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이전에 담당하던 치료사가 의식이 없는 우선경을 상대로 유사 성행위를 벌이다 적발된 것이다.
상대는 열성 알파였고, 그는 자신의 형질을 숨긴 채 베타 행사를 하고 있었다. VIP 병실이 다른 곳보다 좀 더 폐쇄적이라는 점을 이용해 대범한 범행을 저질렀다.
귀하신 분을 건드린 대가는 혹독했다. 온갖 혐의가 붙었고 가중 처벌까지 더해져 7년이라는 최고 형량을 받았다.
이후 병실 곳곳엔 폐쇄회로 카메라가 설치됐다. 영상을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인력까지 배치됐다.
불미스러운 일에도 재활 치료를 멈출 수는 없었기에 우재경은 직접 치료사를 골랐다. 그녀의 엄격한 면접을 통과한 것이 바로 이 두 사람이었다.
베타다 보니 당연히 별 탈 없을 줄 알았는데, 우선경이 너무 예쁜 게 문제였다. 어쩔 수 없이 밀착되는 자세에 아랫도리는 가끔씩 고장이 나 주인의 뜻과 다르게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서윤호는 속으로 염불을 외고 하나님을 찾았다.
“어? 선배님, 방금 손가락이 좀 움직이지 않았습니까?”
“뭐, 어디 신경 잘못 누른 거 아냐?”
“아니요.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요.”
굳어 있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마사지해 주던 서윤호는 잠시 손을 내려놓았다. 미간을 좁히고 집중해서 움직임을 관찰했다. 진지한 분위기에 덩달아 배동현까지 숨죽이며 지켜봤다.
움직이긴커녕 미동도 없었다. 한참을 주시하던 배동현은 에이씨, 그럼 그렇지. 하고 짜증을 내며 서윤호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놀랐잖아, 인마!”
“이상하다. 분명히 움찔거렸는데.”
머쓱함에 뒤통수를 문지르던 서윤호는 슬쩍 우선경의 얼굴로 눈길을 돌렸다. 새근새근 작은 숨소리를 내는 오메가는 여전히 인형처럼 잠들어 있었다.
***
“응, 여보. 나 지금 병원이야. 선경이? 잘 자고 있지. 살이 좀 빠진 거 같길래 영양제 달아 달라고 했어. 지금은 여보가 준 꽃 옆에 놔 주려고. 뭐? 병에 넣기 전에 줄기를 잘라야 된다고? 사선으로? 어… 뭔 말인지 전혀 모르겠는데 일단 해볼게요. 응, 응. 알겠어.”
우선우가 한참을 통화에 집중하는 사이, 침대에 누워 있던 이가 손을 움찔 떨었다. 간헐적으로 틱, 틱,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어느 순간 선경은 홀린 듯이 눈을 떴다.
대체 얼마나 잔 걸까. 아주 오랜만에 맞닥뜨린 햇빛에 눈동자가 시큰거렸다. 시야가 온통 뿌옇고 눈부시다. 선경은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눈부심에 적응했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목이 말라 힘겹게 침을 삼키는데 깔깔한 혓바닥과 입천장이 느적느적 달라붙는다. 입안이 온통 사막 같았다.
무감각한 손가락에 힘을 주고, 무릎을 구부렸다. 그렇게 스스로 몸을 움직이는데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낯선 천장을 바라보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힘겹게 고개를 눕혔다.
꽃다발을 풀어헤치고 있는 우선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흐드러지게 핀 꽃을 한 움큼 집어 들고 일일이 가시와 이파리를 다듬느라 바빴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콧노래까지 흥얼대느라, 선경이 침대에서 부스럭거리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선우는 처음 하는 꽃꽂이에 완전히 심취해 있었다.
“…혀…. 엉.”
오랫동안 발성을 쉰 탓에 목소리가 쉽게 나올 리 없었다. 이유를 모르는 우선경은 무겁게 늘어진 팔을 들어 올려 목을 문질렀다. 목을 다친 건가 싶었다.
다시 한번 꿈지럭 몸을 움직였다. 팔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고 둔한 다리와 등허리도 꿈틀거렸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매일 스트레칭과 마사지를 받았던 효과가 조금씩 나타나고 있었다. 굳어 있던 몸은 생각보다 금방 움직임에 적응했다.
두 손으로 딱딱한 침대 바닥을 짚은 채 천천히 허리를 일으켰다. 기운이 없었지만 그래도 얼추 일어나 앉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선경은 제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보아도 병원이었다.
내가 왜 여기 있지? 아팠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기억이 안 났다. 손등에 꽂힌 링거 줄을 따라 올라간 시선이 넓은 병실 안을 천천히 훑었다.
때마침 꽃병을 완성한 우선우가 뒤를 돌았다. 본인의 작품이 마음에 쏙 드는지 우쭐대던 남자는 불현듯 선경과 눈이 마주쳤다.
시체처럼 누워 자던 동생이 멀쩡히 일어나 앉아 있는 걸 본 그는 제자리에 덜컥 굳어 버렸다.
“히익!”
우선우는 귀신이라도 본 듯이 비명을 질렀다. 집어던진 꽃병이 그대로 수직 낙하했다. 박살 난 유리가 온 사방으로 튀었다.
***
갑작스러운 호전 소식에 VIP 병실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수많은 의료진이 들락거렸다. 의식을 되찾다 못해 반듯하게 앉아 있는 우선경을 보며 하나같이 놀라워했다.
대체 왜 이렇게 호들갑인가 싶었는데, 옆을 지키던 우선우가 말하길 6개월이나 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경은 자신의 상태가 예상보다 심각했다는 사실을 듣고 조금 놀랐다.
동생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둘째 재경도 달려왔다. 병실로 들이닥치자마자 인사도 없이 선경의 두 뺨을 붙잡고 이리저리 살폈다.
얼마나 놀랐으면 늘 냉정하고 이성적인 우재경조차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누나 좀 봐봐. 어디 아픈 곳은 없어? 머리는? 어지럽지는 않고?”
“나 멀쩡해. 소란 떨 거 없어. 뒤에 같이 온 사람들은 뭐야? 일하다가 온 거야?”
병실 문 바깥엔 차마 들어오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우재경을 보좌하는 수행원들이었다. 중요한 외부 행사 도중에 뛰쳐나온 바람에 일정을 다시 조율하느라 덩달아 정신이 없었다.
재경의 눈에선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녀는 두 손에 쏙 들어오는 조막만 한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며 다시 한 번 더 물었다.
“정말 괜찮은 거지? 우리 얼굴 다 알아보는 거지?”
“우재경 씨, 우선우 씨. 할아버지 성함은 우 경자 환자. 아빠 엄마 기일은 4월 23일.”
“…….”
“예전이랑 달라진 것도 말해 줘? 선우 형은 살이 좀 쪘고, 누나는 머리 잘랐네. 단발 잘 어울려. 긴 머리보다 낫다.”
재경은 안도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이 까칠한 말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또박또박 제 할 말 다 하는 막내를 본 재경은 조금 울컥했는지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첫째 선우를 턱짓으로 불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보고해 봐.”
“뭐… 지금 누구한테 얘기하는 거야. 설마 나야?”
“그럼 여기 누가 있어?”
“나는 또 네 비서한테 하는 소린 줄 알았지.”
저건 오빠를 꼭 아랫사람 대하듯이 부려먹어, 우선우는 팔짱을 낀 채 어이없다는 듯 콧방귀를 뀌면서도 순순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아니…. 내가 아까 병원에 두 시쯤 왔어. 그때까지만 해도 평소랑 똑같았거든? 오후에 영양제 달아 줄 때만 해도 특별한 건 없었단 말이야. 그런데 잠깐 꽃병 갈아 주는 사이에 애가 깨어난 거야. 내가 진짜 얼마나 놀랐는 줄 아냐? 나는 진짜 헛것 보는 줄 알았다고.”
“갑자기 깨어나는 게 말이 돼? 그 전에 무슨 전조 증상이 있었을 거 아니야.”
“내가 의사냐? 그걸 어떻게 알아?!”
“옆에서 병간호한다는 사람이 그것도 몰라보면 어떻게 해?!”
재경이 눈을 부라렸다. 깨끗한 흰자위가 번뜩거렸다. 우선우는 저거 또 눈 까뒤집는다며 중얼대면서도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누가 봐도 서열이 뒤바뀐 듯 보였지만 이 집에선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던 우선경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싸우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설명 좀 해 주면 안 될까? 나 어쩌다 병원에 있는 건데. 의사들은 왜 그렇게 많이 왔다 간 거야?”
“…….”
“…….”
두 남매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서로 눈치만 보며 미루다 결국엔 우재경이 나섰다. 그녀는 짧아진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추락 사고가 있었어.”
“사고?”
“공사장 건물 아래에서 발견됐는데 상태가 꽤 심각했어. 다행히 바로 구조가 돼서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는데… 만약 조금이라도 늦게 발견했으면 아마 손도 못 써 보고 너 보냈을 거야.”
우재경은 최대한 감정을 덜어내고 사실만 요약해 전달했다.
이야기를 듣던 우선경은 뒤통수를 조심스레 더듬었다. 동그스름한 머리 한가운데 유독 머리카락이 비어 있는 부분이 있었다. 두피에 남아 있는 상처의 흔적이 선명했다.
머리통이 깨졌다더니 정말이구나.
부드러운 새살이 돋아난 부위를 손가락으로 덧그리며 크게 다쳤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인지했다.
“대체 어쩌다가 떨어진 거야? 내 실수였어?”
“…….”
핵심을 찌르는 질문에 누구도 선뜻 대답을 못 했다. 이번에는 선우가 나서서 설명했다.
“처음엔 경찰에서도 단순 강도 사건이라고 추정했는데, 아무래도 계획된 범죄인 것 같아. 사건 며칠 전부터 선경이 널 노리고 따라붙었던 정황이 발견됐어. 아직 범인을 잡진 못했지만… 계속 수사 중이야.”
“걱정하지 마, 곧 잡을 거야.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몸만 챙기면 돼.”
둘은 앞다퉈 동생을 안심시켰다. 심각한 얼굴을 하며 계속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를 되풀이했다. 오히려 당사자는 사고 당시의 기억이 전혀 없어 태연하기만 했다.
심각했다던 상처들은 깨어나 보니 이미 다 나아 있었다. 걷는 건 아직 무리였고 사고 후유증도 지켜봐야 할 문제였지만, 지금 당장은 크게 불편함이 없었다.
“나 때문에 다들 맘고생 많이 했겠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
하지만 사고를 기억을 못 한다고 해서 가족들이 겪었을 심적 고통을 가늠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특히 형과 누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사고사에 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사고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