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94화 (94/127)

#94

***

그날 저녁,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한지석은 오랜만에 우선경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선경은 오늘따라 밥을 잘 먹지 못했다. 몇 술 뜨지도 않더니 다짜고짜 식사 후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진지한 분위기에 덩달아 긴장이 돼 밥이 안 넘어갔다.

“나 임신했어.”

하지만 우선경이 꺼낸 말은 의외의 소식이었다.

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놀란 표정을 감추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선경의 의사를 물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낳을 거야. 낳고 싶어.”

확고한 대답에 비로소 한지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우선경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절대 너 힘들지 않게 해 줄게.”

“나랑 약속해. 무조건 잘할 거라고.”

“잘할게, 잘할 거야. 마음에 안 드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얘기해.”

그는 강아지처럼 품을 파고들며 선경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옷 위로 귀를 바짝 붙이며 뱃속의 소리를 들었다. 태동은커녕 꼬르륵 물 지나가는 소리만 들렸다.

“그런다고 뭐가 들려?”

우선경은 웃으며 배에 달라붙은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직 이른가?”

“8주밖에 안 됐어. 조금 더 참아 봐.”

“신기해.”

“며칠 전에 초음파 봤는데, 강낭콩 같던 게 고새 컸다고 팔, 다리가 생겼어. 사람들이 젤리곰 젤리곰 하던데, 정말로 그 모양인 거 있지.”

“병원 또 혼자 다녀왔어? 다음엔 같이 가.”

“알았어, 같이 가자.”

순순히 호응해 주는 게 너무 사랑스러웠다. 지석은 벅찬 마음에 무릎을 세우고 일어났다.

소파에 기대듯 앉아 있는 선경에게 여러 번 입을 맞추고, 비좁은 공간을 파고 들어가 그를 껴안았다.

그리 넓지 않은 일인용 소파에 두 남자가 앉으니 자리가 남을 리 없다. 결국 선경은 지석의 허벅지 위에 올라가 앉았다. 허리에 단단한 손이 감겼다.

“…….”

부둥켜안은 한지석의 몸에서 낯선 오메가 냄새가 났다. 아주 희미하고 연약한 향기였다.

본인조차 제 몸에 그런 냄새가 배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 듯싶었지만… 임신 초기인 우선경은 후각이 어느 때보다 예민해진 상태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의 것일까. 정체 모를 페로몬의 주인에 자꾸만 특정 인물이 연상됐다.

우선경은 자꾸만 고개를 드는 의심을 지웠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석의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형은…, 나한테 해 줄 얘기 없어? 요즘 별일 없었고?”

“…….”

한지석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

김현진의 발현 사실을 털어놓을까도 싶었지만, 오늘의 행복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안정기가 지나거든 얘기하자. 선경이가 스트레스받을 테니까.

애써 이유를 만들어 가며 자체적으로 유예 기간을 주었다. 그는 품 안에 들어온 몸을 더욱 바짝 끌어안았다.

“응, 아무 일도 없었어.”

“…….”

담담한 대답을 들은 선경이 지석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를 내려다보며 한 박자 늦게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

모처럼 휴가를 냈다. 한지석과 함께 병원에 가기로 한 날이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기 지루해 일부러 회사를 찾아갔다.

오랜만에 와 보는 본사 건물은 여전히 크고 웅장했다. 주변에 계열사 건물까지 한 몸처럼 붙어 있어 덩치가 더 커 보였다.

하늘을 위협하며 뻗어 있는 마천루들을 보며 사람들은 이곳을 서화 타운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이기도 했다.

우선경은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가지고 있는 출입 카드를 태그하자 빈틈없이 막혀 있던 아크릴 문이 자동으로 열린다. 그 사이 리셉션에 있는 모니터엔 우선경의 신원 정보가 떴다.

예정에 없던 총수 일가의 방문에 데스크를 지키던 직원들이 부리나케 달려 나왔다.

VIP가 연락도 없이, 그것도 정문을 통해 직접 카드를 찍고 들어오는 경우는 드문지라 직원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그중 연차가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직원이 대표로 다가왔다. 남자는 허리를 깊게 숙이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리셉션 팀 과장 남신우입니다. 전달받은 사항이 없어서 미처 응대해드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개인적인 일정으로 온 거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선경은 직원의 목에 걸려 있는 사원증을 빠르게 훑으며 살짝 웃음 지었다. 남신우 과장은 송구스러운 듯 재차 허리를 구부렸다.

“따로 만나 뵙기로 하신 분이 계십니까.”

“한지석 전무님 만나러 왔어요. 제가 연락하면 되니 따로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비서실에는 연락 넣어 놓겠습니다.”

“그러세요.”

나긋한 분위기에 그제야 직원들의 얼굴이 펴진다. 우선경은 부담스럽게 자신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놔두고 홀연히 로비로 걸어갔다.

얼핏 시계를 살펴보니 점심시간이 되려면 아직 삼십 분이나 남았다.

남의 회사를 제집처럼 돌아다니는 것도 실례였고, 직원들이 부담스러워할 것도 자명했다. 우선경은 남은 시간을 1층에 있는 카페에서 보내기로 결정했다.

로비 한쪽 구석에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오픈 카페가 있었다. 주로 직원들이 애용하고 가끔은 외부에서 온 손님들을 접대하는 용도로도 쓰였다.

2m가 넘는 대형 극락조와 여인초가 곳곳에 놓여 있었다. 워낙 크기가 크고 잎이 울창해 가림막 역할을 톡톡히 해 준다.

아치형으로 뻗은 검은 철제기둥과 유리창, 그 주변을 가득 채우는 가드닝 제품들로 카페는 마치 실내 정원을 연상케 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네. 카모마일 티 한잔이랑, 바닐라 라떼 두 잔, 그리고 샷 추가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요. 전부 따뜻한 거로요.”

“지금 주문이 밀려 있어서요. 15분 정도 걸리는데 괜찮으실까요?”

“네, 천천히 해 주세요.”

제가 마실 차 한 잔과 비서실 직원들 몫의 음료를 구입했다. 여기서 얼추 시간을 보낸 뒤 올라가서 전달해 주면 딱 좋을 것이다.

음료가 나오길 기다리면서 우선경은 제법 마음에 든 카페의 내부를 주의 깊게 살폈다.

다음에는 이런 식으로 전시회를 꾸며 볼까, 색다른 계획을 짜 보기도 했다. 지금의 감상을 잊지 않기 위해 핸드폰을 꺼내 눈에 띄는 곳들을 사진으로 남겼다.

그때, 카메라 화면으로 어딘가 낯익은 얼굴이 스쳤다. 처음엔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우선경은 액정을 손가락으로 늘리며 확대했다. 멀리서 테이블을 치우고 있는 아르바이트생의 희멀건 얼굴이 화면 가득 잡혔다. 틀림없이 김현진이었다.

선경은 그대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생각이 정지된 것처럼 머릿속이 잠시 멍해졌다.

한참을 멈춰 서 있던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다시 카운터로 되돌아갔다. 그곳에서 신분을 밝히고 매니저를 찾았다.

잠시 후 정장 차림의 매니저가 허겁지겁 달려 나왔다. 그는 우선경을 보자마자 정수리가 보이도록 허리를 숙였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신지.”

“저기 저 남자분이요. 여기 직원입니까?”

매니저는 우선경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따라 고개를 틀었다. 삐뚤어진 테이블과 의자를 정리하느라 분주한 김현진을 확인하곤 턱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네, 저희 직원 맞는데요. 혹시 무슨 문제라도?”

“제가 아는 사람 같아서요…. 혹시 여기서 일한 지는 얼마나 됐나요?”

“어어, 삼 주 정도 됐어요. 불러드릴까요?”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우선경은 애써 웃으며 뒤돌아섰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는 주문한 음료도 챙기지 않고 빠르게 카페를 벗어났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가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마침 고층으로 직행하는 임직원 전용 엘리베이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한지석의 집무실이 있는 12층을 눌렀다.

천천히 문이 닫히고, 육중한 승강기는 중력을 거스르며 미끄러지듯 위로 올라간다. 그동안 선경은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몰아쉬며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심장이 박자를 무시하고 펄떡펄떡 뛰었다. 어찌나 힘이 거센지 가만히 있어도 박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흥분하지 말자, 울컥한 마음을 다스리려 해봤지만 쉽지 않았다.

띵-

승강기는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선경은 곧장 한지석의 집무실로 향했다. 텅 빈 복도에 조급한 발걸음 소리가 공명하듯 크게 울렸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이닥치자 안에서 업무를 보던 비서실 직원들이 소스라치듯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우선경의 인상 쓴 얼굴을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뭔가가 잘못됐음을 감지한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날이 선 목소리로 다짜고짜 제 알파를 찾았다.

“한지석 어딨어요.”

눈치 빠른 고 비서가 달려 나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정하라는 뜻으로 우선경의 팔을 붙잡고 차분하게 응대했다.

“전무님 지금 회의 중이십니다. 급하신 일이면 제가 따로 말씀을 전달….”

“나한테 함부로 손대지 마세요.”

“…….”

“말귀 못 알아들어요? 비키라고.”

우선경은 그에게 잡혀 있는 팔을 가만히 눈짓했다. 차갑고 고압적인 말투에 고 비서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내리고 물러섰다.

지금 집무실 안에선 회의가 한창이었다. 이 상황에 들여보내면 큰 사달이 날 것이 분명했지만 차마 우선경을 말릴 용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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