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84화 (84/127)

#84

빨간 표시등이 들어와 있는 응급진료센터 앞에서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선경은 스스로 문을 열고 내려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환자들과 의료진, 보호자가 복잡하게 뒤엉킨 응급실은 다소 정신이 없었다.

주위를 살펴보던 우선경은 환하게 불이 켜진 스테이션 쪽으로 다가갔다.

서너 명의 의료진들이 모니터 뒤에서 뭔가를 열심히 적고, 검색하느라 분주했다. 선경은 배꼽 위로 올라오는 난간을 짚고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하나요.”

“네? 아, 부인과 진료는 저희 병원 다니시는 분만 가능한데….”

“여기 다니고 있어요.”

“진료는 누가 받으실 건데요? 어디가 어떻게 안 좋으시죠?”

“제가…. 방금 유산을 한 거 같아서요.”

모니터 뒤에 가려져 있던 의료진의 얼굴이 불쑥 위로 튀어 올랐다.

당직을 서고 있던 2년 차 레지던트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리는 오메가를 보고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

한지석이 연락을 받고 병원에 도착한 것은 하루가 막 넘어가는 자정 무렵이었다.

병실 문을 열어젖히는 얼굴이 어찌나 놀라고 참담해 보이던지, 선경은 차마 그를 오래 보지 못하고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곁으로 다가온 지석은 열기로 온몸이 후끈거렸다. 어디서부터 뛰어온 것인지 얼굴은 물론 입고 있는 셔츠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흉곽이 쉴 새 없이 부풀고 꺼졌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미안해.”

다짜고짜 미안하다는 소리가 튀어나오자, 지석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보호자분, 잠시 저랑 얘기 좀 나누시죠.”

그때 담당의가 조심스럽게 한지석을 불렀다.

우선경은 끝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고집스러운 모습을 지켜보던 지석은 땀에 젖은 머리를 넘기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의사를 따라 잠시 병실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복도에서 긴 대화를 나눴다.

9주. 출혈. 유산.

우습게도 이 지경이 돼서야 우선경의 상태를 자세히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돼서 유감입니다.”

“환자는, 몸은… 괜찮은 건가요?”

“초음파상으로는 크게 문제없는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내일 한 번 더 정밀 검사 해 보고 이상이 없다면 퇴원해도 좋을 겁니다. 다만 문제는…. 당분간 푹 쉬셔야 하는데 환자분이 워낙 강경하셔서 말이죠. 오늘만 해도 유산 징후가 나타난 이후에도 한 시간 정도를 참고 버티셨다고 하더군요. 이렇게까지 해야 될 만큼 중요한 일이 있는 겁니까?”

“…….”

한지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우선경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왜 그랬는지는 제가 함부로 언급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시 후, 다시 병실로 돌아온 한지석은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붙였다. 털썩 소리 나게 주저앉는 모습이 어딘가 지치고 서글퍼 보였다.

눅눅해진 갈색 눈이 선경의 오른손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하얀 팔뚝에 꽂힌 링거 바늘을 보며 그는 괴로운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왜 바로 연락 안 했어.”

“형 불렀어도 결과는 똑같았을 거야.”

“적어도 네 옆에 있어 줄 순 있었겠지. 너 혼자 모든 걸 겪고 있을 동안에도. 혼자 정리하고, 병원까지 혼자 와서 입원 수속까지 마칠 때까지도 나는 등신같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어. 그것도 강 비서 연락을 받고서야 겨우 알았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한지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손바닥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엔 고단한 낯이 드러났다.

“네가 무엇보다 네 일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거 나도 알아. 아이보다 더 우선이었다는 것도 뭐라 할 생각 없어. 하지만 너는…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 네 보호자 아냐?”

“…….”

“우리가 가족이긴 해?”

선경은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오히려 얼굴을 무릎 사이에 더 깊게 묻고 양팔로 머리 위를 감쌌다. 방어적인 태도에 한지석 또한 더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쉬어. 내가 있으면 더 불편할 테니까 자리 피해 줄게. 밖에 계속 있을 거니까 필요하면 부르고.”

“…….”

의자에서 일어나 문까지 걸어 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뚜벅뚜벅 크게도 울렸다.

병실 문이 열렸다 닫히고, 방 안에 자신의 숨소리만 들릴 때가 돼서야 선경은 무릎에서 고개를 뗐다.

굵은 눈물이 이불 위로 뚝뚝 떨어졌다.

서럽고, 미안하고, 통탄스러웠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으로 조용히 가슴을 긁었다. 선경은 소리를 삼키며 쥐 죽은 듯이 울었다.

후회한들,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순 없었다.

퇴원한 이후부터 우선경은 더 깊이 일에 매달렸다.

새벽 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하다 들어오는 일이 허다했고, 주말에도 집에 붙어 있는 경우가 드물었다. 마치 갤러리를 도피처로 삼은 듯했다.

일이 바쁜 건 한지석 역시 마찬가지라 둘의 엇갈림은 더 깊어졌다. 대화는커녕 얼굴을 보기도 힘들었다.

가끔씩 잠에서 깨면 옆에 누워 있는 상대를 보며 집에는 들어왔구나, 작게 안도하고 말 뿐이다.

몸과 정신을 갈아 넣은 덕분에 일은 성과를 거뒀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답답한 응어리가 풀어지지 않았다.

갑갑하게 목 메이는 감정이 지속되는 어느 날이었다.

언제나처럼 제게 들어온 수많은 결재 서류를 검토하던 중이었다.

인조가죽으로 된 까만 결재판을 열어 본 한지석은 뜻밖의 내용에 아, 하고 작게 탄식했다.

그건 3년간 무상 임대했던 연수원 부지가 계약 종료되어 반환된다는, 한 장짜리 짧은 보고서였다.

기억 속에 묻혀 있었던 천사원이 떠올랐다.

어떻게 계속 잊고 있었지?

당혹감과 함께 자신의 무신경함에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한지석은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내려놓고 핸드폰을 집었다. 수많은 연락처 속에서 낯익은 전화번호 하나를 찾아냈다.

다행히 연락처를 바꾸지 않았는지 원장과 바로 연락이 닿았다.

‘하하하, 덕분에 삼 년 잘 보내고 간다.’

‘일이 잘 풀려서 새로운 곳으로 이전하기로 했어. 이제는 이사 다닐 걱정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아.’

‘현진이는 외삼촌이 찾아와서 작년에 퇴소했다. 안 그래도 잘 지내는지 걱정인데… 연락을 해도 잘 받질 않더라고.’

그날 지석은 오후 일정을 취소하고 서울 다산동을 찾았다.

손에는 김현진의 집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가파른 동네 언덕길을 올랐다.

매끄러운 검은 구두가 금이 가고 군데군데 홈이 파인 바닥을 밟았다. 낡고 오래된 단층짜리 가건물이 빼곡하게 늘어선 달동네는 햇빛이 쨍쨍한 낮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빈집이 태반이었고, 담벼락 곳곳엔 빨간 스프레이로 철거 예정이라는 낙서가 휘갈겨져 있었다.

지석은 주소를 하나하나 확인하며 비탈길을 올라갔다. 컹컹컹! 빈집을 지키는 개가 외지인을 보며 사납게 짖어댔다.

“여긴데….”

쪽지에 적힌 주소를 맞게 찾아왔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는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학교에 있을 시간인가…, 손목에 찬 시계를 힐끗 훑었다. 오후 3시 반. 애매한 시간이긴 했다. 이대로 떠나기엔 아쉬워서 잠시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돌계단에 앉았다. 재킷을 벗어 손에 쥐고, 다리는 길게 뻗었다. 산꼭대기답게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닥친다. 덕분에 땀으로 젖은 이마가 차갑게 식어 갔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변두리 달동네가 남아 있을 줄 몰랐는데, 지석은 가슴이 부풀도록 숨을 깊이 들이켰다. 코끝에 스미는 퀴퀴한 냄새와는 별개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언덕 위에선 넓게 펼쳐진 하늘과 산, 탁 트인 서울의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막혀 있던 가슴이 조금은 뚫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저 멀리 아래에서 교복을 입은 학생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땅만 보며 걷고 있어 확인할 수 있는 건 오직 까만 정수리밖에 없었다. 지석은 늘어져 있던 다리를 추스르며 아이가 고개를 들기만을 기다렸다.

어느새 계단을 꽤 많이 올랐을 때였다.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코를 킁킁거린 김현진은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대며 멈춰 섰다. 그 자리에서 얼굴을 치켜들었다. 생각보다 훌쩍 자란 모습에 한지석 역시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와, 몰라보겠네.”

“…….”

“나 누군지 기억나?”

한지석은 바지를 털고 돌계단에서 일어났다. 불쑥 솟아오르는 큰 키에 현진의 시선이 위로 따라 올라갔다.

눈이 마주치자 지석이 온화하게 웃었다. 김현진, 형 기억 안 나? 장난스럽게 묻는 목소리가 또 한 번 들려온다. 현진은 참지 못하고 달려가 지석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

“벌써 17살이나 됐구나.”

“…네.”

어색한 존댓말에 지석은 실소를 터트렸다. 남의 집 애들은 순식간에 자란다더니, 못 본 새 정말 많이 컸다 싶었다.

작달막하던 키도 훌쩍 자라 있었고, 팔다리도 제법 길어졌다. 자세히 뜯어보면 어릴 때의 이목구비가 언뜻 남아 있기도 했지만, 만약 길거리에서 봤다면 못 알아보고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번듯한 카페 하나 없는 동네라, 작은 슈퍼에 들러 음료를 샀다.

가게 주인이 나름 구색 맞춰 놓아둔 낡은 테이블에 앉아 해묵은 대화를 나눴다. 대부분 김현진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외삼촌이랑 같이 산다며. 어때? 보육원에서 살던 것보다 더 좋아?”

“그게….”

김현진은 머뭇거리며 손톱 옆 거스러미를 뜯었다. 잠시 망설이더니 저의 답답한 사정을 털어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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