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외삼촌이 찾아온 건 작년 봄이었다. 그를 따라 이 허름한 달동네에서 살게 된 지도 일 년하고 사 개월이 지났다.
처음엔 제게도 가족이 생겼다는 말에 그저 좋아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녹록지 않은 현실에 좌절해야 했다.
외삼촌은 도박 중독자였고 제대로 된 직업조차 없었다. 뒤늦게 나타나 김현진을 찾은 건 거둬서 키울 목적이 아니라 정부에서 주는 지원금을 타 먹기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큰 아이는 신경 써서 돌봐 줄 필요도 없었다. 알아서 밥도 짓고, 청소와 빨래도 스스로 해낼 만큼 머리가 영글었다. 오히려 득이 되면 득이 됐지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다.
현진이 이런 제 상황을 깨달은 것은 외삼촌과 함께 산 지 반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이미 퇴소 절차가 끝나버려 보육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가출을 하기엔 세상이 너무나 무섭고 험난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듣던 한지석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티 나지 않게 아이의 외관을 살폈다.
덥수룩하게 목덜미를 덮은 머리와 남의 것을 물려 입어 누렇게 색이 바랜 교복 셔츠, 길이가 맞지 않아 발목이 껑충 드러나는 바지와 반질반질하게 밑창이 닳아버린 슬리퍼까지. 어떻게 봐도 가난에 방치된 모습이었다.
차라리 보육원에 있을 때가 더 나았던 것 같다.
그동안 이런 사정도 모르고 있었다는 게 미안하고 안쓰러웠다. 한지석은 다리를 꼰 무릎 위에 팔을 걸쳤다.
“때리거나, 그러진 않고?”
현진은 끄덕거렸다. 말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연신 코끝을 긁었다.
“가끔 물건을 던지긴 하지만 때리진 않아요. 한 달에 한 번씩 복지과에서 사람이 나오니까… 때리면 큰일 나거든요.”
“…….”
“저는 괜찮아요. 그래도, 가족이잖아요.”
그게 정말 괜찮을 리 없었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지석은 고개를 바로 돌리며 입가를 문질렀다.
“하아….”
허탈한 한숨이 입술을 덮은 손가락에 부딪혀 공기 중으로 흩어진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들고 있던 재킷을 뒤졌다. 안주머니에서 까만 지갑을 찾아냈다. 그 안에서 빳빳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받아, 도움 필요한 일 생기면 연락하고.”
뭔지도 모르고 현진은 눈앞에 불쑥 들어온 종이를 받았다.
명함에 적힌 한지석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유명한 대기업 회사 로고가 차례대로 눈에 밟혔다. 저도 익히 잘 아는 곳이라 탄성이 나왔다.
“헤엑… 되게 좋은 곳 다니시네요.”
“뭐?”
지석이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무방비한 웃음소리에 현진은 머쓱해져 어깨를 웅크렸다.
“…들었어요. 형 되게 부자랑 결혼했다고.”
“맞아, 덕분에 되게 좋은 곳에서 일하고 있지.”
“그 사람 맞죠? 예전에 같이 왔었던 오메가요.”
우선경을 언급하는 듯한 말에 지석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천사원에 같이 가긴 했으나 분명히 제 기억에 두 사람은 만난 적이 없었다.
“선경이 본 적 있어?”
김현진은 대답 대신 고개만 주억거렸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건 저의 짧은 인생에 몇 없는 강렬한 기억 중 하나다.
현진은 얼굴을 푹 수그린 채 아랫입술을 감쳐 물었다. 입술에 아슬아슬하게 달라붙은 각질을 앞니로 뜯어냈다. 결국엔 피가 나는지 찝찌름한 맛이 느껴졌다. 아릿한 상처를 혀로 훑어대던 현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진짜로 연락해도 돼요?”
“진짜로 해도 돼.”
“다음에도 만나 줄 거예요?”
“음….”
한지석은 스트레칭을 하듯 허리를 쭉 폈다. 꼬고 있던 다리도 넓게 벌리고, 고개도 좌우로 꺾었다. 등받이도 없는 플라스틱 의자가 영 불편하던 참이다.
“대신 이 동네에서는 말고. 좀 제대로 된 곳에서 보자.”
이후 회사로 잠시 복귀했다가 급한 일만 마무리 짓고 귀가했다. 집에 도착했을 땐 해가 깜깜하게 저문 저녁 9시였다.
집 안은 늘 그렇듯 불이 꺼져 있었다. 한지석은 습관처럼 복도와 거실, 주방의 불을 하나하나 켜 가며 썰렁한 집에 온기를 채워 넣었다.
드레스룸에서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갈증이 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주방은 어질러진 곳 하나 없이 깔끔했다. 이 집에선 식사조차 하지 않으니 싱크대는 늘 물기도 없이 바짝 말라 있었다.
한지석은 조용히 물을 따라 마셨다. 무거운 적막이 감도는 집에선 목구멍으로 물 넘어가는 소리도 유독 크게 들렸다.
그때, 삐걱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다. 우선경이 수건을 뒤집어쓴 채 침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만남에 두 사람은 서로 놀란 듯 굴었다. 집에서 부부가 얼굴을 마주치는 게 이토록 새삼스러워할 일인가 싶었지만, 깨어 있는 얼굴을 보는 건 근 나흘 만이었다.
침실에 딸린 욕실에서 씻고 나왔는지 우선경은 두툼한 목욕 가운을 입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냉장고를 열고 차갑게 식은 물을 꺼냈다.
선경은 제 자리에 서서 생수병 뚜껑을 잡은 채 잠시 고민했다. 여기서 마실지, 말지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 생수병을 움켜쥐고 뒤돌아섰다. 가운 아래로 드러난 하얀 종아리가 침실이 있는 쪽으로 뻗어 나가려던 때였다.
“선경아.”
지석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저녁 먹었어?”
“…….”
“난 아직인데, 같이 먹을래?”
오랜만에 들어 보는 다정한 권유였다. 선경은 돌아보지도 않고 두 손에 힘을 꽉 쥐었다. 플라스틱 생수병이 손 안에서 꽈드득 구겨지는 소리를 냈다.
왜 이 시간까지 밥도 안 먹고 다녀.
“생각 없어.”
안쓰러운 속마음과 다르게 퉁명스러운 대답이 나갔다.
“그래, 알았어.”
체념한 듯 덤덤하게 대답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빤히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눈을 한번 꾹, 감았다 뜨고 나서 다시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쉽지 않네.”
굳게 닫힌 방문을 쳐다보던 지석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어떻게 해야 관계가 회복될지, 그 역시도 방법을 찾지 못했다.
우선경에 대해선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요즘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도, 지금 어떤 심정인지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래가지고 틀어진 관계를 회복할 순 있을까. 언제까지 대화도 단절한 채 남처럼 살아야 할까. 우울한 고민만 끝없이 이어졌다.
지석은 싱크대 상판을 짚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하아, 답답한 한숨이 천장을 향해 흘러나왔다. 심란한 마음을 풀어내기 위해 술이라도 한잔 마실까 싶어 기대있던 몸을 세우던 때였다.
닫혀 있던 방문이 다시 열리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선경이 밖으로 나왔다.
급하게 나온 흔적이 역력했다. 수건으로 물기만 겨우 털어낸 탓에 앞머리가 하얀 이마에 가닥가닥 붙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작은 물방울이 톡, 떨어지며 어깨를 적셨다. 선경은 머뭇거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저녁, 먹자.”
“…….”
“나 형이 끓인 라면 먹고 싶어.”
한지석은 그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겨우 내민 손을 뿌리칠 만큼 그는 멍청하지 않았다.
***
2년 뒤. 서울 강남 모처.
구도경은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었다. 입술 끝에 물린 담배엔 털어내지 못한 하얀 재가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의 다리 밑에 기어들어 가 열심히 좆을 빨던 호스트바 종업원은 담뱃재가 혹시라도 제게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다. 덕분에 집중하지 못하고 쉼 없이 눈을 치켜세웠다.
대각선에 자리 잡은 성기웅 기자는 게으르게 앉아 있는 구도경과 그 밑에서 봉사하는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흐읍, 읍. 침으로 범벅된 성기를 빠느라 버겁게 신음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퍽 안쓰럽게 들렸다.
저 답 없는 변태 새끼.
난잡하게 노는 모습이야 한두 번 보는 것도 아니지만 굳이 베타가 있는 술집을 찾아온 이유가 상당히 좆같았다. 이곳에 사촌 동생을 닮은 선수가 있다나 뭐라나.
뻐끔뻐끔 담배를 빨아대던 구도경은 성기웅 기자가 들고 온 사진을 감상하며 킥, 웃었다.
반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며 성 기자님, 하고 친근하게 호칭을 불렀다. 손에 쥔 사진을 팔랑팔랑 흔들었다.
“사진이 왜 다 이따위예요? 이래가지고 밥 벌어 먹고살 수 있겠어요?”
“…그게, 저희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겁니다. 구 상무님도 우선경 대표가 얼마나 철두철미한지 아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사람을 많이 만나면 뭐 하냐고요. 떡밥은커녕 오해받을 만한 각도도 안 나오는데.”
“그래서 이딴 결과물을 나한테 들이미는 거예요? 씨바, 사람이 양심이 없어. 돈을 그만큼 처먹었으면 값어치는 해야 될 거 아냐!”
구도경이 성질을 못 이기고 들고 있던 사진을 허공에 던졌다. 손바닥만 한 인화지가 사방팔방 흩날린다.
모든 곳엔 우선경이 찍혀 있었다. 성 기자가 한 달 동안 잠복해 가며 촬영한 파파라치 사진이었다.
성기웅은 이 바닥에서 꽤 유명한 열애설 전문 기자였는데, 아니 땐 굴뚝에서도 연기를 피워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어찌나 미묘한 타이밍을 잘 잡는지 멀쩡한 사이도 심상치 않게 만들곤 했다.
그는 이 재주를 이용해 연예인과 소속사에 합의금을 받아냈다. 박봉의 기자 월급보다는 그쪽이 훨씬 더 쏠쏠했다. 그러다 최근에 와선 구도경이라는 큰 손을 만났다.
구도경의 의뢰는 단순했다. 우선경을 쫓아다니며 뭐든 잡아낼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