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결국 우선경과 통화하지 못한 채 다산동에 도착했다.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은 곳이라 동네 초입에 차를 세워 두고 언덕길을 뛰어 올라갔다.
전화를 끊은 지 삼십 분도 안 돼서 도착했지만, 그새 집은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활짝 열린 대문 너머로 엉망이 된 집 안 꼴이 보였다.
까만 장독대는 박살이 나 있고, 수돗가에 있어야 할 고무대야는 엉뚱한 곳을 굴러다녔다.
한지석은 반쯤 기울어진 미닫이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얼마 없는 세간살이가 죄다 뒤집혀 있다. 누런 장판 위는 온통 까만 발자국투성이였다.
어질러진 방구석엔 이불이 산처럼 뭉쳐져 있었다. 지석은 조심스럽게 이불 더미를 들쳤다. 그 안에 김현진이 콩 벌레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얼마나 두들겨 맞은 것인지 애 얼굴이 온통 시퍼렇고 퉁퉁 부어 있었다.
“현진아!”
그의 어깨를 흔들며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끙끙 소리만 낼 뿐 반응이 없었다.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놀란 지석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기절한 현진을 어깨에 둘러멨다. 그대로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실에서 조금 오래 잡혀 있었다. 김현진은 전치 6주의 진단을 받았고, 하루 정도 입원이 필요했다.
보호자가 연락이 안 돼서 지석이 대신 모든 일을 처리해야 했고, 정신을 차릴 때까지 옆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했다.
상황을 겨우 마무리했을 때 시간은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당황하고 말았다. 미처 들여다보지 못했던 핸드폰에는 여러 통의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마저도 3시간 전이 마지막이었다.
한지석은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컴컴하게 불이 꺼진 거실에서 선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소파에 앉아 있던 우선경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데이트는 즐거웠어?”
온통 어두워 표정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비꼬는 말투만 들어도 단단히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연락 못 해서 미안해. 사고가 있었어. 현진이가 많이 다쳐서 병원에 데려다주고 오는 길이야.”
“걘 주변에 아는 사람이 형밖에 없어? 왜 그걸 형이 하는데.”
“아직 어린애잖아. 제대로 된 보호자도 없다고.”
“언제부터 다른 사람을 그렇게 신경 썼어? 보호자? 웃기지도 않아, 당신이 누굴 보호한다고.”
“…….”
“제 것도 못 챙기면서 퍽이나.”
비난을 쏟아붓던 선경은 소파를 짚고 일어났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실루엣이 살짝 흔들렸다. 지석이 급하게 붙잡았지만 그가 팔을 저어 도움을 뿌리쳤다.
“피곤해, 들어갈래.”
머리를 짚은 선경은 눅눅한 목소리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
낯익은 여행용 캐리어가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활짝 열린 드레스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마침 양손에 짐 가방을 든 윤진이가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한지석을 보자마자 놀란 얼굴을 푹 수그렸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허락 없이 들어와서 죄송합니다. 대표님이 곧 출장이시라서요. 짐을 미리 보내 놓으려 챙기고 있었습니다.”
“괜찮아요. 우 대표는… 또 해외로 나갑니까?”
“네, 프랑스요. 내일부터 7박 8일 일정입니다.”
윤진이는 늘 그렇듯 야무지게 대답했다. 달에 한두 번씩은 해외로 출국하다 보니, 짐을 대신 챙기는 폼이 제법 능숙했다.
우선경의 개인 비서인 그녀는 뛰어난 어학 실력을 갖추고 있어 해외 출장을 갈 경우 대부분 동행하곤 했다. 수족처럼 함께한 기간이 벌써 2년째라, 한지석도 잘 알고 있는 직원 중 하나였다.
문 앞을 가로막고 있는 캐리어들을 벽 쪽으로 부드럽게 밀쳤다. 슬리퍼를 꿰어 신고 들어오며 집 안을 둘러봤다.
고용인이 매일같이 청소하고 관리하는 집은 흐트러짐 없이 깨끗했고, 그 안에서 우선경의 냄새는 조금도 맡아지지 않았다.
요즘 집에는 들어오긴 하는 걸까. 주위를 살펴보던 지석은 표정을 애써 담담하게 정리했다.
“지금은 어디 있습니까?”
“아직도 갤러리에 계세요. 오늘까지 처리하셔야 되는 일이 있으셔서…. 저희 갤러리 이번에 FIAC(*세계 3대 아트페어)에 참여하거든요. 대표님 이거 준비하시느라 정말로 바쁘셨어요.”
윤진이는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야기를 한 번 더 강조했다. 제가 모시는 대표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 알아달라는 의도였다.
두 사람은 최근 일주일 새에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서로 입만 열었다 하면 자꾸 싸워대니 일부러 피한 것도 있었다.
지석은 서재에서 늦은 시간까지 일했고 그 방에서 쪽잠을 잤다. 이후 새벽같이 나가는 걸 반복하는 탓에 같은 집에 살면서도 마주치기가 쉽지 않았다.
윤 비서가 돌아간 뒤, 그날은 모처럼 늦게까지 우선경을 기다려 봤다. 내일부터 근 일주일간을 못 보게 되는 건데 이대로 인사도 없이 보낼 순 없었다.
하지만 노력이 무색하게 아침 녘이 밝아오도록 선경은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얼굴도 못 본 채 지석은 출근할 수밖에 없었다.
***
평소처럼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데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연락처였지만 한지석은 액정에 뜬 번호를 보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064로 시작하는 걸 보니 제주도에서 걸려온 것이었다.
“여보세요.”
-한동진 씨 아드님 되시나요?
굉장히 시끄럽고 어수선한 소리가 낯선 목소리와 함께 전해졌다. 한지석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핸드폰을 꽉 쥐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요동쳤다.
“네. 맞습니다. 누구시죠?”
-여기는 제주 서부경찰서입니다. 부모님께서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핸드폰에 연락처가 있어서 급히 전화 드렸습니다. 지금 당장 제주 안국대 병원으로 와 주셔야겠습니다.
“사고요? 얼마나 다치셨는데요?”
다그치는 듯한 물음에 상대방은 잠시 침묵을 지쳤다.
-죄송합니다. 두 분 모두 사망하셨습니다.
자동차 추돌 사고라고 했다.
좁은 2차선 도로를 달리던 덤프트럭이 앞차를 제치겠다고 중앙차선을 넘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사방이 가드레일로 막혀 있어 마주 오던 차는 피하지도 못하고 트럭과 정면충돌해 버렸다.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그렇게 순식간에 벌어졌다.
현장은 말할 수 없이 참혹했다. 부모님이 타고 계시던 차는 덤프트럭 밑에 종잇장처럼 깔려 버렸다. 구조대가 빠르게 도착했지만, 두 분은 이미 명을 달리하신 상태라 손 쓸 도리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한지석은 거의 공황 상태에 빠져 버렸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몰랐다.
겨우 김포공항으로 이동하고, 거기서 가장 빠른 비행편을 타고 제주도로 내려왔다. 곁에서 챙겨 주는 고 비서 덕분에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운신할 수 있었다.
곧장 병원으로 향한 지석은 사고 현장을 수습한 경찰부터 만났다. 짧게 깎인 머리에 체구가 듬직한 남자는 착잡한 얼굴로 사건의 경위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두 분은 모두 현장에서 즉사하셨습니다. 100% 상대측 운전자의 과실이었고, 현재 구속된 상태로 조사 중에 있습니다.”
음주 측정도 해봤지만 정상이었고, 졸음운전도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조금 더 빨리 가고 싶은 욕심을 부렸던 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운전자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화물 운송 노동자였다. 가진 게 없어 합의가 힘들다 했고,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 죗값을 치르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말에, 지석은 고개를 저었다. 합의고 죗값이고, 지금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검안서는 이미 나왔고요, 두 분은 안치실에 모셨습니다. 저와 함께 가서 신원확인 하시고 이후 장례 절차 밟으시죠.”
“네. 부탁… 드리겠습니다.”
형사를 따라 영안실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부모님의 소지품과 옷가지를 확인했다. 시신 상태가 워낙 온전치 못한 탓에 지문 대조로 신원을 확인해야 했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한지석은 참지 못하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무릎 위를 짚은 양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하지만 충격에 잠겨 있을 시간조차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유일한 자식이자 상주인 한지석은 장례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복잡한 장례 절차는 상조업체가 대부분 알아서 진행해 줬지만, 그 과정에 지석의 선택과 결정을 필요로 하는 것들이 많았다.
아무도 없는 빈소에 영정 사진 두 개가 올라왔다. 향로에 꽂은 얇은 향 하나가 외롭게 연기를 피우며 타들어 갔다.
그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린 지석은 한참이나 일어나질 못했다. 울음과 비통함을 삭이느라 굽어진 어깨가 연신 흔들리고 있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난 한지석의 얼굴은 눈가와 코끝이 온통 빨갰고, 그에 반해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옷매무새를 정갈하게 정돈했다. 검은 줄이 두 개가 그어진 삼배 완장이 옷감에 스치며 버석거렸다. 옆에서 눈치를 살피던 고 비서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전무님, 부고 소식은 방금 모두 전송했습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제주도라 조문객들이 도착하는 데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그래요, 수고했습니다.”
“우 대표님께는 계속 연락을 취해 보겠습니다. 문자도 남겨 뒀으니 아마 곧 소식이 닿을 겁니다.”
“아마 출국했겠죠. 얘기를 들었어도 오가는 시간이 있느니 쉽게 돌아오기 힘들 겁니다. 괜찮다고 전해 주세요.”
그때 바깥이 부쩍 소란스럽게 변했다. 분주한 발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빈소는 이제 막 차려졌다. 문상객이 방문하기에도 이른 시간이었다.
열린 문 너머로 우선경이 들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