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실종 신고를 할 뻔했던 지석은 이 말을 듣고 아주 조금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직접 휴가를 신청한 것을 보면 사고가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아마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잠적한 게 분명했다.
하지만 불안감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좋지 못한 생각만 들었다.
지금 대체 어디에 있을까. 아직도 울고 있을까. 몸은 괜찮을까. 지난번처럼 스트레스를 받아 어디서 혼자 쓰러지는 건 아닐까.
설마 아이를 지워버리는 건 아닌가.
급기야 하면 안 되는 생각까지 하고 말았다. 그럴 때마다 한지석은 반쯤 미쳐 있는 사람처럼 우선경을 찾아 돌아다녔다.
성북동 본가와 갤러리는 물론이고 우선경이 자주 가던 곳, 혹은 한 번이라도 자신과 함께 들렀던 곳이라면 어디든지 헤집고 다녔다. 결국 마지막엔 껌껌하고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을 쓰면 될 것을 굳이 직접 나서는 건 일종의 자학이나 다름없었다.
고작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한지석은 오랜 가뭄이 든 것처럼 인내심이 말라 가는 걸 느꼈다. 점점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오 일째 되는 날. 우재경이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예정에도 없던 부회장의 방문에 비서들은 기겁했지만, 한지석은 예상했다는 듯 오히려 담담하게 그녀를 맞이했다.
“어제도 성북동 다녀갔다면서요.”
소파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우재경은 등받이에 몸을 깊게 묻었다. 팔짱을 낀 채 마뜩잖은 눈길을 보냈다. 우울함이 짙게 드리워진 얼굴을 하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다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언제까지 미친놈처럼 그러고 다닐 겁니까?”
“선경이 없어진 지 닷새나 된 거 알아요?”
“설마 그걸 내가 모를까 봐 묻는 거예요?”
우재경은 이를 갈며 한지석을 노려보았다. 안 그래도 회사엔 추문이 돌고 있었다. 감히 제 동생을 이딴 더러운 스캔들에 휘말리게 하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졌다. 재경은 간신히 화를 삼키며 말했다.
“선경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아냈어요.”
“어디 있어요? 연락됐습니까?”
“나도 연락은 안 돼요. 그냥 위치만 확인했을 뿐이에요. 본인이 혼자 있기를 원하는 것 같으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죠.”
“지금 어디에 있는데요?”
“S대 병원 산부인과에 단기 입원 중이라더군요.”
장소를 들은 한지석의 표정이 점차 굳어 갔다.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의 구두 앞코만 멍하니 내려다봤다. 온갖 어두운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우재경 역시 걱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착잡해진 표정으로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혹시라도 그 애한테 뭐라 추궁할 생각하지 말아요. 이미 충분히 힘들 테니까.”
“…….”
남자는 끝까지 대답이 없었다. 무력한 자세로 축 처져 있는 모습이 한지석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집무실을 나가기 전, 우재경은 참다못해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대체 이럴 거면 왜 결혼했어요?”
그 말이 비수가 되어 꽂혔다.
***
엿새째 되던 날이었다.
햇빛이 거실과 주방까지 길게 파고 들어왔다. 한낮의 햇살이 비치는 공간은 어느 때보다 환하고 따스했지만, 이상하게도 집 안에 깃든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는 쉽게 가시질 않았다.
그때, 적막이 흐르던 집에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식탁에 앉아 꼴딱 밤을 새웠던 지석은 그 소리를 듣고 홀린 듯 고개를 돌렸다. 피로로 뻑뻑해진 그의 두 눈에 막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우선경이 담겼다.
슬리퍼로 갈아 신고 긴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온 우선경은 가출했던 사람답지 않게 말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못 보던 새 옷에 머리도 잘랐는지 귓바퀴와 하얀 목덜미가 훤히 드러나 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었다.
그에 반해 한지석은 전날 퇴근했던 복장 그대로였고, 늘 보기 좋게 넘기고 다니던 머리는 죄다 헝클어져 있었다.
질 좋은 수트를 입고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모습을 보며 우선경은 티 나지 않게 입술 안쪽 살을 지그시 물었다.
한지석이 앉아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앉을 때까지도 시선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우선경은 식탁 위에 놓인 빈 컵에 물을 한잔 따랐다. 그것을 건너편에 있는 상대에게 건넸다.
“무슨 얘기부터 할까.”
“…그동안 어디 있었어.”
꺼슬꺼슬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마치 목구멍을 죄 긁으며 내지르는 신음 같았다.
답을 알고 있었지만, 우선경이 직접 얘기하는 걸 듣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경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원에 있었어.”
“산부인과?”
“응.”
“입원할 만큼 몸이 안 좋았던 거야?”
“아니.”
“…아이 지웠어?”
“좋을 대로 생각해.”
간단명료한 대답에 한지석은 체념한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숨을 고르게 내쉬던 그가 다시 눈을 떴다. 충혈된 눈동자에는 공허함만 남아 있었다.
그가 의자 아래로 팔을 늘어트리며 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일주일 동안 네가 연락두절 됐던 이유가 뭘까 계속 생각해 봤어. 일부러 나를 벌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더라.”
“맞아.”
“지금은 만족해?”
“…….”
“나랑 아이를 갖고 싶긴 했어?”
차마 그 질문엔 대답할 수 없었는지 선경이 입을 꾹 다물었다. 침묵이 길어지고 두 사람의 의미 없는 대치도 계속 이어졌다.
견디다 못한 우선경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리고, 도망치듯 침실로 들어갔다.
쾅, 닫히는 문소리를 듣던 지석은 지친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답답함에 좀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미 헐겁게 풀어져 있는 셔츠를 더 벌리고, 주먹으로 가슴을 턱턱 내리쳤다.
한계가 온 것 같다.
모든 게 지치고 버겁기만 했다.
***
“저기요, 사장님! 정신 좀 차려 보세요.”
바텐더가 진땀을 흘리며 엎드려 누운 남자를 흔들었다. 인사불성이 된 손님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렵다.
보통 혼자 와서 이렇게까지 취하는 경우는 드물었기 때문에 더욱더 난감했다. 누가 데려가 줄 사람도 없지 않은가.
시간은 이제 막 11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이른 시간부터 비싼 술을 병째 시킨 손님은 구석에서 조용히 취해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매출을 올려 주는 기꺼운 손님이라 생각했는데, 이토록 만취해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술주정하거나 행패를 부리는 진상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누군가 챙겨 줄 사람을 부르긴 해야 할 텐데, 바 위엔 핸드폰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부로 주머니를 뒤질 순 없어 계속 눈치만 보고 있던 참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마침 남자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전화가 끊길세라 바텐더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찾았다. 다급히 전화를 받은 그는 땀으로 번들거리는 이마를 닦으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여기는 청담동에 있는 몰트바인데요. 지금 손님이 많이 취하셔서 대신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 그래도 모셔 갈 분이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는데…. 아! 오실 수 있으세요? 네, 저희 주소 바로 말씀드릴게요. 강남구 도산대로 155길 18입니다. 네? 지하철이요? 어… 지하철은 아마 압구정로데오역이 제일 가까울 것 같은데….”
거의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바 문을 열고 앳된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남루한 체크 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술집 분위기와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그 역시 이곳에 온 목적이 따로 있는지 연신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바 한쪽 구석에 엎드려 있던 한지석을 겨우 찾았다. 열심히 그를 흔들던 현진은 깨우는 걸 포기하고 지석의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 안에서 카드를 찾아 대신 결제를 하고 사인까지 끝냈다.
데리고 나가려고 늘어진 손을 어깨에 걸치는데, 키 170이 겨우 넘는 비쩍 마른 어린애가 저보다 한참 더 큰 알파 남성을 부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바텐더의 도움을 받아 겨우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었다.
근처 벤치에 앉혀 놓고 급하게 가까운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차가운 물과 숙취 해소제를 사 온 뒤 한지석을 재차 깨웠다.
“형! 형!”
“.......”
좀처럼 일어나질 않자 김현진은 생수 뚜껑을 열었다. 벌어진 입술에 병 주둥이를 붙이고 억지로 물을 흘려 넣었다.
삼키지 못한 물 대부분이 옆으로 주르륵 흘렀다. 입술과 입가, 아래턱과 셔츠까지 엉망으로 젖었지만, 그 차가움 덕분인지 한지석은 정신을 차렸다. 취기 어린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형, 정신 들어요?”
“…네가 왜 여기 있어?”
“일단 이것 좀 마셔 봐요, 형 지금 많이 취했어요.”
서둘러 숙취 해소제를 까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예상보다 순순히 음료를 받아 마셨다. 한 병을 다 비운 한지석은 속이 답답한지 고개를 푹 숙이며 바닥을 내려다봤다.
후우, 길게 내쉬는 숨에서 진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괴로움이 뻑뻑하게 묻어나는 한숨에 김현진은 말없이 옷소매를 움켜잡았다. 속상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형 이러는 거 그 사람 때문이죠?”
“.......”
“…아직도 그 사람 사랑해요?”
“글쎄,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