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 수술 동의란에 서명 부탁드릴게요.”
우선우가 빠르게 펜을 움직였다. 그는 곁눈질로 한지석을 살폈다.
한창 러트가 진행 중인 알파는 억제제를 과다 복용해 상태가 온전치 않아 보였다. 동의서에 서명을 마친 우선우는 한지석을 구석으로 데려갔다.
“어떻게 된 거야. 선경이 임신했었어?”
“그랬는데…. 한 달 전쯤에… 지운 줄 알았어요.”
“너희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거듭된 추궁에도 한지석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한참이나 숨을 몰아쉬던 그는 축축이 젖은 얼굴을 문질렀다. 붉게 충혈된 눈을 치켜들었다.
“설마 스스로 뛰어내린 겁니까?”
“확실한 건 아직 몰라. 이따가 경찰이랑 얘기해 봐야지. 언뜻 들은 바로는 납치 강도 가능성도 있다는데…. 하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정말 말도 안 돼.”
결국 우선우도 참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자신까지 무너지면 그야말로 초상집 분위기가 될 거 같아 기를 쓰고 참아왔는데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때 안쪽에 있던 병상 커튼이 젖혀지더니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났다.
대여섯 명의 의료진들이 침대를 호위하듯이 둘러싼 채 이동하고 있었다. 한지석은 반사적으로 그들을 따라갔다.
우선경은 겹겹이 쌓인 의료진에 가려져서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보이는 신체 부위들도 붕대와 보호대에 뒤덮여 있었다. 얼마나 다친 것인지, 상태가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데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간호사 여럿이 한지석을 막아 세웠다.
“죄송합니다! 여기서부터는 따라가실 수 없으세요!”
“보호자분 뒤로 물러나 주세요!”
이송 침대를 태운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문이 닫혔다. 모두가 떠난 자리엔 진한 약품 냄새와 피비린내만 남았다.
지석은 굳게 닫힌 엘리베이터를 바라보다 깊게 허리를 숙였다. 여러 번 숨을 몰아쉬다 결국 얼굴을 감싼 채 주저앉았다.
한차례 폭풍우가 몰아쳤던 응급실은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긴박했던 분위기는 원래의 차분한 상태로 돌아갔고, 남은 사람들은 엉망이 된 자리를 조용히 수습하기 시작했다.
사용한 기계와 의약품들이 차례대로 정리되고 피 묻은 침대 커버와 거즈들이 폐기물 봉투에 담겼다.
누군가에겐 삶의 지축이 무너지는 사건이지만, 응급실에선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저…. 이게 바닥에 떨어져 있어서요. 아무래도 환자분 것 같은데.”
응급실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는 남자에게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그녀는 비닐장갑을 낀 채 한지석에게 작게 빛나는 무언가를 건넸다.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한지석은 제 손안에 들어온 익숙한 징표를 조심스럽게 움켜쥐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얼굴이 다시 축축이 젖어 갔다. 눈물을 삼키느라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 살펴본 반지엔 검은 피가 말라붙은 흔적들로 가득했다. 지석은 엄지손톱으로 더러워진 핏자국들을 긁었다.
손톱 밑이 까맣게 변해 갈수록 반지는 깨끗해졌다. 비로소 안쪽에 새겨 둔 글귀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선경 珗耿 나의 유일한 낙원.
“환자분의 경우 심각한 다발성 외상이 있었습니다. 전신에 골절은 물론이고 출혈과 장기 손상도 극심했구요. 무엇보다 두부 외상이 가장 심했는데요. 이게… 뇌압이 가라앉질 않아 아직 수술 부위를 닫지 못한 상태입니다. 일단 중환자실에서 상태를 지켜본 뒤에 호전되면 그때 다시 수술실로 이동해서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자가 땀에 흠뻑 젖은 집도의가 지친 목소리로 수술 결과를 전했다. 장장 13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다.
비록 완벽하게 매듭을 짓진 못했지만 그래도 목숨은 살렸다.
의사는 병원까지 살아서 온 것도, 수술을 버텨낸 것도 거의 기적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결과를 기다리던 가족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살아났구나, 그제야 긴장을 한시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사흘 뒤, 집중 치료실에서 치료를 받던 우선경은 뜻밖의 내출혈로 한 차례 더 응급 수술을 받았다. 이후 두 번의 심정지가 찾아왔고 한 달이 넘도록 중환자실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후부터는 점점 회복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퉁퉁 부어 얼굴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상태가 호전되자 피멍과 부기가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길 수 있었다. VIP 병실로 자리를 잡은 뒤부터는 본격적으로 회복에 총력을 기울였다.
빡빡 밀린 머리카락은 다시 촘촘하게 채워졌다. 어느새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길게 자랐다. 멍으로 뒤덮였던 피부는 뽀얗게 살이 차오르고, 철심을 박아 넣었던 다리와 오른팔은 이제 깨끗하게 뼈가 붙었다.
계절이 두 번 바뀔 동안 우선경의 몸은 착실하게 나아 가고 있었다.
그러나 몸의 주인은 단 한 번도 깨어나질 못했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병실 문이 열렸다. 짙은 남색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익숙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오셨어요! 어머,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병실을 지키던 간병인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가 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진행되는 재활 치료 시간이었다.
물리 치료사들은 어깨에 메고 있던 까만 스포츠 백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손부터 씻었다.
거품 비누로 손톱 밑까지 깨끗이 닦고, 종이 타월로 물기를 꼼꼼히 말렸다. 마지막으로 손소독제를 바르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매일 똑같이 하다 보니 이제는 순서가 일련의 과정처럼 몸에 뱄다.
“오늘은 좀 어때요?”
“똑같으시죠.”
“어서 가서 식사하세요. 오늘 구내식당 메뉴 좋아요.”
“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수고하세요.”
바톤을 넘겨주듯이 간병인이 침대 옆을 비워 준다. 그녀가 꾸벅 인사하며 병실을 나가자 물리 치료사들은 익숙하게 몸을 풀고 준비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우선경 씨. 재활 치료 시작하겠습니다.”
인사에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환자는 늘 그렇듯 평안하게 잠들어 있다.
물리치료사들은 정해진 루틴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순서로 척추와 관절, 근육과 인대들을 마사지하고 풀어 준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환자를 대신해서 몸이 굳지 않도록 재활을 도와주고 있었다.
경력 4년 차 서윤호는 우선경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옆으로 눕혔다.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길게 뻗은 목빗근 뒤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움푹 파인 곳을 지압하듯 꾸욱 눌렀다.
“머리 잘랐나 보네요.”
“참 지극정성이야. 재벌은 식물인간이 돼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환자는 도무지 의식이 없는 사람 같지 않았다. 스스로 호흡도 가능했고, 외관은 늘 깔끔했다.
간병인들은 아침, 저녁으로 우선경을 씻겼고 좋은 것을 발라 줬다. 머리와 손톱은 단 한 번도 지저분하게 놔둔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깨끗했고, 늘 좋은 냄새가 났다.
“읏챠!”
침대 머리맡에 앉아 있는 12년 차 물리 치료사 배동현이 양쪽 겨드랑이에 손을 끼운 채 힘주어 우선경을 끌어올렸다. 인형처럼 늘어진 몸은 힘없이 따라 올라와 배동현에게 기대 안겼다.
배동현은 능숙하게 팔을 제 목에 감고 옆구리를 숙였다. 마른 몸이 그를 따라 같이 숙여졌다. 두 사람은 한 몸처럼 엮여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서윤호는 가방 속에서 마사지 젤을 꺼냈다. 오늘은 온열 찜질 젤을 쓰는 날이다.
스트레칭을 끝낸 선배가 우선경을 침대에 눕히자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올라와 자리를 잡았다. 손바닥에 젤을 듬뿍 짜내고 로션을 바르듯 두 손을 비볐다. 금세 후끈후끈한 기운이 올라왔다.
얇은 환자복을 걷어 올리고 마사지를 시작했다. 근육은 금세 풀어지기 시작했고, 맨살은 젖은 손바닥에 차지게 들러붙었다.
원래 오메가 몸은 다 이런가? 찹쌀떡처럼 말캉말캉한 감촉은 매번 만져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서윤호는 잠시 손을 멈추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제일 하기 힘든 게 남았다.
그는 가느다란 종아리를 제 어깨에 걸쳤다. 다리를 붙잡고 무게를 실어 조심스럽게 눌렀다. 접힌 허벅지가 선경의 가슴 쪽으로 바짝 붙었다. 덩달아 서윤호의 몸도 가까워진다. 하체가 비벼질 듯 닿고 있었다.
“어허, 윤호야. 좋은 생각 해라, 좋은 생각.”
“아우 씨, 깜짝이야. 형님. 놀리지 마십쇼.”
“새꺄,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지. 너도 수갑 차고 싶어?”
땀을 뻘뻘 흘리던 서윤호는 천장에 달린 CCTV를 힐끗 쳐다봤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진땀이 났다. 서윤호는 최대한 엉덩이를 뒤로 빼며 아랫도리를 간수했다. 흡사 플랭크를 하는 자세에 체력이 배로 들었다.
“흐읍! 최대한 안 닿게 하고 있습니다.”
“조심해라. 꽈추라도 스쳤다간 그대로 구속이야.”
농담처럼 들리지만 뼈가 실린 말이었다. 실제로 한 달 전,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