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03화 (103/127)

#103

마침 자리를 비웠던 특수형질과 전공의가 손에 결과지를 들고 돌아왔다. 다행히 검사 결과가 나쁘지 않은지 그는 밝게 웃으며 진단을 내렸다.

“발현 초기 증상이랑 비슷하다고 보시면 되겠네요. 현재 환자분이 페로몬을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보통 이런 경우 억제제를 처방해 드리는데, 우선경 씨 같은 경우엔 유산하신 지 얼마 안 되셨기 때문에 호르몬 계열 약은 최대한 피하시는 게 좋아요. 일단은 가능한 격리된 상태로 다른 치료부터 받으시고, 차차 연습을 통해 페로몬 조절하시는 법을 배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유산이라는 말까지 나오자 우선경은 고개를 젖히며 웃었다.

분명 웃음소리는 나오는데 얼굴은 졸도하기 직전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더 이상 충격적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갈수록 가관이다.

그 와중에 할 건 다 했잖아? 남자랑 섹스도 하고 애도 만들었다고? 이쯤 되니 과거의 나는 대체 무슨 인생을 살아온 건가, 심히 궁금해졌다.

얼굴을 마른세수하듯 거칠게 문질렀다. 그러더니 또 대뜸 웃음을 터트린다.

정신 나간 행동에 지켜보던 우선우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한 자리 건너 앉아 있는 재경에게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애가 완전히 맛탱이가 갔어.”

“내버려 둬, 예전에도 그랬잖아. 금방 괜찮아질 거야.”

우재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녀는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지금 재경의 머릿속엔 어떻게 하면 우선경을 완벽하게 복귀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만 가득했다.

***

몇 가지 추가 검사를 더 받고 나서야 병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우는 소파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곳엔 구겨진 휴지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선경이 있었다. 허리를 굽히자 연이은 충격으로 멘탈이 나간 동생과 눈이 마주쳤다.

“형 없어도 괜찮겠어?”

“…어. 난 지금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우재경은 수행원들의 재촉에 못 이겨 회사로 복귀했다. 우선우 역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일정이 있어서 나갈 채비를 해야 했다. 한량 같아 보이지만 그 또한 수백 명의 직원이 딸린 엔터 사업체의 대표였던 터라 동생의 곁을 계속 지키고 있을 순 없었다.

“배 집사가 금방 올 거야. 뭐 필요한 거 있으면 형한테 바로 전화하고. 알겠지?”

“알았어. 가 봐.”

정말 이대로 가도 괜찮은 걸까. 저 대신 동생의 수발을 들어 줄 고용인들을 여럿 상주시켜 놨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았다.

우선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고, 또 돌아보다 결국 타박을 듣고 나서야 병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집사가 나타났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병실을 한차례 휘이 둘러보더니 눈에 거슬리는 부분들을 잡아내기 시작했다. 고용인들이 그의 명령을 받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원래도 말끔하던 내부는 결점 하나 없이 완벽해졌다.

그는 부지런히 우재경의 지시 사항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병원 측엔 VIP 병실에 출입하는 모든 의료진은 베타로 한정시킬 것을 요청했고, 경호 인력까지 배치해 혹시나 모를 알파의 접근을 차단해 뒀다.

어느 정도 주변 상황을 정리하고 나서야 선경에게 다가갔다. 중년의 남자는 인자한 목소리로 안녕을 물었다.

“깨어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선경의 표정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고 배 집사를 마주 보았다. 어느덧 백발이 성성해진 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할아버지가 다 되셨네요.”

“하하, 그럼요. 제 나이가 벌써 육십인걸요.”

원래도 아버지뻘로 나이가 많았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것보다 부쩍 더 나이 든 모습을 보니 정말로 세월이 지났다는 게 실감 났다. 괜스레 콧날이 시큰거렸다.

“할아버지는요? 별일 없으시죠?”

뒤늦게 우 회장의 안부를 물었다. 배 집사는 이런 질문이 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다시 점잖아진 상태로 돌아가 대답했다.

“도련님, 어디까지 기억나세요?”

“런던으로 짐 보내고, 티켓팅 해 놨던 것까진 기억나요. 유학, 가기로 했었잖아요. 맞죠?”

음…. 낮게 목을 울리던 배 집사는 선경이 말한 그 날을 떠올렸다.

조금 긴 대화가 될 것 같아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손가락을 까딱하니 눈치 빠른 고용인이 금세 마실 것을 준비해 가져왔다. 따뜻한 물을 선경의 손에 쥐여 준 뒤 과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오메가로 발현되고 나서 한국대에 다녔던 일, 우 회장이 쓰러져 결혼을 서둘렀던 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라움 갤러리를 상속받았던 것까지. 6년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엔 늘 한지석이란 사람이 있었다. 이름조차 생소한 남자는 아마도 인생에 꽤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게 분명하다. 손에 쥔 머그잔을 내려다보던 선경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한지석이란 분에 대해서도 잘 아세요?”

“한… 이사님이요.”

“제 남편이라면서요. 어땠어요?”

백과사전처럼 과거사를 줄줄 읊어 주던 배 집사는 한지석의 이름을 언급하자 멈칫하며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하기 껄끄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두 분 관계에 관련된 거라면 저는 잘….”

“배 집사님이 모르시는 것도 있어요?”

“죄송합니다. 알아도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혹시나 제 말로 인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니까요.”

배 집사는 완강히 선을 그었다. 저 고집은 의외로 꺾기 힘들다.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선경은 아쉬운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한지석에 대한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제 주변에 가족만큼이나 제 일을 꿰고 있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소파에 반쯤 기대 누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

밍숭맹숭한 이목구비가 번뜩 떠올랐다. 딱 한 명 있었다.

***

권무열이 나타난 건 연락을 넣은 지 네 시간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병원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 복도 바깥에서부터 요란한 소리가 났다. 곧장 VIP 병실로 들이닥친 무열은 진한 회색 정장이 흠뻑 젖을 만큼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의식을 되찾은 친구가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에 퇴근하자마자 꽁지가 빠지게 달려온 참이다.

병실 문을 붙잡고 가쁜 숨을 헐떡거렸다. 눈으로는 분주하게 우선경을 찾고 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소파에 앉아 있는 당사자와 눈이 마주쳤다.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을 줄 알았는데 웬걸, 이곳이 제집이라도 된 것처럼 한껏 사치를 부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태블릿 피시와 테이블 위에 예쁘게 놓인 찻잔이 눈에 들어왔다. 입고 있는 게 환자복만 아니라면 꼭 어디 호텔 라운지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걱정이 덧없어진 무열은 입맛을 쩝 다시며 땀으로 젖은 코 밑을 문질렀다.

“뭐야, 너 생각보다 멀쩡하다?”

“…누구세요?”

“아이씨, 장난치지 마! 네가 불러 놓고 왜 기억 못 하는 척이야. 아우, 더워 죽겠다.”

권무열은 덜컥 짜증을 부리며 재킷부터 벗어젖혔다. 고거 조금 뛰어왔다고 숨이 찼다.

벗은 옷은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냉장고로 걸어가 차가운 병 음료수를 꺼냈다. 뚜껑을 돌리며 다시 선경이 있는 곳으로 슬렁슬렁 다가오는 모습이 이곳에 몇 번이나 와 본 사람처럼 자연스럽기만 하다.

소파에 마주 앉은 무열은 손부채질로 더운 열기를 식히며 쥐고 있던 음료수를 단숨에 비웠다.

선경은 태블릿을 잠시 내려놓았다. 팔짱 낀 채로 천천히 제 앞에 앉은 남자를 들여다보았다.

목소리는 분명 권무열이 맞는데. 그리고 얼굴도… 자세히 살펴보니 이목구비가 남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알고 있는 절친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자신이 기억하는 권무열은 좀 더 마른 체격을 가졌고… 그래,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제법 훤칠하게 생긴 놈이었다. 지금은 뭐랄까. 스물여섯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연식이 오래되어 보이는데….

“왜에….”

관찰하는 시선을 느낀 무열은 괜히 머쓱해져 뺨을 쓸었다. 오동통한 볼살이 잡혔다.

지금 우선경은 스무 살 때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많이 달라졌나? 무열은 대수롭지 않은 척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불룩한 뱃살이 좀 들어가 보이도록 아랫배에 힘을 주고 상체도 반듯이 세웠다.

“누군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잖아?”

“이런 걸 역변이라고 하는 거지.”

“살이 좀 쪄서 그래.”

“남들은 잘만 비껴가는 세월을 왜 혼자 정통으로 맞았어.”

“주둥아리 놀리는 거 보니 진짜 멀쩡하구먼?”

몇 마디 주고받자 확신이 들었다. 아무리 외형이 변했다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친구 사이는 쉽게 달라지지 않는다.

선경이 경계심을 풀고 싱거운 웃음을 터트리자, 무열은 허공에 발길질하며 묵혀 뒀던 성질을 쏟아부었다. 바짝 조이던 복부도 어느새 힘이 풀려 원상복귀 되었다.

“병문안 자주 왔었다면서?”

“당연한 걸 뭐 새삼스럽게. 그런데 정말 신기하다. 너 분명히 이 주 전에 봤을 때까지만 해도 반송장이었는데… 갑자기 정신 차렸다는 말 듣고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권무열은 아직도 제 눈앞에 우선경이 앉아 있는 게 믿어지지 않는지 중간중간 말을 멈추고 친구 놈을 관찰했다.

다소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별로 아픈 사람 같지는 않다. 하도 병원 안에서 금지옥엽으로 간호를 받은 탓인지 피부는 삶은 달걀처럼 윤이 나 보인다. 안색은 오히려 퇴근한 직장인인 쪽이 더 지치고 피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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