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86화 (86/127)

#86

아트갤러리를 운영하는 사람답게 우선경은 많은 이들을 만났다.

어느 날은 훤칠하게 잘생긴 신인 작가였고, 또 어느 날은 돈 많은 회장님이었다. 사업가와 연예인, 비평가와 거래처 직원까지. 대상은 성별과 형질 가릴 것 없이 다양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공사를 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선경은 철두철미했다.

어디서나 늘 격식을 차렸다. 아무리 친한 직원이라고 한들 불필요한 스킨십을 한다거나 일정 거리 안으로 곁을 내주지 않았다. 최대한의 접촉은 악수, 딱 그 정도였다.

어렵게 찍은 사진은 늘 구도경의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하지만 이걸 굳이 모아서 한 달에 한 번씩 한지석에게 보낸다. 이 짓을 한 지도 벌써 6개월이 돼가고 있었다.

언젠가 술이 머리꼭지까지 오른 구도경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대체 이걸 해서 얻는 게 뭐냐고.

당시 만취한 구도경은 히죽 웃으며 순순히 속내를 털어놨다.

‘걔네 이혼시킬 거야. 그래야 내가 얻어먹는 게 있거든.’

작년, 우 회장이 타계했다. 향년 86세였다.

정해진 대로 상속 절차가 진행됐다. 유언장은 미리 가족들과 협의가 되었던 부분이라 별다른 잡음이 발생하진 않았다.

해외 법인에서 햇수를 채우고 복귀한 우재경은 곧바로 부사장 자리에 올랐다가 얼마 전 부회장으로 승격됐다.

그녀는 모든 공식적인 자리에서 서화 그룹을 대표해 얼굴을 드러냈다.

가지고 있는 주식 지분이나 우 회장의 유언, 최근 행보를 고려하면 그룹 총수와 별반 다를 게 없었지만, 아직 젊은 나이를 의식해 회장직은 공석으로 놔둔 상태였다.

한지석은 전무이사 자리에 올랐다. 그 역시 2년도 안 돼서 자신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혔다.

굵직한 실적을 만들어내자 자연스럽게 평판도 좋아졌다. 어느새 회사 내엔 그를 배척하는 세력보다 따르려는 세력이 더 커졌다.

라인을 타기 위해 잘 보이려 아부하는 이들도 늘었다. 이대로만 간다면 아마 수월하게 사장직에 오를 거라고 예측하는 듯했다.

두 알파가 다들 제 밥그릇 챙기며 올라가기 바쁠 때, 구도경만 제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우 회장에게 받은 계열사 주식들과 호텔 지분은 그저 허울 좋은 재산일 뿐,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나마 어머니 소유의 백화점 임원직이 있었으니 망정이지 제대로 된 직함 하나 없을 뻔했다.

같은 알파인데 저만 이 꼴로 있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다.

우재경은 워낙에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 그렇다 쳐도, 한지석은 애초부터 가족도 아니었던 놈이다.

굴러 들어온 것도 모자라 떵떵거리며 잘나가는 꼴이 어찌나 보기 싫던지. 제가 잘나갈 수 없다면, 한지석이라도 끌어내려야 속이 편할 듯싶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죽자 살자 붙어 다니던 우선경과 한지석이 요 몇 년 새 사이가 소원해졌다는 것이다.

결혼한 지 4년 차, 여전히 아이 소식은 없었고 그 집에 몰래 심어 놓은 고용인 말에 의하면 몇 달 전부터는 한지석이 본인 서재에 작은 매트리스를 넣어 놨다고 한다. 각방을 쓰기 시작했다는 거다.

“아이씨, 잘만 하면 될 것 같은데….”

뭐든지 한 방이 필요했다. 구도경은 이마를 긁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온 신경이 다른 데 쏠려 있다 보니 성기는 사정할 기미조차 보이질 않았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남자는 지친 듯 잠시 고개를 뒤로 물리고, 뻐근한 턱을 문질렀다.

“그… 한지석 이사가 계속 만나는 애새끼 있지 않습니까.”

마침 성기웅 기자가 눈치를 보다 슬쩍 말을 얹었다. 애새끼? 누군지 쉽게 떠오르지 않는지 구도경이 되물었다. 성 기자는 핸드폰을 꺼내 예전에 찍어 뒀던 사진 하나를 불러왔다.

“그 보육원 출신 어린애요. 계속 도와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만나는 것 같던데요. 어때요, 그림 좀 한번 만들어 볼까요?”

“그렇게 자주 본다고? 뭔데, 예뻐?”

구도경은 핸드폰을 받아 액정 위를 두 손가락으로 벌렸다. 그 안에 담긴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울 만큼 확대됐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보이는 건 볼품없고 비쩍 마르기만 한 남자애였다. 구도경은 실망한 듯 소리를 바락 질렀다.

“아이씨, 이런 걸 어따대고 들이대. 와꾸 사이즈가 안 맞잖아! 장난해?!”

어떻게 봐도 평범한 인상이었다. 얼굴이 조금 하얗다 뿐이지 예쁘지도 않았다. 순한 얼굴은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가난과 퍽 잘 어울렸다. 여러모로 한지석과 어울리는 급이 아니었다.

“한 이사는 그동안 누굴 들이대도 꿈쩍도 안 했잖습니까. 오히려 이렇게 꾸준하게 만나는 상대라면 우 대표 입장에선 임팩트가 더 클 수도 있죠.”

“…그런가?”

줏대 없이 그 말에 또 귀가 솔깃해진다. 구도경은 핸드폰을 주인에게 넘겨주며 슬쩍 말을 흘렸다.

“그러면… 한번 해보든가.”

“네, 알겠습니다. 우선경 대표 사진은요. 이번엔 안 보내실 겁니까?”

“찍은 걸 왜 안 보내, 아깝게시리.”

맘에 안 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소파 위에 나동그라진 사진을 다시 주워 들었다. 그 안엔 웬 놈팡이와 함께 마주 보고 웃고 있는 우선경의 모습이 있었다.

구도경은 사진을 한 번, 그리고 제 좆을 쥐고 있는 남자를 한 번, 비교하듯 번갈아 훑었다.

처음 봤을 때만 해도 똑같은 것 같더니 이렇게 보니 하나도 안 닮았네, 씨발.

구도경은 분풀이하듯 남자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남자를 발밑으로 던져버리고 늘어진 성기를 꾸역꾸역 정리했다.

다음 날, 한지석 집무실엔 신원 미상이 보낸 서류 봉투가 도착했다. 안에는 언제나처럼 몰래 찍은 사진이 담겨 있었다.

지석이 무덤덤하게 내용물을 확인할 동안 맞은편에 앉아 있던 법무팀 최정훈 변호사는 계약서를 검토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한참 동안 조항을 따져보던 최정훈은 흘낏 눈만 들어 올려 앞에 앉은 남자의 반응을 살폈다.

“그거… 또 왔네?”

“어.”

“이번엔 뭐 좀 그럴듯한 거 있냐?”

“아니, 매번 똑같아.”

사진을 다시 봉투 안에 갈무리한 지석은 서류 봉투를 옆에 잘 챙겨 두었다. 이건 직접 처리할 예정이다.

매달 이렇게 사진을 보내오는 주체가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목적은 투명했다.

아무래도 우선경이 외도하고 있다는 걸 주장하고 싶은 모양인데, 하나같이 작위적인 사진이라 믿음이 안 갔다. 누군가 합의금을 노리고 의도적으로 저지르는 짓거리가 분명했다. 물론 동조해 줄 생각은 없었다.

“선경 씨가 워낙 잘나가니 별놈이 다 붙는구만.”

“그런가.”

“갤러리 완전 핫하잖아, 얼마 전에는 뉴스에도 나오던데? 화면발 잘 받더라.”

최정훈의 말대로 요즘 라움 갤러리는 완벽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우선경이 뼈와 살을 갈아 넣은 덕분이다.

그는 4년 동안 갤러리에만 오롯이 열정을 쏟았다. 덕분에 지금은 대한민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갤러리스트가 되었다. 최근에는 새로운 갤러리 오픈까지 준비하느라 더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둘 사이는 어때?”

“그것도 비슷하고.”

일에 미쳐 사느라 관계는 답보 상태를 이어 갔다. 서로가 필요할 때만 찾고, 가끔씩 관계만 맺는 건조한 생활이 계속됐다. 씁쓸한 웃음을 짓는 한지석을 올려다보며 최정훈은 일침을 날렸다.

“결혼하면 원래 다 그래, 천년만년 꿀 떨어지는 신혼이 뭐 평생 갈 것 같냐?”

“최정훈 변호사 말이 상당히 거치네요. 상사한테 이렇게 막말해도 됩니까?”

“아이고, 예에. 전무님. 제가 그만 실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조심하세요.”

장난스러운 타박에 최정훈 역시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한지석 말이 맞다. 아무리 로스쿨 동기라고는 하나 이곳이 회사인 만큼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한다. 최정훈은 가벼운 말투 속에 나름 진심을 눌러 담아 전했다.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지적해 주세요. 저는 한지석 님 라인 타고 싶으니까요.”

“대기업 법무팀이 꽤 적성에 맞나 보네?”

“어, 완전! 어차피 월급쟁이로 살 거라면 로펌보단 대기업이 낫지. 노비도 이왕이면 대감집 노비가 좋다고 하잖냐. 물론 너야 그 대감댁 식구가 됐으니 내 심정을 이해하긴 어렵겠지만.”

“글쎄, 내가 식구일지 노비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지.”

자조 섞인 말에 최정훈이 다시 고개를 치켜들었다. 뭔 소리래? 그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

아주 오랜만에 제주도를 찾았다.

“왔니, 오는데 많이 힘들진 않았고?”

“잘 지내셨어요.”

노부부는 대문까지 나와 모처럼 만나는 아들을 반갑게 맞았다. 종을 알 수 없는 새끼 강아지도 덩달아 신이 나 마당을 뛰어다녔다. 소담하게 지어진 단독주택은 오랜만에 활기를 띠고 있었다.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

“고맙다. 생일이 뭐 별건가 싶었는데 덕분에 네 녀석 얼굴도 보게 되고 좋긴 좋구나.”

아버지는 두 팔을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한지석은 환대를 낯설어하면서도 순순히 팔을 들어 호응했다. 원래는 이렇게 솔직하게 표현하시는 분이 아니셨는데, 그간 성격이 많이 달라지신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져 포옹한 팔에 더욱 세게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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