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주한 독일 대사의 유난스러운 파티 취향은 알아줘야 했다.
어찌나 요란하게 준비했는지 대사관 출입구부터 붉은 레드카펫이 깔려 있고, 라인 밖으론 카메라를 든 사진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환하게 불을 밝힌 조명은 마치 밤에 뜬 태양처럼 눈부셨다. 손님들의 옷차림마저도 화려한 게 어쩐지 시상식을 방불케 했다.
바로 앞차에선 때마침 유명 여배우가 내리고 있었다. 가녀린 어깨선을 드러내며 시스루로 된 드레스 자락을 세심하게 들어 올리자 셔터 세례가 쏟아진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드레스에 달린 비즈와 장식물들이 화려한 빛을 뿌리며 반짝거렸다.
여배우는 자신을 에스코트하는 또 다른 여성과 손을 맞잡고 함께 레드카펫을 밟았다. 그들은 연예계의 소문난 알파, 오메가 커플이었다.
우습게도 순서가 이런 식이네. 차창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지석은 조용히 혀를 내찼다.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알파 오메가 동성 커플이 경쟁하듯 연이어 등장하는 모습은 사람들의 흥미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비교하며 품평해 대는 광경이 벌써부터 눈앞에 펼쳐졌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슬쩍 시선을 돌렸다. 바깥이 온통 소란스러운 반면에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우선경은 밖의 상황 따위엔 전혀 관심 없는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불과 두 시간 전 귀국했다. 오랜 비행을 마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일정을 소화하는 중이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엔 피곤이 짙게 배어 있었다.
“밖에 기자들 많아.”
“…….”
선경은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제서야 바깥을 내다보곤 탁한 한숨을 터트렸다. 그 역시 이런 어수선함은 질색이었다.
“조금 더 있다가 사람 빠지면 나갈까?”
“그냥 가, 이미 오래 기다렸잖아.”
대화를 귀동냥하던 수행기사는 순서가 다가오자 얼른 내려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차단돼 있던 바깥 소음이 물밀듯이 몰아닥쳤다.
차 문밖으로 먼저 다리를 쭉 뻗은 지석이 선경의 오른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차에서 내리는 이들에게 하얀 플래시 세례가 쏟아졌다. 기자들은 막 찍어도 화보처럼 나오는 부부의 모습을 한 프레임에 담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사관에서 주최하는 리셉션 파티는 확실히 자유로움이 있다.
정해진 형식과 식순에 얽매이는 한국식 행사와 달리 먹고, 마시고, 즐기는 분위기가 주를 이뤘다.
손님들은 저마다 손에 술잔 하나씩을 들고 다녔고, 자유롭게 무리를 옮겨 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만나는 사이일지라도 쉽게 어우러지곤 했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 사이로 쟁반을 든 홀 서빙 직원들이 부지런히 오갔다.
유니폼을 똑같이 맞춰 입은 탓인지 성별을 불문하고 대부분 비슷해 보였다.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직원을 신경 쓰는 손님 또한 거의 없었다.
“김현진?”
하지만 한지석은 달랐다. 그는 제 앞을 지나치는 서빙 직원을 불러 세웠다.
남자는 어깨를 움찔 떨며 뒤를 돌았다. 한지석과 눈이 마주치자 하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현장에서 딱 걸린 학생 같았다.
한지석 역시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어… 형. 그게, 그게요.”
흡사 죄지은 사람처럼 말을 버벅거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둘 힐끔댔다.
김현진을 위아래로 훑어본 지석은 대충 감을 잡은 것 같았다.
“너….”
뭐라 한 소리 꺼내려던 찰나, 마침 그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지석은 고개를 반쯤 돌려 우선경이 있는 곳을 찾았다.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
바빠 보이는 그가 현진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자리를 떠났다.
어우 씨, 깜짝이야. 현진은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은 심장을 단속하며 재빨리 돌아섰다. 곧바로 백 룸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몇 달 전 김현진은 고등학교를 그만뒀다.
어차피 공부에는 소질이 없었고, 학교를 다니는 의미도 찾을 수 없었기에 자퇴를 저질러버렸다. 그는 빨리 사회에 나가 한 푼이라도 더 벌고 싶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한지석은 불같이 화를 내며 현진을 나무랐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고졸과 중졸의 차이가 얼마나 큰 줄 아냐며, 하도 쓴소리를 퍼붓는 탓에 결국 검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했다. 틈날 때마다 지석을 만나 과외 수업 겸 꾸지람을 들었다.
먹고살 길이 막막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지만, 학교도 안 다니는 열아홉 살이 괜찮은 일거리를 구하기란 녹록치 않았다.
시급도 많고, 일도 험하지 않은 리셉션 홀 서빙 알바를 구하게 된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물론 여기서 한지석을 만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현진은 가슴을 진정시킨 뒤 다시 파티장으로 걸어 나왔다. 이제 막 정찬이 시작된 터라 더 이상 농땡이를 부릴 순 없었다.
만찬장엔 끝이 안 보이는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빳빳한 테이블보 위엔 금테를 두른 디너 접시와 와인 잔, 은색의 식기들이 정결하게 놓여 있었고, 길이가 각기 다른 두꺼운 양초와 낙엽, 솔방울로 꾸며진 센터피스들이 빈자리를 메꿨다. 흡사 외국 영화에서나 볼 법한 광경이었다.
정가운데에 앉은 주한 독일 대사를 중심으로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앉았다. 말쑥한 정장을 입은 직원들이 차례대로 코스 요리를 내왔다.
주 요리를 서빙하는 건 경력 많은 직원이 도맡았다. 오늘 하루 단기로 고용된 알바생들은 주변을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자잘한 요구사항을 해결했다.
어린 알바생의 접객은 조금 어설펐지만 어차피 자유로운 분위기라 누구 하나 신경 쓰거나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 서툰 모습도 앳되고 귀엽다며 격려를 보내기도 했다.
김현진도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며 서빙을 도왔다. 은색의 드립 포트를 들고 다니며 빈 잔에 물을 채우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힐끔힐끔 돌아가는 눈동자가 남다른 상류층의 세계를 몰래 엿봤다.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은 저마다 이국적인 언어로 소통했다. 한국어를 제외하곤 무슨 말인지 조금도 해석할 수 없었다.
잘 나가는 연예인과 돈 많은 사업가, 콧대 높은 예술가들까지.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로라하는 유명 인사들이었지만, 김현진이 봤을 때는 그중에서도 한지석이 단연 돋보였다.
“유영아 얼굴 진짜 조그맣다. 개이뻐.”
“그 앞에 앉은 남자 봤어? 너무 멋있지.”
“뭐 하는 사람이야? 처음 보는데… 연예인인가? 아니면 사업가?”
가끔씩 물을 보충하러 백 룸으로 들어갈 때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주워듣곤 했다.
한지석에 관한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현진은 괜히 제가 칭찬을 듣는 것 같아 뿌듯해했다.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입가엔 웃음이 슬금슬금 번졌다.
틈틈이 한지석을 훔쳐봤지만 애석하게도 시선이 마주치진 않았다. 현진은 멀리서나마 지켜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자연스럽게 관심은 옆 사람에게 닿았다. 한지석의 옆을 차지한 우성 오메가는 여전히 눈길을 끄는 사람이었다. 곧은 자세와 우아한 테이블 매너는 그가 이런 생활에 얼마나 익숙한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우선경은 수다스럽지 않았고, 일부러 관심을 받으려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그에게 말을 걸고 싶어 안달을 냈다. 꼭 스스로 빛나는 보석 같았다. 한지석과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마저도 그림처럼 어울렸다.
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넋을 놓고 쳐다보던 김현진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어차피 나랑은 종족이 다른 사람이다. 우선경은 출신부터 형질까지 뭐 하나 비교를 논할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부러워해 봤자 열등감만 생기지 뭐. 꾸역꾸역 올라오는 시샘을 침과 함께 꿀떡 삼키며 없앴다.
김현진은 다시 관심을 테이블 위 빈 접시와 빈 물잔에 돌렸다. 저는 딱 이 수준이 맞았다.
그날 알바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기분이 제법 좋았다.
일당도 두둑이 받았고, 다음에 또 건수가 생기면 불러 주겠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게다가 뒤늦게 확인한 핸드폰엔 문자가 하나 와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집에 가서 공부나 해.]
메시지를 확인한 현진은 키킥 웃으며, 제자리에서 껑충껑충 뜀을 뛰었다. 한지석이 보낸 문자 하나에 피로가 싹 날아가는 듯했다.
낡은 운동화가 땅을 박차고 달려갔다. 이상하게 신이 났다. 오늘만큼은 높은 언덕도 투덜거리지 않고 거침없이 뛰어오를 수 있었다.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어느새 집 앞까지 도착한 현진은 잠시 숨을 고르고, 철문을 밀었다. 녹슨 경첩이 소리 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야 했다.
마당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잡한 흙바닥에 서서, 목을 쭉 빼고 집 안 분위기를 살폈다. 현관문 앞에 나뒹구는 까만색 워커를 보아하니 외삼촌이 와 있는 것 같았다.
수돗가 근처 비어 있는 장독대 밑에 일당이 들어 있는 하얀 봉투를 숨겼다. 예전엔 뭣도 모르고 그냥 들어갔다가 몇 번이고 외삼촌에게 주머니를 털렸었다. 학습을 거친 덕분에 나름 꼼수가 생겼다.
바닥에 봉투가 깔리니 장독대가 슬쩍 기운다. 그걸 가려 보겠다고 주변에 벽돌을 놔뒀다. 남이 봤을 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뭔가 더 수상해 보이겠지만 지금 김현진에겐 가장 든든한 안심 장치였다.
은밀한 작업을 끝내 놓은 뒤 현진은 살금살금 집 쪽으로 다가갔다. 신발을 벗고, 아귀가 잘 맞지 않는 미닫이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