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여긴 어떻게 왔어?”
“지나가던 길에 당신이 보여서. 누구야?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우선경이 대학로 거리를 지나칠 만한 일은 죽었다 깨나도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한지석은 추궁하지 않았다.
어차피 잘못한 게 없었으니까.
한지석은 앞에 앉아 있던 김현진을 소개했다.
“인사해, 김현진이라고. 천사원에서부터 후원하던 동생이야.”
“아, 천사원.”
그제야 희미하게 기억이 났다. 얼핏 그런 이름을 들었던 것도 같고. 하도 오래전 일이라 가물가물했지만 적어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선경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김현진과 그가 붙들고 있는 문제집을 차례대로 훑어보았다.
“저희 남편이 공부 가르쳐 주고 있었나 봐요?”
갑작스러운 우선경의 등장에 놀랐는지 김현진은 상대를 제대로 쳐다보질 못했다. 꼭 몰래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파르르 떨며 문제집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사람이랑 얘기할 때는 눈을 봐야죠.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렇지, 기본 예의도 모릅니까.”
“그… 죄, 죄송합니다.”
김현진의 목과 얼굴, 두 귀가 터질 듯이 빨개졌다. 살짝만 찔러도 피가 뿜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무안한 듯 목덜미를 문지르는 아이를 내려다보며, 한지석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선경아, 그러지 마.”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나한테 풀어, 죄 없는 애한테 그러지 말고.”
우선경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무례하게 구는 성격이 아니다. 한지석은 그의 불편한 심기를 단번에 눈치챘다. 뭔가 굉장히 거슬리는 게 분명했다.
“현진아, 오늘은 이만하고 들어가. 공부는 다음에 봐 줄게. 집에는 혼자 갈 수 있지?”
“네, 괜찮, 괜찮아여.”
김현진은 혀까지 꼬여 가며 허둥지둥 문제집을 챙겼다. 까만 백 팩을 열어 무작정 책과 필기구를 쓸어 담았다.
“먼저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아까 들은 지적 때문이었을까, 아이는 이마가 무릎에 닿을 듯이 깊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떠났다.
비로소 둘만 남게 되자, 한지석은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진 채로 이유를 물었다.
“대체 왜 그래?”
“처신 잘해.”
“뭐?”
“남들 보는 앞에서 어린애랑 시시덕거리지 말라고. 세상에 보는 눈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형이 그따위로 구니까 나한테…!”
그런 사진이나 보내지. 화를 쏟아내던 우선경은 뒷말을 힘겹게 목구멍 뒤로 삼켰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지석은 눈살을 찡그렸다. 답답한 듯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이해가 안 돼.”
“…….”
“네 눈엔 이게 이상하게 보여? 그냥 애 공부 봐 주고 있는 것뿐이잖아. 그게 그렇게 꼴 보기 싫다고?”
“보기 싫어, 난 분명히 경고했어. 쟤랑 더 어울리지 마.”
“너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어.”
“착각은 형이 하는 거겠지, 저딴 애가 가당키나 해? 나 대신 어울리는 상대치곤 수준이 너무 낮은 거 아냐? 취향이 원래 이렇게 후졌어?”
“하….”
지석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더 말을 섞어 봤자 싸움만 커질 거라 생각했는지 이후부터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묵묵히 자리를 정리했다. 여전히 싸늘하게 노려보는 시선을 외면하고 먼저 카페를 빠져나갔다.
한지석은 경고를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이후로도 보란 듯이 김현진을 만났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자주 충돌했다.
주로 우선경이 화를 냈고, 한지석은 회피했다. 싸움이 잦아질수록 심신은 피폐해져 갔다. 가뜩이나 신경 쓸 일이 많은데 더는 김현진과 관련해 감정을 소비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우선경은 한지석이 말한 것처럼 둘의 사이를 그냥 단순한 후원 관계로 받아들이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노력을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이, 의미심장해 보이는 사진은 꼬박꼬박 날아왔다. 이쯤 되니 이 스토커 같은 제보자의 정체가 누굴까. 궁금해질 정도였다.
***
“돈세탁?”
“…….”
“요즘에도 이런 거 부탁하는 인간들이 있어요?”
탁탁, 손가락 사이에 끼워 둔 볼펜이 책상을 혼내듯이 때렸다.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선경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누구라고 했죠?”
“…동보건설 최용진 회장님이십니다.”
“3억짜리 그림을 10억에 사시겠다? 영감님이 돈이 많아서 주체를 못 하시나. 그럴 거면 기부나 하시지.”
“…….”
“자금 세탁 원하는 분들은 다른 갤러리 가 보시라고 하세요. 우리는 이런 거 안 하기로 했잖아요. 그게 대체 무슨 돈인 줄 알고 덥석덥석 받아먹습니까?”
“죄… 송합니다.”
책상 앞에 서 있던 김주원은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크나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입안이 바싹 마르고 있었다.
사실 미술계에서 비리는 흔한 일이다. 미술품만큼 뇌물로 주고받기 좋은 게 없었고, 작은 캔버스 하나에 수억이 오갔다.
송 대표가 운영을 맡던 시절엔 라움 갤러리에서도 이런 거래가 비일비재하게 이뤄졌다. 예술 작품은 사는 사람 마음대로 값을 정할 수 있으니 일부러 높은 금액에 사고 차액을 돌려받는 방식으로 횡령을 저지르기도 했다.
자금 세탁을 도와주는 대가로 갤러리스트는 꽤 높은 금액의 커미션을 챙길 수 있었다. 하지만 우선경은 이런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
“김 수석님.”
“…네.”
“요즘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여태 안 하던 것에 관심을 보이세요? 혹시 돈 필요하세요? 만약에 내가 도중에 알아채지 않았으면 최 회장 부탁 들어주셨겠네요?”
“…….”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가겠지만 다음부터는 예외 없어요. 그리고 동보건설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사람들은 갤러리 출입 금지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이만 가 보세요.”
김주원이 착잡한 얼굴을 숙였다. 소리 없이 대표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보는 우선경도 기분이 썩 개운치는 않았다.
갤러리스트라는 그럴듯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결국은 미술품을 사고파는 장사치였다.
이윤을 따지는 게 당연했고, 특별히 예술에 대한 숭고한 이념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다만 뒤 구린 일에 가담할 만큼 돈에 눈이 멀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성향을 김주원이 모를 리 없었다.
그녀는 우선경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직원이었고, 실제로 갤러리 운영에 우선경 다음으로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수장고 출납 권한을 가진 것도 우선경과 김주원 둘뿐이다.
어쩌면 너무 많은 권한을 쥐여 준 게 아닐까.
그녀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자꾸만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조만간 미술품 거래 내역과 회계 기록을 꼼꼼히 확인해 봐야겠다 생각했다. 선경은 눈썹을 찡그리며 머리를 의자에 기댔다.
가뜩이나 몸살 기운으로 컨디션이 바닥을 기고 있는데, 골머리 썩히는 일까지 더해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랍을 열어 진통제를 찾았다.
때마침 핸드폰이 드르륵 떨렸다.
약속을 리마인드 해 주는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오늘은 오랜만에 한지석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알람을 끈 선경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책상 위에 엎드렸다. 몸 상태는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모처럼 잡은 식사 약속을 미루고 싶진 않았다.
조금 쉬면 괜찮아지겠지, 선경은 양팔에 얼굴을 깊숙이 묻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6시가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기획 회의를 끝내고 온 한지석은 약속 시각 전까지 업무를 마무리하기 위해 서둘러 집무실로 돌아갔다. 월요일이라 할 일이 쌓여 있었지만, 당장 급하지 않은 보고와 결재는 대강 내일로 미뤄 둘 생각이다.
책상에 앉아 고 비서가 따로 분류해 둔 서류를 펼쳤다. 집중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내용을 검토했다. 3건의 결재를 처리하는 데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질러진 책상 위를 정리한 뒤,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밖으로 나왔다.
오랜만의 이른 퇴근에 비서들의 얼굴도 밝아 보였다. 진심이 담긴 배웅을 받으며 회사를 빠져나갔다.
직접 차를 몰고 갤러리가 있는 한남동으로 향하던 때였다.
Rrrrrr-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당연히 우선경인 줄 알고 핸드폰을 들어 올리던 지석은 뜻밖의 이름을 보고 잠시 머뭇거렸다. 고민하다 수신 버튼을 누르고 휴대전화를 귀에 가져다 붙였다.
“여보세요.”
-흐으, 으허엉. 허어엉.
말 대신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심상치 않은 느낌에 한지석은 핸드폰을 고쳐 잡았다. 눈은 계속 전면 창을 주시했지만, 귀에 온 신경이 집중됐다.
“현진아, 왜 그래.”
-흐윽, 형, 혀엉….
“진정하고 얘기해 봐. 무슨 일이야?”
김현진은 서러움을 참으며 겨우겨우 말을 이어 갔다. 그마저도 울음소리 때문에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외삼촌과 빚쟁이, 조폭들이란 불분명한 단어가 헐떡이는 숨에 뒤섞여 있었다. 해석하자면 조폭들이 찾아와 집을 뒤집었다는 이야기 같았다.
한지석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현진을 돌봐 줄 시간은 없어 보였다.
해결책을 고민하던 순간, 스피커 너머로 걸쭉한 욕설과 함께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악, 지르는 현진의 비명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젠장, 지석은 고민도 없이 운전대를 틀었다. 차선을 바꾸고 곧바로 유턴을 돌았다.
속도를 최대로 올리며 우선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답답할 정도로 연결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