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96화 (96/127)

#96

가당치도 않은 얘기에 웃음이 터졌다. 우선경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이마를 짚었다.

“내가 너 같은 거한테?”

“그런데 조금 실망이네요. 돈으로 사람 협박하고, 해결하려 드는 거 너무 뻔한 방법이잖아요. 혹시 돈 봉투는 안 가지고 오셨어요? 그렇게 잘 사시면서 안에 수표라도 빵빵하게 채워서 던져 주시지 그러셨어요. 드라마 보면 재벌들이 꼭 그렇게 하던데.”

하, 드라마… 우선경은 들리지 않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어느새 비웃음마저 사라지며 무표정해진 얼굴만 남았다.

“너 눈치가 많이 없구나.”

“…….”

“내가 계속 좋게 얘기해 주고 있는데, 자꾸 일을 크게 만드네.”

선경은 열 오른 눈두덩을 세게 눌렀다. 다시 눈을 뜨자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드러났다. 더 이상은 참아 주기 힘든지 김현진을 노려보며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걸 원한다는 거지?”

그는 망설임 없이 주스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눈앞에 보이는 정수리에 그대로 들이부었다.

“허억.”

놀란 김현진이 몸을 움츠린 채 신음을 터트렸다.

차갑고 걸쭉한 토마토 주스가 두피를 타고 흘러내리며 뺨과 턱 끝을 적셨다. 김현진의 앞머리가 푹 젖어 미역처럼 들러붙었다. 우선경은 그때까지도 천천히 컵을 기울이고 있었다.

끝내 컵을 뒤집어 탈탈 털어댈 때까지 전부 쏟아버리고는 빈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또박또박 제 할 말을 하던 김현진은 당황한 듯 눈만 크게 뜬 채 굳어 있었다. 하필이면 하얀 셔츠를 입고 있어 붉은 토마토 주스로 범벅된 모습이 더욱 뚜렷해 보였다.

“분명히 경고했어.”

“…….”

“한 번만 더 내 눈에 띄기만 해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들린다. 공개된 장소에서 심상치 않은 말다툼을 벌이니 아까부터 조금씩 이목이 집중되고 있었다. 주스를 끼얹는 순간엔 어머! 하는 작은 비명까지 들렸다. 주변의 관심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때 물에 젖은 생쥐처럼 주스에 푹 절여진 김현진의 머리 위로 까만 재킷이 덮였다. 한지석은 카페 매니저를 향해 말했다.

“뭐 해요. 데리고 가세요, 어서.”

“네네!”

손 놓고 지켜보던 카페 매니저와 직원이 달려 나와 김현진을 데리고 자리를 피했다. 그들이 스태프 룸으로 들어갈 동안 지석은 몸을 돌려 우선경을 마주했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며 허리에 손을 짚었다. 엉망이 된 자리를 한 번 둘러본 뒤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선경아, 대체 왜 그래.”

소란을 알아차리자마자 달려온 탓에 지석의 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우선경은 그의 단정치 못한 행색을 보며 저게 과연 누구를 위해 뛰어온 걸까, 생각했다.

사실 이런 걸 의심하는 것조차 예전에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었다.

대답 없는 상대를 보며, 한지석은 재차 추궁하듯 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야.”

“그거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선경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고개를 젖혀 눈을 꾹 감았다. 살짝 고이려는 눈물을 없앤 뒤 다시 차분히 고개를 바로 했다. 그 역시 한지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 쟤한테 관심 있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한지석은 듣기도 싫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는 동생한테 베풀기엔 정성이 너무 지극하다는 생각 안 들어?”

“우선경.”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숨길 작정이었으면 차라리 치밀하게라도 하든가. 못 볼 꼴 다 보게 만들어 놓은 건 당신이잖아. 지금은 또 내 앞에서 감싸는 꼴 보여 주면서, 나한테 왜 그러냐고?”

“이래서 얘기 안 했던 거야. 네가 질색할 걸 알았으니까. 너한테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았어.”

“…변명 한번 거지 같네.”

중얼거리던 선경의 눈가에서 굵은 눈물이 도르륵 흘러내렸다. 결국은 참던 눈물이 터져버렸다. 놀란 지석이 다가오려 하자, 선경은 그보다 빨리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버렸다. 하지만 연이어 쏟아지는 눈물까지 모두 닦을 순 없었다.

우선경은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갔다. 얼굴을 가리고 최대한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건물을 채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그 뒤를 쫓아온 지석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억지로 뒤돌려 세우자 우선경은 얼굴을 감추려 고개를 푹 숙였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바닥을 향해 낙하했다.

“어디를 가려고. 너 지금 이 상태로 혼자 가면 안 돼.”

“…놔. 지금 형 얼굴 보기 싫어.”

우선경은 보지도 않고 지석의 어깨를 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한지석은 팔에 힘을 줘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쏠려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놔.”

“선경아.”

“한지석, 제발. 나 지금 너무 쪽팔려….”

서럽게 우는 목소리가 품 안에서 사정했다. 그 절박함에 지고 만 한지석은 결국 팔에 힘을 풀고 그를 놓아주었다.

우선경은 얼굴을 가린 채 뒤돌아 떠났다. 그가 정문을 나가고 도로 밖에 서 있는 택시를 타고 사라질 때까지 지석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셔츠가 이상하리만큼 뜨거웠다.

***

초음파 탐촉자가 배를 문질렀다.

의사의 시선은 선반 위에 올려진 작은 모니터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손목을 재차 돌리며 딱딱한 기기를 하복부에 한 번 더 밀착시켰다.

침대 같은 의자에 기대 누워 있던 선경은 긴장되는지 의자 손잡이를 움켜잡았다.

택시를 타고 가던 중 살짝 복통이 느껴져서 바로 병원으로 방향을 돌렸다. 마침 오늘은 내원 일이었고, 응급으로 간주돼 예약 시간보다 빨리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의사는 사진 몇 장을 캡처했다. 검사가 끝났는지 우선경의 배에 묻은 윤활제를 티슈로 닦아주고 의자를 바로 세워 주었다. 그녀는 한결 가뿐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다행히 크게 걱정할 건 아니네요. 통증이 느껴졌던 건 아마도 포궁이 커지면서 동반되는 증상이었을 거예요. 흔한 일이긴 한데 환자분 같은 경우엔 이전에 비슷한 증상으로 유산하셨던 경험이 있으셔서 많이 놀라셨을 것 같아요.”

“아이는 건강한가요?”

“네, 태아는 주 수에 맞게 잘 크고 있습니다. 보여드릴게요.”

의사는 아까 전 캡처해 둔 초음파 화면을 다시 불러왔다. 검은 동굴 속에 누워 있는 아기는 둥그렇고 큰 머리에 통통한 배를 하고 있었고, 짧둥한 팔, 다리가 앙증맞게 달려 있었다.

선경이 정신없이 초음파를 보고 있자 마우스를 달깍거리던 의사는 아이의 머리 크기, 몸길이 등을 하나하나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다행히 모든 게 정상이었다.

“출산 예정일은 10월 14일 정도가 되겠네요. 수술 날짜는 그쯤 돼서 다시 상의하시죠.”

“네.”

“지금은 문제가 없지만, 환자분 같은 경우엔 초기 유산 경험이 있으시니 각별히 조심하시는 게 좋아요. 특히 스트레스받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 하는데….”

말끝을 흐리던 의사의 시선이 우선경의 얼굴에 닿았다.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 있고 눈가가 발그스름한 것이 누가 봐도 실컷 울고 온 얼굴이었다.

그 시선의 의미를 파악한 선경은 제 얼굴을 괜히 한 번 문질렀다. 아직도 눈 주위가 뜨끈뜨끈했다.

“조심하겠습니다. 다른 건요?”

“오늘 시간 괜찮으시다면 오신 김에 산전 검사도 받고 가시는 게 좋겠어요. 남자 오메가 산모들은 필수로 하셔야 되는 건데 입원하실 필요는 없고요, 시간은 두 시간 정도 걸립니다.”

“…….”

의사의 말을 듣고도 대답을 미루던 선경은 조심스러운 부탁을 건넸다.

“선생님, 혹시 입원해도 될까요?”

“네?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

“제가 필요해서요. 그냥 좀 쉬고 싶어요.”

“…….”

스스로 입원을 원하는 경우는 처음이라 의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흔치 않은 요구였지만 분명 타당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산모가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의사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다각다각, 자판을 누르며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시죠. 안 그래도 환자분은 안정이 필요한 시기이니 입원을 권장해 드립니다. 넉넉하게 일주일 정도면 될까요?”

“네, 감사합니다.”

“보호자께는 따로 연락하시겠습니까? 힘드시면 저희가 연락드리고요.”

보호자를 언급하자, 우선경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주먹을 쥐더니 다소 비장하게 말했다.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우선경과 연락이 두절된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핸드폰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사람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져버린 것도 아닐 텐데 그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처음엔 무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던 한지석은 걱정과 불안감으로 점차 미칠 지경이 되었다.

헤어진 뒤 몇 시간 뒤, 행방을 알 수가 없어 그가 탄 택시를 추적했다. 택시 기사는 우선경을 기억했다. 대학 병원 앞에 내려 주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곧바로 산부인과를 찾았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환자의 진료 기록에 대해선 공개가 불가하다는 말뿐이었다.

‘제가 배우자인데도 알려 줄 수 없다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원칙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환자분의 요청도 있으셨고요.’

‘혹시 병원에서 언제 떠났는지도 알 수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이후 우선경이 갈 만한 곳은 모두 수배했다. 가장 먼저 연락이 닿은 갤러리 쪽에서 의외의 얘길 들었다.

‘대표님. 일주일 휴가 내셨는데요. 연락도 안 될 거라고 그러셨어요.’

‘우 대표가 직접 말했습니까?’

‘네, 저랑 통화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목소리가 어떻던가요.’

‘좀 피곤하신 것 같긴 했지만… 평소랑 별반 다르진 않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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