 걸어오는 모습은 꽤나 기품이 넘쳐 보인다. 그동안 대표 대행을 해왔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인사를 건네는 모습 또한 제법 당당했다.
“첫 전시회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고생한 보람이 있었네요.”
“아직 시작 전이니 인사는 나중에요. 샴페인은 끝난 뒤에 터트리도록 하죠.”
말과는 다르게 우선경의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배어 있었다. 기대가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시회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오늘이 지나면 라움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계속 회자될 것이다.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침 그 곁으로 견태화 작가도 다가왔다. 순백의 화이트 수트에 화려한 실크 스카프를 리본처럼 맨 그의 모습은 한눈에 봐도 오늘의 주인공다웠다. 누구보다 반짝반짝 빛났다.
“하아, 우 대표… 나 너무 떨리는데 어쩌지? 사람들이 내 그림 보고 악평하면 어떡해.”
다만 너무나 심약할 뿐이다. 견태화는 두 손을 벌벌 떨며 앓는 소리를 냈다.
“작가님.”
우선경은 몸을 반쯤 돌려 견태화와 마주 섰다.
모양이 삐뚤어진 스카프를 풀어내고 다시 작가의 목에 둘러 주었다. 보기 좋게 리본을 묶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제가 또 징징거리면 어떻게 한다 그랬죠?”
견태화가 아랫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곱슬곱슬한 갈색 머리 때문인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동안의 외모 탓인지, 어린애처럼 귀여운 행동을 해도 그게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다시는 나랑 작업 안 한다고 했어…. 그치만 우 대표, 떨리는 건 내 마음대로 조절이 안 돼. 나 개인전 너무 오랜만이라구.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면 어쩌지?”
“할 수 있어요. 작가님은 제가 고른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잘 해내실 거예요.”
“몰라아…. 분명히 말도 막 더듬고, 설명도 이상하게 할 거야.”
“오늘 전시회 잘 끝내시면, 지난번에 부탁하신 그거. 해드릴게요.”
“정말?! 그림 모델 해 줄 거야?! 진짜지?”
걱정이 가득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강아지처럼 제자리에서 방방 뛰던 견태화는 우선경의 마음이 바뀔세라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받아내기 바빴다. 옆에 있던 김주원에게도 증인이 되어 달라 부탁했다.
“괜찮으시겠어요? 사진 찍는 것도 싫어하시면서.”
“견 작가 달래는 건 그 방법이 최고예요. 저 사람 두 시간 동안 집중시키려면 강력한 보상을 머릿속에 박아놔야 하거든요. 뭐, 어차피 그림은 내가 살 거니까 문제없고.”
세상에 공개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우선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곤 소매를 걷어 시계를 확인했다.
“15분 뒤에 시작하도록 하죠. 그 전에 한 번 더 마무리 점검해 주세요.”
“네, 대표님.”
김주원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능숙한 솜씨로 직원들을 진두지휘하며 마지막 점검에 박차를 가했다.
예상대로 전시회는 화려한 성공을 거뒀다.
엄선되어 초대된 100명의 손님은 단 한 명의 불참도 없이 모두 참석했고, 작품은 한 시간도 안 돼 완판되었다. 몇몇 작품은 경쟁이 붙어 경매 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우려와 달리 견태화 작가는 침착하게 손님들을 맞이했고, 자신의 그림을 소개했다.
긴장으로 바들바들 떨면서도 꿋꿋하게 설명을 이어 나가는 오메가를 보며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랑스러워했다. 확실히 견 작가는 작품만큼 외형 또한 스타성을 갖추고 있었다.
우선경은 주변을 돌며 손님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그를 아는 VIP 고객들은 우선경의 취임을 열렬히 환영했다.
23살의 젊은 대표가 이끌어 나가기엔 라움이 너무 과분한 것이 아니냐며, 소꿉장난이 될 것이라고 의심했던 평론가들 또한 오늘의 전시회를 둘러보며 기획을 극찬했다.
작가와 작품에 포커스를 양보하기 위해 우선경은 최대한 무난하게 본인을 꾸몄다.
채도가 낮은 수트에 타이도 없이 가장 위의 단추를 설렁하게 푼 모습은 튀지 않고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아무리 소홀히 꾸몄어도 타고난 존재감을 죽이기란 쉽지 않다.
갤러리를 유영하는 그의 모습은 어딜 가나 돋보였고, 사람들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라움 갤러리의 대표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 같았다.
전시회가 한참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양 볼을 발갛게 물들인 견태화가 구석에서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우선경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