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92화 (92/127)

#92

사람들을 뒤에 대동한 채 재킷 단추를 단정히 잠그며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그는 새까만 양복에 검은 넥타이, 검은 구두 차림이었다.

프랑스로 떠나는 비행기에 타고 있어야 할 사람이 장례식장에 나타나자 한지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느리게 깜빡거렸다.

“여긴, 어떻게… 왔어.”

어느새 앞으로 다가온 우선경은 아무 말 없이 한지석을 끌어안았다. 메케한 향내를 뚫고 익숙한 페로몬이 코끝을 스쳤다.

지석을 품기엔 훨씬 작은 체구임에도 든든함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게.”

“…….”

괜찮아, 다 괜찮을 거야.

위로를 품은 목소리가 귓바퀴를 스쳤다. 한지석은 힘없이 떨구고 있던 양팔을 들어 우선경을 꽉 끌어안았다. 숙인 얼굴에서 그제서야 묵직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히 못 오실 거라 생각했는데….”

“말도 마세요. 수속 밟고 비행기까지 탔는데 그때 소식을 들은 거예요. 당장 내리시겠다고 하는데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비행기가 버스도 아니고 맘대로 내렸다 탔다 할 수 있나요?”

“그래도 결국엔 내리셨군요.”

“대표님 고집을 누가 말려요. 벌금까지 물어 가면서 내리긴 했는데, 덕분에 난리가 났죠. 승객들도 모두 내려서 탑승 수속 다시 시작해야 했으니까요. 고소 얘기까지 오갔어요.”

“저런. 그럼 출장은요?”

윤진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몇 달간 공들여 준비했던 아트페어도 무산되어 버렸다.

이미 수많은 작품이 프랑스로 넘어가 있었고, 큐레이터들도 현장에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대표의 지시 하나에 엎어져 버린 것이다.

고 비서는 혀를 내두르며 분향소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침 조문객이 들어와 상주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깍듯한 자세로 맞절을 하고 있는 한지석과 우선경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우선경은 3일 내내 빈소를 지켰다. 쉼 없이 들이닥치는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한지석 대신 장례 절차를 챙기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럼에도 얼굴에선 피곤한 기색 하나 비치지 않았다. 슬픔은 감추고 초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은 연약한 외형과 달리 굳건해 보이기만 했다.

이후 발인을 하고 두 사람은 봉안당으로 향했다. 날씨는 유난히 화창했다.

부모님을 보내 드리고 온 날, 한지석은 러트의 징조가 시작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서울로 떠나기 전, 중요한 것들을 챙기고자 잠시 부모님 댁에 들렀다.

갑작스러운 사고를 증명하듯, 집에는 생활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거실에서 나는 익숙한 집 냄새, 조금 말라버린 화초들. 꺼낼 시기가 한참 지난 세탁기 속 젖은 빨래들과 냉장고 안에 가득한 반찬들. 여전히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강아지까지.

옷가지나 세간살이는 전부 태워 달라 부탁했다. 강아지는 옆집 사람이 키워 주기로 했다. 집도 알아서 처분될 것이다.

몇 번 와 본 적 없는 제주도 집은 지석 또한 낯설기 마찬가지였다. 애정도, 추억도 없어 다시 찾아올 일 없는 곳을 굳이 남겨 둘 이유는 없었다.

대충 짐을 챙긴 한지석은 현관문을 닫고 마당으로 나갔다.

본채 옆에는 작은 가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아버지가 따로 사용하시던 곳이라 들었다.

잠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칙칙한 겉모습과 달리 생각보다 아늑한 내부가 드러났다. 창고라기보단 서재와 휴식처를 섞어 놓은 느낌이었다.

세월이 묻을 대로 묻은 낡은 법전과 닳아서 손잡이가 맨들맨들해진 만년필, 글을 읽으실 때만 착용하시던 돋보기안경까지. 곳곳엔 아버지의 물건들이 가득했다.

지석은 어지럽게 놓인 것들을 한곳에 모아 정리했다.

천천히 안을 치우고 있는데, 물건으로 빼곡한 장식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잠시 하던 것을 멈추고 그 앞으로 다가갔다.

선반 위는 그동안 모아 온 상장과 임명장들로 가득했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이런 것들을 유독 좋아하셨다. 지석은 희미하게 웃으며 진열된 것들을 하나하나 구경했다.

열을 따라 움직이던 눈동자는 액자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결국 멈추고 말았다. 눈시울이 시큰하게 달아올랐다.

지석은 고개를 바닥으로 떨궜다. 참아 보려 했으나 기어코 눈물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그곳엔 부모님의 일평생이 담겨 있었다.

두 분의 젊은 시절부터 결혼 후 자식을 본 이후까지. 그마저도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부터는 오로지 한지석과 관련된 것들만 보였다.

아이가 여태껏 받은 상장과 졸업장, 노란 유치원복을 입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사진부터 초중고 입학식 때마다 기념으로 찍은 사진까지.

마지막엔 장성한 아들과 함께 찍은 결혼식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아버지에겐 모두 뜻깊고 자랑스러운 기록이었다.

“형, 슬슬 가야 될….”

한지석을 찾아 창고 안으로 들어온 우선경은 이 광경을 보고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서럽게 울고 있는 남자의 곁으로 가 조용히 그를 안아 주었다.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선경의 어깨를 까맣게 적셨다.

가족을 잃은 슬픔을 빨리 털고 일어나라 할 수는 없었다. 충분히 울 수 있게 한참을 기다려 주었다.

얼마 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지석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살짝 휘청이자 선경이 빠르게 팔을 붙잡았다. 걱정 가득한 눈빛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살폈다.

“이러다 탈수 오겠다. 물 좀 마시자.”

“선경아….”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선경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한숨처럼 뱉는 숨결엔 진한 페로몬이 담겨 있었다.

너무 놀라 그대로 지석의 얼굴을 붙잡고 눈동자를 확인했다. 발갛게 짓무른 눈가와 달리 동공에는 노란빛이 선명했다. 우선경은 다급하게 숨을 삼켰다.

“러트, 왔구나. 대체 언제부터… 아니 왜 얘기 안 했어.”

“이 상황에 러트 따위가 뭐가 중요해. 내가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것만 확인하는 거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걸 어떻게 그냥 참았어! 말이 돼?!”

예고 없이 닥치는 게 발정기라지만, 분명히 전조 증상은 있었을 텐데 여태까지 말도 안 하고 참아왔다는 게 미련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경은 앞머리를 헝클며 생각을 정리했다. 이 집에 억제제가 있을 리 없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도 아니었다.

상태를 보니, 한지석은 이미 완전히 러트에 들어갔다. 답이 안 나오는 상황에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는데. 지금이라도 병원 갈래?”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한지석! 빨리 내가 뭘 하면 되는지 얘기해!”

발끈하며 그를 떠밀었다. 지석의 몸이 끈 떨어진 연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흘 밤낮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운 데다 러트까지 겹쳐 제 몸 하나 추스르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선경은 휘청거리는 지석의 멱살을 끌어당겼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벽에 기대 세웠다.

복잡한 시선이 얽혔다. 우선경을 내려다보는 금색의 눈은 불꽃이 튈 정도로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본능이 득실거리는 시선 속엔 슬픔에 젖은 아이 같은 눈동자도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지만 어찌할 줄 모르는, 불쌍하고 애정에 굶주린 아이였다.

결국 방법은 이것밖에 없다.

선경은 발끝을 세워 벽에 기대 있는 알파에게 입을 맞췄다. 까칠하게 말라붙은 입술 사이를 적시고 조심스럽게 혀를 밀어 넣었다.

부드러운 살덩어리와 함께 페로몬이 흘러 들어오자 지석은 양손으로 선경의 뺨을 움켜잡았다. 한지석은 허겁지겁 입술을 삼키면서도 괴로운 듯 눈을 감았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깊게 패었다.

진하게 혀를 섞을수록 쓰라린 상실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잠시 입술을 뗀 선경은 오른손을 뻗어 지석의 눈가를 가렸다. 영문을 모르는 지석은 어깨를 떨며 굳어 버렸다. 선경은 긴장한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괜찮아, 형은 잘못 없어. 다 내가 요구한 거야. 내가 지금 형이랑 자고 싶어서 부탁하는 거라고.”

나머지 한 손으로 본인의 넥타이를 풀었다. 익숙지 않은 손이라 단추를 여는 것도 어설펐다. 반쯤 열린 셔츠 사이로 희멀건 맨살이 드러났다. 우선경은 페로몬을 진하게 풀어내며 천천히 오른손을 내렸다.

“그러니까 당장 나 좀 안아 줘.”

우선경의 페로몬에 직격으로 자극을 받은 탓에 그의 러트는 절정에 올랐다.

완전히 금색으로 뒤바뀐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거렸다. 이성이 날아간 한지석은 선경을 바닥에 쓰러트리고 그 위를 타고 올랐다.

“으윽, 윽!”

“하아, 하아, 흐으.”

고통스러운 신음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 모두 땀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우선경은 감당하기 벅찬 고통에 생리적인 눈물을 줄줄 흘렸고, 한지석은 비관적인 상황에 슬퍼했다. 맨바닥에 누워 몸을 겹친 이들은 본능과 감정이 뒤섞인 이상한 섹스를 했다.

밑에 깔린 우선경은 말도 제대로 뱉지 못했다. 성급하게 몸을 꿰뚫고 들어온 성기가 아래를 사납게 헤집고 있었다.

평소보다 더욱 커진 성기는 아무리 힘을 풀고 있어도 버거웠고, 격렬한 허릿짓에 전신이 흔들렸다.

“윽, 으읏! 하악, 형, 조, 금만…! 천….”

조금 천천히 해 달라며 손을 뻗자, 지석은 그것을 거부로 받아들였는지 우선경의 양손을 바닥에 짓누르고 더욱 깊게 좆을 쑤셔 박았다.

한계까지 팽팽하게 늘어난 구멍과 뱃속 깊은 곳까지 들어찬 성기에 눈앞이 노랗게 변할 지경이었다.

히트 사이클은 이미 삼 주 전에 끝났다. 그때는 억제제의 도움을 받아 혼자 넘겼는데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같이 발정기를 보낼 것을 그랬다. 맨정신에 러트가 온 알파를 상대하려니 온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하아, 선경아, 우선경.”

나 좀, 어떻게 해 줘. 제발. 지석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바닥에 늘어져 있는 자신의 오메가를 힘껏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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