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87화 (87/127)

#87

하나뿐인 아들이 재벌가와 결혼을 하게 되면서, 대법원장이었던 아버지는 온갖 악성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특정 기업과의 유착 관계를 따지는 것을 물론이고, 있지도 않은 정치 성향을 언급하며 깎아내리기 바빴다.

청탁은커녕 나라에서 제공하는 공관도 거절할 만큼 일생을 청렴결백하게 살아오신 분에겐 아마도 견디기 힘든 모욕의 시간이었을 거다.

결국 아버지는 임기 6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대법원장직을 사임하셨다. 약간의 우울증 증세를 보이신 것도 그때부터다. 아버지의 심신 회복을 위해 두 분은 서울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그렇게 거처를 옮긴 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건만, 죄송스럽게도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또 바쁘다는 이유로. 핑계는 가지각색이었다. 어쩌면 얼굴을 뵐 때마다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서일지도 모른다.

“이게 다 뭐예요?”

집 안으로 들어오니 아담한 거실엔 온갖 쇼핑백들과 포장도 풀지 못한 상자들이 그득히 쌓여 있었다.

도무지 집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 선물의 향연에 한지석은 아연실색하며 물었다. 뒤따라 온 어머니가 사정을 설명했다.

“전부 선경이가 보낸 거야. 아버지 생신이라고 아침에 전화 왔었어. 지금 영국에 있다며? 못 찾아 봬서 죄송하다고 하더라.”

“…….”

“그래도 다음엔 한번 시간 맞춰서 같이 와. 얼굴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잖니. 엄마도 아버지도 선경이 너무 보고 싶어.”

한지석은 입을 굳게 다물며 말을 아꼈다. 그의 시선이 백화점 로고가 박혀 있는 쇼핑백에 꾸역꾸역 박혀 들어갔다.

아버지 생신인 것도 모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해외 출장까지 간 마당에 언제 이런 걸 다 챙긴 걸까. 새삼 우선경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다.

“조만간 같이 올게요.”

지석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여태껏 뻔하게 반복돼왔던 대답임에도 불구하고 기쁘셨는지 어머니가 소녀처럼 웃었다.

***

영국, 런던. M 호텔.

일정은 자정이 다 돼서야 끝났다.

호텔로 돌아온 우선경은 객실 문을 열자마자 헛웃음을 터트렸다. 눈이 아릴 정도로 화려한 호텔 방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어쩐지 숙소를 대신 섭외해 준 클라이언트가 그렇게 자신만만해하더니, 프레지던트 룸을 예약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깜짝 선물치곤 달갑지 않았다. 고작 잠만 자기엔 쓸데없이 호화롭지 않은가. 휴식은커녕 오히려 압도되는 느낌이라 부담스럽기만 했다.

분에 넘치게 우아한 객실을 찬찬히 둘러보던 선경은 결국 구경을 포기하고 응접실로 되돌아갔다.

커튼을 모두 걷고, 창문도 활짝 열었다. 런던 특유의 습하고 찬 밤공기가 객실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한국에 있는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소리를 최대한으로 키워 놓고, 스피커폰 모드로 전환한 뒤 핸드폰을 창가 옆 콘솔 위에 올려 두었다. 통화가 연결되길 기다리며 구두와 양말을 벗었다. 하루 종일 서 있다시피 해서인지 혹사당한 발이 저릿저릿했다.

-안녕하세요, 대표님! 일정은 다 끝나셨나요?

몇 번의 신호음이 이어졌을까, 밝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양팔의 셔츠 소매를 대충 접어 올리던 선경은 핸드폰을 힐끗 내려다봤다. 피곤에 잠겨 거칠어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네, 한국엔 별일 없죠?”

-한남동 신축 공사 현장 쪽에 이슈가 있긴 했는데요, 다행히 건축소장님이 해결하실 수 있는 선이라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해당 내용은 메일로 보고드렸고요. 아, 그보다 내일 스케줄에 변동된 부분이 있어서요. 점심에 예약된 레스토랑 쪽에서 급하게 연락이 왔는데….

띠리링-

마침 가벼운 초인종이 울렸다. 체크인하면서 부탁해 뒀던 룸서비스가 도착한 모양이었다.

핸드폰을 집어 든 우선경은 객실 문을 열어 주려 발걸음을 뗐다. 스피커폰에선 여전히 조잘거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새로운 곳으로 다시 예약했습니다. 시간대는 같고요, 주소는 문자로 넣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선경은 무심히 대꾸하며 미니바로 걸어갔다. 통화를 이어 가며 와인 잔과 오프너를 챙겼다.

바 테이블 위엔 방금 전 룸서비스로 전달받은 스파클링 로제 와인이 올려져 있었다. 오늘 하루 마무리를 위해 특별히 골라 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와인을 오픈하고 성의 없이 병을 기울였다. 섬세한 분홍빛의 와인이 잔에 가득 채워진다.

바에 등허리를 기댄 우선경은 뻐근한 목을 재차 돌리며 잔을 들었다.

라즈베리와 복숭아, 딸기의 달콤한 향이 건조하게 마른 입속을 촉촉하게 적셨다. 핸드폰에선 여전히 낭랑한 목소리가 보고를 이어 갔다.

-그리고 부탁하신 선물들은 누락 없이 모두 전달되었습니다. 한 이사님도 제주도에 잘 도착하신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

우선경은 대답 대신 와인을 한 모금 더 마셨다. 남편의 근황을 비서를 통해 전해 듣는다니 퍽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아마 그건 한지석도 마찬가지 일 거다.

비서 윤진이는 이후로도 오늘 하루치의 일과를 말했다. 잡지사에서 인터뷰를 요청해온 사항이라든가, 이번에 새롭게 계약하게 된 신진 작가와의 미팅에 관한 건, 또 우선경이 참석해야 할 행사에 대해서도 줄줄이 읊었다.

-대표님 듣고 계세요?

“듣고 있으니까 계속 얘기해요.”

-아까 말씀드린 주한 독일 대사관 행사요. 여긴 꼭 파트너 동반으로 오셔야 한다는 거 잊으시면 안 돼요! 혹시라도 한 이사님 일정이 안 되신다면 미리 말씀해 주시고요, 따로 동행을 구해야 하니까요.

“아, 그거… 날짜가 언제라고 했죠?”

-이번 주 금요일 저녁 7시요.

얼굴을 문지르던 손이 멈칫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무리인데, 일정을 되짚어 보던 우선경은 주름이 잡힌 미간을 꾹꾹 누르며 대답했다.

“진이 씨, 나 금요일에 귀국하지 않나?”

-죄송합니다. 런던 일정이 예상보다 하루 더 늘어나 버리는 바람에 그렇게 됐습니다…. 대신 오시는 대로 바로 준비하실 수 있게 의상과 헤어팀 세팅해 두겠습니다.

“쉬지 말라는 소리군요.”

-죄송해요. 대표님. 대신 푹 쉬실 수 있게 주말 스케줄은 모두 비워 두었습니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윤진이의 목소리가 바닥으로 기어들어 간다. 대표의 일정을 조절하는 건 전적으로 제 소관인 데다, 본인이 생각해도 살인적인 스케줄이라 면목이 없었다.

우선경은 조용히 뒷목을 주물렀다. 목소리만 들어도 핸드폰을 들고 허리를 굽신대고 있을 윤진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됐어요, 윤 비서가 죄송할 게 뭐 있다고. 일단 알겠고, 혹시라도 변동 사항 생기면 알려 줄게요. 오늘은 이만 끊죠.”

-넵! 고생하셨습니다. 푹 쉬세요!

통화가 끊어지자 넓디넓은 응접실은 다시 고요해졌다.

선경은 빈 잔과 와인 병을 챙겼다. 오랜 통화로 따끈따끈해진 핸드폰도 집어 들고 자리를 옮겼다.

바람이 새어 들어오는 창문가로 다가갔다. 연결된 작은 발코니엔 푹신해 보이는 이인용 소파와 작은 티 테이블,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무드등 같은 게 있었다. 날씨가 조금 쌀쌀하긴 했지만 술 한잔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우선경은 소파에 쓰러지다시피 기대 누웠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에 쌓인 메일과 문자를 확인했다. 모두 급하지 않은 것들이라 대충 보고 넘겼다. 그렇게 한참 스크롤을 내리다가 한지석의 이름이 적힌 문자를 발견하고 손을 멈췄다.

“…….”

제주도엔 잘 도착했냐, 별일 없느냐, 부모님은 안녕하시냐. 한마디만 쓰면 되는데 그게 뭐라고 선뜻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다.

먼저 안부를 묻는 게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살가운 문자가 오랜만이라 어색하기도 했다.

차라리 비즈니스적인 관계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문자 창을 불러온 뒤에도 선경은 한참 동안 머뭇거렸다.

[이번 주 금요일 7시. 부부동반 행사 있어. 시간 비워 놔.]

결국엔 늘 그렇듯이 통보 같은 문자를 보냈다. 제가 봐도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라 정이 뚝 떨어졌다.

선경은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핸드폰을 근처에 아무렇게나 버려 놨다. 쿠션 사이로 파묻힌 핸드폰은 진동이 울려도 감지가 안 됐다.

또 한 잔 가득 따른 와인을 홀짝이며 머리를 푹신한 등받이에 기댔다. 공교롭게도 호텔은 예전에 살았던 동네와 가까웠다. 내다보는 시선 끝에 걸리는 거리의 풍경과 상점들이 하나같이 익숙했다.

그때는 정말 매일이 행복했었는데.

별것 아닌 것에도 웃음이 났고, 둘이 온종일 붙어 다녀도 질리지 않았다.

서로의 학교 앞에서 몇 시간을 기꺼이 기다리고, 도시의 성벽을 따라 같이 걷는 것이 일상이었다. 사랑을 표현하는 데 한 번도 망설인 적이 없었다.

“…….”

런던에서 살았던 때가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다.

원하는 대로 착실하게 꿈을 이루고 있는데도 성취감보다 헛헛함이 더 컸다. 상실감을 메꾸려고 더욱 일에 매달리는 걸지도 모른다.

가끔은 과연 내가 이걸 원했던 걸까,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 건지,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구분조차 안 갔다.

선경은 다리를 길게 뻗었다. 좀 더 독한 걸 마실걸. 살짝 후회가 들었다. 다디단 와인은 취하지도 않는다.

런던의 밤거리를 내려다보며 상념에 젖었다. 지독하게 피곤했지만, 왠지 잠이 쉽게 올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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