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83화 (83/127)

#83

“우 대표님, 내가 지난번에 선물로 준 그림 말이야. 그거 혹시 갤러리에 있어?”

“대표실에 놔뒀어요. 그건 왜요?”

“그거 혹시 잠깐만 빌려줄 수 있을까?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

팬들과의 대화에 완전히 심취해 버린 견태화는 흥이 오를 대로 올라 있었다.

작품도 벌써 완판이 되었고, 행사 시간은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뭔가 더 보여 줄 만한 것이 필요했다.

그러다 생각난 게, 얼마 전 양평으로 와 준 우선경에게 선물한 오일 페인팅 그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주제와 상관없는 그림을 무턱대고 공개할 순 없었다. 선경이 곤란한 듯 난색을 보이자 견태화는 그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응? 한 번만. 제발 부탁이야.”

“…알겠어요. 건형 씨. 나 대표실 좀 다녀올게.”

“제가 갔다 올까요?”

“아냐, 내가 찾는 게 쉬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요.”

안 그래도 아까부터 배가 사르르르 아파와서 쉬고 싶었던 참이다. 대신 가겠다는 직원을 만류하며 선경은 갤러리를 잠시 떠났다.

업무동 건물은 층층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전시회 하나를 진행하기 위해 온 직원이 이토록 고생하고 있었다.

끝나면 후하게 보상해 줘야겠다, 생각하며 우선경은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문이 활짝 열린 승강기 안으로 올라탔다. 버튼을 누르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엘리베이터가 목적지까지 올라가는 동안 차가운 은색 손잡이를 붙잡고 잠시 몸을 기댔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한번 시작된 통증은 사그라들기는커녕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복통을 넘어서 하복부를 쥐어짜는 느낌마저 들었다.

선경은 눈을 꾹 감으며 통증을 견뎠다. 괜찮아, 잠깐 쉬면 될 거야. 스스로를 다독였다.

고작 5층을 올라가는 데, 세월이 한참이다.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땡!

맑은 알림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선경은 비척대며 걸어 나와 대표실로 향했다. 겨우 문 앞까지 가 보안을 해제하고 손잡이를 돌렸다.

“아윽!”

순간 배를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밀려와 허리를 굽혔다. 안간힘을 다해 참아 보는데도 신음이 절로 터졌다.

버티지 못하고 몸이 점점 흘러내렸다. 어느새 바닥을 기다시피 했다. 감당하기 힘든 통증이 거듭 찾아오자 선경은 머리를 박은 채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아윽…. 흐!”

너무 아파서 숨이 잘 안 쉬어졌다. 미처 삼키지 못한 침이 입 밖으로 길게 흘러내렸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휘발되고 있었다. 바늘 수십 개를 삼킨 것처럼 아랫배가 찌릿찌릿했다.

“허억, 하아….”

입으로는 헐떡이는 숨을 뱉으며 양손으로 배를 붙잡았다. 고통에 절여진 머리가 카펫을 짓누르고 두 발이 애처롭게 발버둥쳤다.

하복부가 사정없이 뒤틀리던 그때, 속옷이 축축해지는 게 느껴졌다. 느닷없이 다리 사이가 젖는 기분은 섬뜩할 정도였다.

‘피가 나진 않았나요?’

‘지금 같은 증상이 반복된다는 것은 굉장히 안 좋은 시그널이에요.’

의사가 했던 경고가 둥둥 떠다녔다. 가슴이 널뛰듯 쿵쿵 울렸다. 사납게 뛰는 심장 박동이 귀에까지 전달되는 것만 같았다.

한차례 끔찍했던 아픔이 지나가자 갑자기 어느 순간부터 뱃속이 잠잠해졌다. 선경은 땅을 짚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무릎이 떨렸지만, 다행히 혼자서도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대표실 한쪽에 딸린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에는 온통 식은땀으로 젖은 얼굴이 보였다. 한눈에 봐도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대로 샤워실 부스로 들어갔다. 타일 벽에 등을 기대고, 잘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을 놀려 바지 버클을 열었다. 마침 허벅지를 타고 뜨뜻한 무언가가 길게 흘러내렸다.

선경은 손을 아래로 뻗어 다리 사이를 훔쳤다.

“…….”

떨리는 손끝은 새빨간 피로 범벅이었다.

선경은 잠시 멍해진 채로 손에 묻은 피를 내려다봤다. 사고 회로가 멈춘 듯 머리는 도통 상황을 받아들이질 못했다.

좁은 부스 안이 비릿한 냄새로 가득했다.

이제는 배가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임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선경이 생각하더라도 좋은 징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미 늦어버렸다.

더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

“하아….”

선경은 자책이 담긴 한숨과 함께 머리를 뒤로 젖혔다.

피가 묻지 않은 손바닥 아랫부분으로 눈두덩을 지그시 눌렀다. 한참 만에 손바닥을 내리자 빨갛게 충혈된 눈이 드러났다.

벌어진 옷을 대충 여몄다. 한 번 더 심호흡한 뒤, 일단 샤워 부스를 빠져나왔다.

종이 타월을 뽑아 다리 사이를 닦아냈다. 젖은 속옷도 여러 번 훔치고, 피가 더 묻어나지 않을 정도가 돼서야 바지를 끌어 올렸다.

수북이 쌓인 티슈를 변기에 떠내려 보내고, 손에 말라붙은 피를 흐르는 물에 씻어냈다. 손가락 사이, 손톱 아래까지 전부 다 꼼꼼히 닦았다.

마지막으로 작은 페이스 타올을 꺼내 이마와 목덜미에 흥건히 배인 식은땀까지 훔쳐냈다. 젖은 수건은 바구니에 던져 넣고 욕실을 나왔다.

대표실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다.

걸음을 옮겨 책상 뒤 벽면에 세워둔 그림을 찾아낸 뒤, 문단속까지 하고 대표실을 떠났다.

다시 갤러리로 돌아온 선경은 그림을 직원에게 넘겨주고 나서 시계를 확인했다. 행사 시간은 아직 삼십 분이 남아 있었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하게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 곁으로 다가오며 반갑게 말을 걸었다.

“대표님, 여기 계셨구나. 한참 찾았는데! 우리 아까 말했던 거 있잖아요. 내가 계속 생각해 봤는데 말이에요.”

원피스에 달린 반짝이는 스팽글이 눈앞을 어지럽게 떠돌았다. 나긋한 목소리가 뭐라 뭐라 떠들어 대는데 귀까지 전해지지가 않았다.

선경은 어금니를 악물고 눈에 바짝 힘을 줬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엄지손톱으로 손가락을 사정없이 후벼 팠다.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제대로 보였다.

“네, 여사님이 원하시는 거면 어떻게든 구해드려야죠. 작가님께는 제가 직접 컨택해 보겠습니다.”

“정말이죠?! 아우, 어쩜 좋아! 나 벌써 설레고 막 그래! 아 참, 혹시 이번에 스위스 아트페어도 직접 가나요? 우 대표 가면 나도 따라갈까 싶어서. 자기랑 간다고 하면 우리 회장님도 좋아하실 텐데.”

“그러면 저도 좋죠. 그 전에 시간 내서 같이 식사 한번 하시죠.”

우선경은 허리를 곧게 세웠다. 언제 힘들어했냐는 듯 해사한 미소를 띠며 손님을 응대했다. 그의 주변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레 모여들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일렬로 선 갤러리 직원들이 마지막 손님에게 인사했다.

행사는 제시간에 끝났지만 초대객을 한 명 한 명 배웅하다 보니 예정되었던 것보다 삼십 분 정도가 더 오버됐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큰 행사를 잘 마무리했다는 생각에 직원들의 얼굴엔 웃음기가 만연했다.

“수고하셨습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짝짝짝! 어디선가 자축하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한번 시작된 박수는 유행처럼 번졌다. 손가락으로 휘슬을 부는 소리까지 더해져 축하 분위기를 돋웠다.

펑!

유리창 바깥에서 누군가가 시기적절하게 샴페인을 터트렸다.

중력을 거스르며 솟아오른 하얀 거품이 창문과 돌계단, 주변에 서 있던 큐레이터들의 옷을 흠뻑 적신다. 다들 비명과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완벽한 마무리였다.

“괜찮으세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김주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의 눈엔 우선경의 상태가 영 정상으로 보이질 않았다.

긴장이 풀어져서 몸살이라도 온 걸까?

아까만 해도 멀쩡한 것 같더니, 손님이 빠져나가고 나서부터 급격하게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기둥에 의지해 겨우 서 있는 모습은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다.

우선경은 옆구리를 짚은 채 입에 고인 침을 억지로 삼켰다. 목울대조차 힘겹게 움직였다.

“수석님, 미안하지만 마무리 좀 부탁해도 될까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많이 힘드세요?”

“…조금요. 그리고 강 비서 좀 잠시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운전해 줄 사람이 필요한데.”

“그럼요! 여기는 제가 책임지고 정리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들어가세요. 강 비서에겐 지금 바로 연락해 놓겠습니다.”

김주원이 서둘러 전화를 거는 사이, 직원들의 눈을 피해 뒷문으로 몰래 빠져나갔다. 흥겨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주차장으로 걸어가자 강 비서가 차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선경은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그에게 차 키를 넘겨주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서둘러 운전석에 오른 강 비서가 뒤돌아 우선경의 안색을 살폈다. 이미 김주원에게 상황은 전달받은 뒤였다. 걱정되는지 축 늘어진 목소리로 물었다.

“바로 병원으로 갈까요? 지금 시간이 늦어서 문 연 곳은 큰 병원 응급실밖에 없을 텐데요.”

선경은 유리창에 머리를 기댄 채 웅얼거렸다. 기력이 없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S대 병원으로 가주세요.”

“네? 거긴 여기서 좀 멀지 않습니까. H 병원이 훨씬 더 가까운데.”

“아니요, S대로 가야 해요. 거기 산부인과로….”

“산… 산부인과요!?”

강 비서가 경기를 일으키듯 소리 질렀다. 우선경은 맥없이 손을 저었다. 지금은 짜증을 낼 힘도 없었다.

“강 비서, 빨리….”

“네! 네! 조금만 참으세요!”

강 비서는 평소 운전 스타일을 버리고 서울 시내를 험악하게 내달렸다. 과속과 신호 위반으로 고지서가 여러 장 날아올지도 모른다. 어찌나 액셀을 밟았는지 30분도 넘게 걸리는 거리를 15분 만에 주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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