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쓰러진 술병이 발끝에 채였다. 현진은 익숙하게 바닥을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을 정리했다.
방 한 칸과 비좁은 화장실. 작은 부엌이 전부인 단칸방은 문을 열자마자 집 안 전체가 한눈에 보일 만큼 작았다. 그곳엔 예상대로 외삼촌이 있었다.
그는 조카를 보자마자 “어어, 우리 현진이! 삼촌이 오늘 돈 좀 땄다! 빨리 와서 먹어라!” 하고, 손짓했다. 웬일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매일 잃기만 하던 사람이 모처럼 돈을 땄나 보다. 허름한 밥상 위엔 시장에서 사 온 치킨과 족발이 한가득 올라와 있었고 바닥엔 초록색 소주병이 즐비했다.
현진을 낼름 상 앞에 앉아 닭 날개를 집어 들었다. 튀김옷은 다 식어 있었지만, 배가 고팠던지라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눅눅해진 치킨을 뜯으며 틈틈이 삼촌의 술 시중을 들었다. 거창한 건 아니고, 그냥 잔이 비지 않게 술을 채워 주고 그의 넋두리를 들어 주기만 하면 됐다.
오늘처럼 기분이 좋을 땐. 외삼촌은 물건도 집어 던지지 않고, 욕도 하지 않는다. 아주 드물지만 용돈을 찔러 주기도 했다.
“김현진 너어는, 새끼야. 왜 여태 베타인 거야? 분명히 니 애미 닮았으면 오메가가 되고도 남았을 텐데.”
“아직도 그 소리야? 난 글렀어. 포기해.”
“왜! 넌 인마, 긁지 않는 복권이라고! 두고 봐라. 넌 분명히 오메가 된다. 내가 장담해!”
외삼촌은 보육원에서 나온 날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같은 소릴 해댔다. 내년이면 벌써 스무 살이다. 이미 성장판이 닫힌 지도 오래인데 아직도 오메가 타령을 하는 게 솔직히 이해가 안 갔다.
대체 제가 오메가가 되면 뭘 어쩌려고…. 김현진은 궁금했지만 두려운 마음이 커서 차마 물어보진 못했다. 가끔은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었다.
“네 어미가 얼마나 난 년이었는 줄 아냐? 돈 많은 늙은이한테 스폰 받는 걸로도 모자라서 임신한 거 숨기고 아득바득 열 달을 버텼던 년이야. 결국엔 위로금인지 합의금인지 받아다가 날름 해외로 토꼈지. 저 혼자 잘 살겠다고 지가 낳은 새끼도, 가족도 다 내다 버렸다고. 썅년, 몸뚱이 하나 잘 굴려서 인생 폈지. 지금쯤 아마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을 거다!”
카악- 퉷! 외삼촌은 재떨이에 누런 가래침을 뱉었다. 비위가 상했지만, 현진은 묵묵히 고개만 처박고 치킨을 뜯었다. 오늘은 엄마 이야기인가 보네. 외삼촌의 술주정 레퍼토리에서도 가장 듣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 이야기를 듣는 건 처음엔 그저 신기하고 좋았다. 저도 부모가 있구나 싶었다. 하지만 외삼촌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험담과 비난이 대부분이었다.
예쁜 얼굴에 똑똑한 머리를 가졌지만, 욕심이 가득했다. 오직 자신의 살길을 찾기 위해 불륜도 마다하지 않았고, 핏덩이도 내다 버리는 비정한 여인이었다. 엄마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었던 현진에겐 상처만 될 뿐이었다.
외국에서 잘살고 있을까. 결혼은 했을까. 살아는 있는 걸까. 나를 기억하기는 할까.
“…….”
김현진은 다 식은 치킨을 앞니로 뜯었다. 얼굴도 모르는 엄마를 떠올리는 것도 일단 배를 채운 뒤 하고 싶었다.
***
이른 아침부터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 모처럼 스케줄이 없는 주말이었지만 우선경은 일부러 나와 현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동안 일정이 바빠 보고만 받아왔던 터라, 오늘은 꼭 시간을 내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새로 짓기 시작한 갤러리 건물은 어느새 그럴듯한 외관이 갖추어져 있었다. 지금은 내부 공사가 진행 중이다.
의뢰인의 취향이 워낙 까다롭고 유별난 탓에 건축 사무소에선 구조는 물론이고 작게는 콘센트 위치 하나까지 치밀하게 계획하고 디자인해야 했다.
뭐 힘들기야 했지만, 그만큼의 보상이 뒤따랐으니 억울할 건 없었다. 오히려 넉넉한 예산으로 평소 꿈만 꿔왔던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수 있었으니 건축가로선 재미있는 작업이 되었다.
공사 중인 내부를 한차례 둘러보고 나오는 길이었다. 우선경은 머리에 쓴 안전모를 벗었다. 건물을 돌아보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가락으로 대충 빗어 넘겼다.
마주 서 있던 건축 사무소 소장이 잽싸게 그의 손에 들린 모자를 받아 갔다. 우선경의 반응을 살피며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며칠 내로 완공될 것 같습니다. 이후부터는 인테리어에 치중할 계획입니다.”
“좋네요. 정해진 도면대로만 가 주세요. 그러면 완벽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시고요! 대표님은 댁으로 들어가십니까? 주말인데 좀 쉬셔야죠.”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현장 직원들이나 잘 챙기세요. 말씀대로 주말이니 오늘 일 끝나면 가볍게 회식이라도 하시든가요.”
퉁명스레 말하며 선경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건넸다. 무심히 넘겨주는 신용카드는 그의 명의로 된 개인 카드였다.
“아이고, 저를 뭘 믿고 이런 걸 덥석 주십니까. 제가 엄한 데 쓰면 어쩌시려고.”
건축소장은 카드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면서도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발급도 까다롭다던 까만 티타늄 카드는 어쩐지 무게부터 남달랐다.
“아직 정산 안 된 대금이 훨씬 더 많은데요. 쓰고 싶으시면 쓰세요. 공사비에서 차감하면 되죠.”
“농담입니다, 농담. 헤헤헤,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모처럼 목구멍에 기름칠 좀 하겠네요! 그나저나 직접 운전하고 오셨습니까? 모셔다드릴까요?”
“알아서 갈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일 보세요.”
“네!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건축소장은 수더분하게 웃으며 꾸벅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일을 마무리하려 서둘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경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끼워 넣은 채로 한 번 더 건물을 올려다봤다. 근사한 외관이 마음에 쏙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
“혹시 우선경 씨 되세요?”
오토바이 헬멧을 쓴 남자는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우선경은 경계심 가득한 얼굴로 되물었다.
“누구세요?”
“심부름센터인데요. 우선경 씨 본인 맞으신 거죠?”
남자는 어둡게 선팅된 헬멧 실드를 올렸다. 드러난 두 눈이 핸드폰과 선경의 얼굴을 번갈아 훑어보며 인상착의를 확인했다.
연유를 알 수 없어 황당해하는 우선경에게 대뜸 손에 쥐고 있던 서류 봉투를 건넸다. 억지로 전달받은 봉투는 두께가 얇았고, 무척 가벼웠다.
“이게 뭐죠?”
“내용물은 뭔지 모릅니다. 저는 그냥 배달 대행이라서요.”
수고하세요, 볼일이 끝난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번에 자리를 떠났다.
부와앙, 시끄럽게 울리는 오토바이 배기음에 선경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서류 봉투를 열어 봤다.
“…….”
안에는 몇 장의 사진과 프린트된 종이가 한 장 들어 있었다. 사진 속에 담긴 인물은 선경이 익히 잘 아는 사람이었다.
서점, 카페, 길거리, 음식점. 일상적인 곳에서 몰래 촬영된 듯 보이는 한지석은 무척 편안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 옆에 같이 찍힌 사람은 모두 동일인물이다. 한눈에 봐도 어려 보이는 남자애는 어딘가 눈에 익은 듯 보이면서도 낯설었다.
사진을 넘겨보던 우선경은 마지막에 끼워져 있던 종이를 발견했다.
김현진. 19세. 베타.
고등학교 중퇴. 현재 검정고시 준비 중.
서울 다산동에서 외삼촌과 거주 중. 부모 없음.
무척이나 간단한 신상명세서였다. 아마도 사진 속 남자애에 관한 것 같았다.
한두 번 만나온 게 아닌 듯, 찍힌 사진마다 장소와 착장이 달랐다.
대체 누구지? 무슨 사이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생소한 인물이라 의아함이 커지고 있을 때였다. 재킷 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모르는 연락처가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선경은 상당히 찜찜한 기분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사진 속엔 카페에 앉아 있는 한지석과 김현진이 담겨 있었다. 구석에 언뜻 보이는 시계엔 불과 오 분 전 시간이 찍혀 있다. 아마도 실시간인 듯 보였다.
[종로구 대학로 71길 9. xx 커피]
주소만 덜렁 보낸 메시지에는 당장 와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하라는 의도가 분명하게 담겨 있었다.
누가 이런 장난을 치는 걸까.
우선경은 봉투와 사진을 한꺼번에 구기며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저급한 낚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엮이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저 자신이 제일 한심스러웠다.
***
카페는 주말답게 사람으로 바글거렸다.
막 가게 안으로 들어온 선경은 손님들로 꽉 채워진 내부를 조용히 살폈다. 한지석을 찾는 건 어렵지도 않았다.
그들은 작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사이좋게 마주 앉아 있었다.
김현진은 문제집을 쌓아 놓고 공부를 하고 있었고, 한지석은 여유롭게 다리를 꼰 채 책을 읽는 중이다. 그 상태로 감시를 하는 건지 가끔씩 김현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앞머리를 틀어쥔 채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현진을 볼 때마다 가볍게 미소를 짓곤 했다.
솔직히 말하면 불륜 현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우선경의 눈엔 그 광경이 못내 거슬렸다.
아마도 모두 한지석 때문일 거다.
꾸밈없이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게,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예전의 그를 보는 것 같아 섭섭했다.
망부석처럼 굳어 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천천히 테이블로 걸어갔다.
거리를 좁히며 다가가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가 먼저 우선경의 존재를 기민하게 알아챘다.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더니 의자를 뒤로 밀며 황급히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