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하아… 그래도 깨어나서 다행이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야.”
재경은 핼쑥해진 뺨을 비비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대로 동생이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담당의가 병원에서 더 해 줄 게 없다며, 의식을 되찾는 건 이제 온전히 환자에게 달렸다는 얘기를 한 게 불과 석 달 전이었다. 앞으로 이 상태가 일 년이 될지 십 년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아득바득 동생을 돌봤다. 돈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고 최고의 실력을 갖춘 사람들만 옆에 붙였다. 바쁜 시간을 쪼개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들러 직접 병간호를 했다.
그렇게 관심과 애정을 쏟은 덕분인지 결국엔 깨어났고, 우선경은 조금 기운이 없어 보일 뿐 다시 예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잠시 감회에 젖어 있던 재경은 문득 잊고 있던 누군가가 떠올랐다. 그녀는 뒤돌아 선우에게 물었다.
“지석이는? 한 이사도 알고 있어?”
“어, 너한테 알린 다음에 바로 전화했지. 가장 빠른 비행편 알아본다던데.”
“지금 인수 합병 건으로 미국 가 있지 않아? 올 수 있대?”
“와야지, 선경이가 깨어났는데 당연한 거 아냐? 야, 아무리 둘 사이 박살 났어도 그 정도는 하는 게 예의야.”
재경의 의견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득실을 따지는 눈빛은 진지했다.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인지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죄 없는 아랫입술을 곱씹었다.
“아니야, 그래도 그 계약… 중요한 거야. 어차피 우리가 옆에서 챙길 거니까 한 이사한테는 일 끝내 놓고 오라고 해.”
“우재경 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매정해? 한지석 아직 법적 배우자야.”
“그 자식이 지금 온다고 해서 크게 도움 될 것도 없어! 차라리 계약이라도 마무리하고 오는 게 낫지!”
두 남매는 목소리를 키우며 싸웠다. 우선경은 턱을 괸 채 그 모습을 조용히 관망했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한 이사는 대체 누구고, 배우자는 다 뭐야.
물어보고 싶었지만, 누나와 형의 설전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선경은 그저 얌전히 앉아 상황이 잠잠해지길 기다렸다.
결국 재경은 자신이 전화해서 말하겠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병실을 나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행원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부회장님, 일행 중 유독 목소리가 굵은 남자가 우재경을 불렀다. 선경은 잘못 들었다 생각했다.
“누나 말이야. 회사에서 벌써 뭐 돼? 수행원들이 저렇게 따라붙을 정도야?”
“재경이? 그냥 똑같은데? 올해부터 좀 바빠지긴 했지. 부회장이….”
그때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문이 열리더니 휠체어를 밀고 들어 온 간호사가 꾸벅 인사한다. 뒤이어 회색 점퍼를 입은 남자들이 무언가를 힘겹게 운반하기 시작했다.
병실 안으로 페로몬 청정기 5대가 들어오고 있었다
곳곳에 말뚝처럼 세워지더니 설치를 끝낸 페로몬 청정기가 힘차게 가동하기 시작했다. 저게 왜 저렇게 돌아가지? 선경은 빨간 불이 들어온 기계를 멍하니 쳐다봤다.
옆에서 차트를 기록하던 간호사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경 환자분 특수형질과 진료 먼저 시작하겠습니다. 10분 뒤 이동하실게요.”
“특수형질과요?”
선우는 걱정 말라며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는 다정한 설명을 덧붙였다.
“괜찮아 선경아. 페로몬에는 크게 문제 없을 거야. 그냥 조절이 좀 안 되는 것뿐이니까 일단 검사 한번 받아 보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페로몬이 어딨어?”
뜬금없는 페로몬 타령에 선경은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왜? 아예 산부인과도 가 보라 그러지? 중얼거리며 보태는 소리에 우선우는 당황한 듯 입술을 뻥긋거렸다.
“얘가 뭐라는 거…, 아니 잠깐만. 우선경. 너 형질이 뭐야.”
“베타잖아.”
“…큰일 날 소리 하네. 너 기억 안 나? 오메가로 발현한 거?”
“내가 오메가라고?”
우선경은 형이 장난치는 거라 생각했는지 웃음을 터트렸다. 혼자 피식피식 바람 꺼지는 소리를 내뱉고 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얼굴에선 웃음기가 가셨다. 우선우는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줄곧 베타였다. 하지만 농담으로 여기기엔 주변에 보이는 페로몬 청정기와 간호사가 한 말이 무척 신경 쓰였다.
“…진짜야?”
“진짜야.”
“왜? 어쩌다가? 혹시 다쳐서 그렇게 된 거야? 사고 후유증 같은 건가?”
“벌써 6년이나 됐잖아. 오메가 발현한 지.”
6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선경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오른손을 펼쳤다. 부족한 손가락을 하나 더해 가며 나이와 연도를 맞춰봤다.
“6년이나 됐다고? 그럼 내가 14살에 오메가로 발현했다는 소리잖아. 그게 말이 돼? 나 고3 때도 베타였어.”
“…….”
선우의 표정이 이상했다. 환장하겠네, 딱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고 있었다. 눈치 보며 서 있던 간호사의 얼굴도 비슷했다. 덩달아 불안해지는 표정이었다.
우선우는 마른침을 닥닥 긁어모아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우선경, 너 지금 몇 살이야.”
“스무 살.”
“…….”
헛숨 들이켜는 소리가 선경의 귀에까지 들렸다.
“…왜 그래. 사람 불안하게.”
“응, 아냐. 별거 아냐. 잠깐만.”
우선우는 그대로 일어나 병실 문을 열었다.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통화에 열중하고 있는 동생이 보였다. 그는 허옇게 질린 얼굴을 문밖으로 내놓더니 복도 끝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우재경! 비상!”
***
“…어. 그러니까 그게 말이죠.”
신경외과 교수는 난처한 듯 눈썹을 문질렀다. 등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VIP들이 모두 자신만을 주시하고 있는 이 상황이 부담스럽기만 했다. 그는 헛기침하며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예약되어 있던 특수형질과 진료는 잠시 미뤄 두고, 급하게 신경외과를 찾았다. 아무래도 머리를 심하게 다쳤던 탓에 내심 걱정이 컸는데,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의사는 모니터를 좀 더 보기 편한 방향으로 돌렸다. 그는 볼펜 끝으로 조금 전 영상의학과에서 촬영한 우선경의 뇌 사진을 가리켰다.
“CT와 MRI 상으론 특별히 이상 소견이 보이진 않지만, 현재 환자분의 상태로 봐선 심인성 기억상실증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최근 6년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인 겁니다.”
“어떻게 해야 돌아올까요?
“기억상실증은 아직까진 특별한 치료 방법이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돌아오길 기대할 뿐이죠. 영구적으로 기억이 소실되는 경우도 있고, 운이 좋으면 복구되는 케이스도 ….”
“세상에 치료 방법이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고칠 수 없다는 이야기에 재경은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드세게 날뛰는 알파 페로몬에 의사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지… 진정하시고요. 다행히 인지, 사고 능력에는 이상이 없어 보입니다. 검사 결과도 정상으로 나왔고요. 이건 치매처럼 기억이 소실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기억이 안 나는 건 얼마든지 학습을 통해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며 살진 않는다. 잊은 부분이 있다면 의사의 말처럼 공부해서 다시 알아 가면 되는 거였다.
다만 6년 동안 우선경이 직접 느끼고 겪었던 감정과 당시의 기분들은 모두 공백으로 남겨 둬야 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시는 게 영국 유학 준비하시던 때라고 하셨죠?”
의사의 질문에 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까만 눈은 초점이 반쯤 나가 있었다.
“일단은 지켜보시죠.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실 것 없어요. 일단 몸 회복이 먼저고, 뭐든지 천천히 채워 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알겠습니다. 선경아, 너는 하나도 걱정하지 마. 우리가 어떻게든 도와줄게. 사는 데 전혀 지장 없을 거야.”
“…아니 지금 문제가 심각한데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보고 오메가라잖아.”
형과 누나에게 꽁꽁 둘러싸인 선경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가렸다.
기억 상실이고 나발이고 오메가가 됐다는데 아무도 이 부분에 있어선 신경을 써 주지 않는다. 오직 당사자만 심란해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먼저 하면 되나요?”
재경의 묻자 주먹으로 코와 입가를 가리고 있던 의사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었다. 숨쉬기가 힘든지 아까부터 구호흡을 하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의사는 알파였다.
“일단… 특수형질과를 빨리 가 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환자분 페로몬이 전혀 통제가 안 되고 있네요.”
두꺼운 채혈 주삿바늘이 팔꿈치 안쪽 살을 푹, 찔렀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투명한 보틀엔 검붉은 피가 힘차게 차올랐다.
손이 빠른 간호사는 연달아 통을 갈아 끼웠다. 우선경은 여전히 초점이 나간 눈으로 그 과정을 지켜봤다. 그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충격에는 정도가 있다.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있고 자꾸 부정하게 되는 것이 있었다.
지금 우선경에겐 기억 상실이 전자였고, 오메가 발현이 후자였다.
“내가 오메가라니….”
차라리 고자가 됐다고 해라. 아직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우선경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넋두리 같은 혼잣말을 내뱉고 한숨을 내쉬길 반복했다. 우선우와 우재경은 팔짱을 낀 채 나란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몇 년 전 오메가로 발현됐을 당시 반응이 딱 저랬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말을 하는 게 신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