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98화 (98/127)

#98

얼굴을 성의 없이 문지르던 한지석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술에 취하니 별소리를 다 하게 된다. 속마음이 흘러나오자 지석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가렸다.

“그냥… 좀 많이 지친 것 같아.”

찌푸린 눈가를 덮은 손등 위로 단단한 핏줄이 섰다.

“오히려 같이 있는 게 더 괴로워. 그래서 걜 자꾸 피하게 돼. 얼굴을 보면 이젠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

“우습지, 고작 이런 식으로 살 거면서 그렇게 아등바등 결혼했다는 게.”

좀 떨어져 있으면 나아질까, 지석이 한숨을 내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묵묵히 이야기를 듣던 김현진은 지석의 손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렸다. 괴롭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차라리 제가 대신 힘들었으면 좋겠다.

지쳤다는 그의 말처럼, 한지석은 감정이 모두 소진된 사람처럼 암울해 보였다. 보고 있기가 이토록 안쓰러운데 아무 능력도 없는 자신은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김현진은 위로하듯 지석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홀린 듯이 매끈한 입술을 향해 고개를 들이밀었다.

턱.

입술이 닿기 직전 한지석은 다급히 현진의 어깨를 붙잡았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형.”

현진은 아랫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도로 주워 담을 순 없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는 재차 입술을 부딪쳐왔다. 막무가내로 들이민 얼굴은 지석의 턱 어딘가에 닿았다.

“김현진!”

참지 못한 지석이 이번엔 어깨를 세게 밀쳤다. 술이 완전히 깨버렸는지 얼굴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안 돼, 하지 마.”

“왜요, 난 왜 안 돼요?”

“우리 당분간 안 보는 게 좋겠다.”

“형!”

다급하게 지석의 옷을 붙잡았지만, 그는 손을 뿌리치고 냉정하게 자리를 떠났다.

현진은 차마 그 뒤를 따라가지 못하고 벤치를 지켰다. 거절당했다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

그날은 평소보다 몸이 늘어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딘가 낯설지 않은 증상에 간이 검사 키트를 꺼내 피검사를 해보니 호르몬 수치가 확연하게 높았다. 러트가 임박한 것이다.

지석은 곧바로 비서실에 연락을 넣어 잡혀 있던 일정을 모두 미룬 뒤 5일간 휴가를 냈다. 러트 때마다 이용하는 호텔을 예약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급한 결재 건들을 우선으로 처리하느라 바쁜 가운데,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부르릇 진동하며 빛을 밝혔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집어 든 한지석은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오늘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어요?]

김현진의 문자였다. 부담스러운 부탁에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요즘 이런 식의 연락이 부쩍 늘었다.

하지만 지석은 그날 이후로 현진을 대놓고 피하고 있었다. 문자 역시 못 본 척 넘긴 적이 여러 번이다.

‘걔 형 좋아해.’

‘나 대신 어울리는 상대치곤 수준이 너무 낮은 거 아니냐? 취향이 원래 이렇게 후졌어?’

‘제대로 정리해. 더 이상 내 귀에 추잡한 소문 들리게 하지 말라고.’

우선경이 툭툭 던져댔던 말들이 온갖 상념과 뒤섞여 머릿속을 떠돌았다.

적어도 자신의 마음이 확고하니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오히려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 난감한 오해가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가 돼 버렸다.

[미안. 다음에 보자. 내가 연락할게.]

문자에는 적당히 답장을 적어 보냈다.

이번에도 역시 비겁하게 만남을 피했다. 사실은 그 애와 대면하고 싶지 않았다. 맞닥뜨리게 되면 벌어질 상황이 두려웠다. 현진이와는 언제까지나 형과 동생의 관계로만 남고 싶었다.

조만간 제대로 얘기를 하긴 해 봐야겠다 생각하며 핸드폰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지석은 손등으로 이마를 짚었다. 체온이 점점 올라가는지 몸이 후끈하다. 서랍을 열어 비상용으로 보관해 두던 억제제 두 알을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모니터 화면에 얼핏 비치는 눈동자는 살짝 노르스름해지려 하고 있었다.

김현진이 호텔까지 찾아올 줄 정말로 예상치 못했다.

고 비서인 줄 알고 문을 열어 준 지석은 객실 앞에 서 있는 김현진을 보고 말 그대로 얼음처럼 굳어 버렸다.

“네가 여길 어떻게.”

“형… 혀엉.”

한지석의 얼굴을 확인한 김현진은 일순간 긴장이 풀려 무릎을 휘청댔다. 급하게 벽을 짚더니 마른 몸을 덜덜 떨며 천천히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너 꼴이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산발이 된 머리, 온통 까지고 쓸린 손과 무릎, 맨발에 대충 끼워 신은 삼선 슬리퍼는 그나마 한 짝밖에 없었다. 꼭 어디서 도망쳐 나온 행색이었다.

“흐윽… 집에 쳐들어와서 까… 깡패들이 억지로 끌고 갔는데…. 몰래 도망쳤어요. 저 또, 흐으, 잡히면 어떻게 해요.”

“울지 말고 천천히 말해 봐. 어딜 끌고 가?”

“흐… 술집이요. 몸 팔아서어… 허엉, 몸 파는 술집 가서 돈 갚으래요. 형, 저 진짜 가기 싫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억제제를 먹어 느릿하게 돌아가는 머리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석은 입술을 씹다가 작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사채업자들이 애를 잡아다가 술집에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건가?

“일단 진정해 봐. 경찰에 신고는 했어?”

“소용없어요, 경찰은 하나도 도움 안 돼요.”

김현진은 상처가 그득한 손등으로 젖은 눈가를 닦았다. 얼마나 정신없이 구르고 뛰었는지 얼굴과 손이 온통 거무튀튀했다. 한지석은 곤란한 듯 머리를 이리저리 헝클었다.

“현진아. 미안한데, 형 러트야. 상황이 이래서 오래 얘기 못 해.”

“…네.”

“오늘 억제제 먹었니?”

현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서러운 눈물을 삼키느라 작은 흉곽이 쉼 없이 들썩거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지석은 할 수 없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심 끝에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일단, 잠깐만 있어 봐.”

그는 객실 문을 조금 열어 둔 채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안에 난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열어 두고 곳곳에 페로몬 소취제를 듬뿍 뿌렸다. 이미 러트가 시작된 상태였지만 미리 억제제를 먹어 둔 덕분에 어느 정도 페로몬 제어는 가능했다. 아주 잠깐 정도라면 문제없을 것이다.

한지석은 소파 위에 던져 놨던 재킷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근처에 대기 중인 고 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방으로 올라오라 지시했다. 잠시 후 고 비서가 도착하자 그제야 김현진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거기 아무 데나 앉아.”

어색하게 서 있는 현진에게 소파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가 쭈뼛대며 걸음을 옮기는 걸 보곤, 미니바로 가 작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물과 주스를 꺼내 현진에게 건넸다. 그리곤 최대한 멀찍이 거리를 벌리고 물러났다.

“…….”

소파에 앉아 있던 현진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기대서서 팔짱을 끼고 있는 한지석이 정면에 보였다. 티 나지 않게 슬쩍 눈을 굴렸다.

목 아래까지 열려 있어 활짝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맨살이 들여다보였다. 현진은 저도 모르게 입에 고인 침을 꿀떡 삼켰다.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 살짝 노르스름해진 눈동자가 차례대로 눈에 들어온다. 러트라더니 평소보다 흐트러진 형의 모습은 뭔가 새롭고 신기했다.

“뭐가 어떻든 일단 경찰에 신고해. 저기 계시는 비서 아저씨가 잘 도와주실 거야.”

“네.”

“당장 가 있을 곳은 있어?”

현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집구석은 아마도 난장판이 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사라진 자신을 찾느라 조폭들이 아직도 그 집 앞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까지 들자 등골이 흠칫 떨려왔다. 김현진은 덜컥 겁이 나 좁은 어깨를 웅크렸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올라왔어? 내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알았고.”

“오늘 퀵으로 봉투를 받았어요. 형 5일 동안 호텔에서 지낼 거라고, 혹시 도움 필요하면 이쪽으로 오라고….”

김현진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가 소파 테이블에 올려둔 건 우습게도 2201호 카드였다.

누가 이런 걸…. 지석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러트를 보내려고 예약해 둔 방으로 오메가를 보냈다는 건 어떻게든 불미스러운 일을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대놓고 함정을 파 둔 것과 다름없었다.

“고 비서님.”

“네.”

“객실 키 어떻게 유출된 건지 당장 알아봐 주세요. 그리고 스탠다드 룸도 하나 예약해 주시고요. 기간은 넉넉하게 한 달 정도로 잡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지시를 받은 고 비서는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는 통화를 위해 잠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덧 거실에는 한지석과 김현진 둘만 남았다.

한지석은 오른손으로 입가와 코를 덮었다. 손바닥 안 좁은 공간은 금세 덥고 습한 숨으로 가득 찼다.

슬슬 버티는 것도 한계가 온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완전히 페로몬을 억누르는 게 힘들었다.

이대로 갔다가는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질 게 뻔했기에 지석은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려 했다. 창가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우자 김현진이 엉거주춤 따라 일어섰다.

“넌 여기서 기다려. 고 비서 나오면 다른 곳으로 데려다줄 거야.”

“형!”

그대로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순식간에 달려 나온 현진이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찌나 온 힘을 다해 매달리는지 무게를 못 이기고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김현진, 쫓겨나고 싶지 않으면 손 놔.”

“형, 나 그냥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미쳤어? 말이 되는 소릴 해.”

엄한 질책에도 현진은 스스로 손깍지를 끼우며 지석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절대로 놓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다.

“형, 러트 나랑 보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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