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선경은 그대로 집무실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묵직한 양개형 문이 열리자 십여 명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회의를 하던 직원들의 얼굴엔 당혹감이 서렸다.
기다란 테이블에 앉아 있는 이들은 M&A를 전담하는 신사업 TF팀이었다. 올해 상반기 프로젝트 중 하나인 미국 대형 엔지니어 회사를 인수합병 하기 위해 여러 전략들을 수립하고 있었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다 보니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분석하고 제반 사항을 따져 봐야 했다. 최근 한지석이 가장 몰두해 있는 사업 기획이기도 했다.
한창 집중돼 있던 분위기가 깨지고, 모두가 당황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우선경은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던 한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흥분한 선경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 역시 예기치 못한 행동에 당황하고 있었다.
“왜 그래. 갑자기 무슨….”
“김현진 언제까지 숨길 생각이었어.”
다짜고짜 던진 말은 뾰족하게 날이 박혀 있었다. 우선경은 진심으로 분개하고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돼 왔던 의심은 결국 싹을 틔우고 무성한 줄기를 뻗어갔다. 살면서 누군가를 질투해 본 적 없었는데, 처음 겪는 감정은 불쾌하고 메스껍기만 했다.
무엇보다 기어코 자신을 추잡한 감정에 구르게 만든 한지석이 가장 원망스러웠다.
무슨 일인지 대강 파악한 지석은 작게 탄식했다. 굳어진 입매와 찌그러진 눈썹 앞머리가 그의 곤혹스러운 마음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핀 지석이 선경의 손목을 감싸 쥐었다. 아프지 않게 그를 살살 끌어당겼다.
“이리 와. 나가서 얘기하자.”
“왜, 사람들 앞에서 얘기하기엔 쪽팔려? 부끄러운 짓인 줄은 아나 보지?”
“우선경.”
“내가 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은 조금도 안 했어? 왜 하필 여기야. 어떻게 걔를 회사에 데려다 놔!”
날카롭게 지르는 목소리엔 점차 울분이 섞였다. 검붉어진 눈동자엔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그래도 용케 울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지만, 우선경은 그들의 시선 따위엔 조금도 관심 없었다.
사회적 체면을 고려하는 것보다 당장 한지석에게 원망을 풀어내고, 그의 해명을 듣는 게 중요했다. 당장 제가 가진 불안을 없애 주길 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선경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한지석은 가슴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켜더니, 목을 조이는지 넥타이 매듭을 한 번 비틀었다. 선경의 손목을 붙잡은 손에도 부쩍 힘이 들어간다. 답답한 심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네가 왜 그러는지는 알겠는데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 아니야. 일단 진정하고.”
“…이 상황에 나보고 진정을 하라고. 미치겠네.”
아하하, 고개를 뒤로 젖히며 광증에 걸린 사람처럼 웃던 선경은 순간 한지석의 손을 획 뿌리쳤다.
그는 언제 화를 내고, 웃었냐는 듯 입을 다문 채 잠잠한 표정으로 지석을 노려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결심했는지, 등을 돌려 집무실을 나가 버린다.
짧은 시간 동안 휘몰아친 싸움 덕분에 이미 집무실 분위기는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살벌한 언쟁을 강제로 지켜봐야 했던 직원들은 서로 눈치를 살피며 입술을 뻥긋거리기 바빴다. 왜 저래? 무슨 일인데? 무음의 언어들이 테이블 위를 오갔다.
“와, 우리 전무님. 사랑싸움이… 꽤 격렬하시네요.”
어색한 분위기를 수습해 본답시고 법무팀 변호사 최정훈이 실없는 농담을 던졌다. 몇몇 팀원들이 동조하며 같이 웃어 보았지만 가라앉은 분위기를 되살리진 못했다.
회의를 다시 진행해도 될지, 말지 결정권자인 한지석의 선택을 기다리느라 다들 눈동자만 굴렸다. 주위는 다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후우….”
의자 등받이를 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숙인 한지석은 땅이 꺼지도록 길게 한숨을 뱉었다. 세심하게 신경 쓰지 못한 제 잘못이 컸다. 하지만 이제 와 후회해 봤자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었다.
움켜쥔 손가락 끝이 새하얗게 질리도록 힘이 들어갔다. 잠시 뒤 얼굴을 든 지석은 착잡한 심정을 감추며 말했다.
“미안합니다.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그사이 다시 1층으로 내려간 우선경은 곧장 카페로 돌진했다.
이번엔 매니저가 나와 직접 응대했다. 선경의 시선이 상단에 붙어있는 메뉴판을 훑자, 매니저는 긴장된 표정으로 주문을 기다렸다.
“토마토 주스, 지금 되죠?”
“네. 테이크아웃 하실 건가요?”
“마시고 갈게요. 서빙은 아까 그분께 부탁드려도 싶은데요. 제 얘기는 하지 마시고요.”
“아아, 네. 알겠습니다.”
매니저는 눈치가 제법이라 우선경이 말하는 것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결제를 마친 매니저는 안쪽으로 들어가 김현진을 불렀다. 그에게 주문 내용을 알려 주며 몇 가지를 더 당부했다. 아마도 친절을 강조하는 것일 거다.
그사이 우선경은 안쪽으로 들어가 일인용 소파석에 앉았다. 커다란 관엽 식물들이 마치 벽처럼 좌석과 좌석 사이의 시야를 가려 주고 있었다.
아까는 그렇게 관심이 가던 싱그러운 인테리어들도 이제는 별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삐딱하게 턱을 괸 채 먼 곳만 응시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침내 김현진이 음료를 들고 나타났다. 그는 유리잔을 내려놓으려다 우선경을 발견하곤 헉, 하고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잔이 반쯤 기울며 내용물을 조금 흘려버렸다.
선경은 테이블 위로 휴지를 던지며 담담히 물었다.
“왜 놀라, 죄지었어?”
“어. 그… 그게요.”
“말 더듬지 말고, 똑바로 말해. 어린애도 아닌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죄짓다 걸린 사람처럼 김현진은 쉴 새 없이 눈치를 살폈다.
차마 우선경을 마주 보지 못하고 주먹을 연신 말아 쥐었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을 검은 앞치마에 문지르고, 다시 주먹을 쥐었다 하며 번잡스럽게 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오히려 기가 막혔다. 저렇게 청승을 떨어대니 정말로 바람피우다 들킨 사람 같잖아. 선경은 헛웃음을 삼켰다.
결국 압박감을 버티지 못한 김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또한 의연해 보이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탈수기에 들어간 것처럼 덜덜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형은… 잘못한 거 없어요. 그냥 저 일자리 구하는 거 도와준 것뿐이에요.”
“이사님.”
우선경은 콕 짚어 정정했다. 불쾌하다는 듯 미간이 좁게 모여든다. 치켜뜬 시선이 겁먹은 김현진을 꿰뚫고 잘게 난도질했다.
“누가 네 형이야. 호칭 똑바로 해.”
“…….”
“할 말이 있어서 불렀어. 앉을 건 없고 그냥 거기 서서 들어.”
당연하다는 듯 하대가 이뤄졌지만, 현진은 거기에 대해 딱히 반발심이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우선경은 앉아 있는 자세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찍어 누르고 있었다.
그는 깍지 낀 양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문득 현진의 시선이 그 하얀 손에 닿았다.
단정한 손톱과 곧은 손가락이다. 거스러미가 잔뜩 올라오고 굳은살이 박인 자신과는 확연히 달랐다. 거친 일이라고는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깨끗한 손이었다.
“일자리가 필요하다면 다른 곳 알아봐 줄게. 여기보다 훨씬 조건 좋은 곳으로 구해 줄 수 있어. 혹시 더 공부할래? 그럼 그것도 시켜 주고. 하고 싶은 거 있다면 지금 얘기해. 원하는 거 다 하게 해 줄게.”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김현진은 큰 눈을 깜빡였다.
“저한테 왜 그렇게 해 주시는 건데요?”
“대신 다시는 우리 앞에 얼쩡거리지 마. 부탁하는 거 아니야. 난 지금 최대한 정중히 경고하는 거야.”
“우리… 라는 건.”
“그것까지 내가 말해 주고 싶진 않은데.”
우선경은 시선을 내리며 소파에 등을 기댔다. 긴장돼서 마른침을 꼴깍대는 현진과 달리 여유가 가득했다.
협박은 상당히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 그래서인가, 김현진은 겁도 없이 살짝 오기가 생겼다. 땀으로 미끌거리는 주먹을 힘껏 말아 쥐며 최대한 도전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싫어요.”
슬쩍 올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한번 내뱉고 나니 자신감이 생긴 현진은 또다시 쐐기를 박았다.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그걸 몰라서 물어?”
그의 한쪽 입꼬리가 길게 올라간다. 우선경은 확신에 찬 듯 말했다.
“너 한지석 좋아하잖아.”
“…….”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본심이 까발려지자 현진은 당황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표정 관리에 서투른 어린 청년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고개를 떨궜다.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반응을 지켜보며 선경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뒤로 기댔다. 이 상황 자체가 스트레스라 그런지 아랫배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한시라도 빨리 정리하고 자리를 떠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네가 베타라면 모를까, 오메가로 발현한 마당에 내가 그걸 봐주고 있을 순 없잖아. 좋게 말할 때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혹시 저한테 질투… 하시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