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몸은 좀 괜찮냐? 움직이는 건 어때?”
“그럭저럭. 내일 정밀 검사 받기로 했어. 의사들 말로는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보인대.”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야, 그것보다 너 기억 날아갔다며. 진짜 하나도 생각 안 나? 그거 뭐 고칠 방법도 없다면서.”
“무열아. 그게 문제가 아니야. 지금 큰일 났어.”
선경은 두 손을 깍지 끼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비장한 분위기를 잡자 무열은 실없는 농담을 던지려다가 말았다. 자신을 보는 표정이 자못 심각했다. 무슨 얘기를 하려나 싶어 덜컥 겁이 났다.
“…뭐야, 뭔데 그래.”
“나보고 오메가래.”
우선경은 무슨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우울하게 말했다. 덩달아 긴장한 상태로 집중하고 있던 권무열은 본인도 모르게 인상을 구기며 미친, 하고 중얼거렸다.
“그게 뭐… 아니 넌 지금 그게 제일 충격인 거야? 너 이씨, 기억 빵꾸 났다니까? 앞으로 살길이 막막하지도 않냐?”
“기억 안 나는 건 공부해서 외우면 되지! 너 같으면 오메가로 평생 살 수 있겠어?”
“못 살 건 또 뭐야. 잘만 살아 놓고.”
“이것 좀 봐!”
우선경은 대뜸 바지를 걷어붙였다. 환자복 바지에 덮여 있던 늘씬한 종아리가 드러났다. 권무열은 자신의 무릎 앞까지 뻗친 새하얀 발끝을 내려다봤다.
“뭐, 이 새끼야. 뭘 보라는 거야.”
“몸에 털이 다 없어졌잖아! 모공도 없이 깨끗해! 심지어 수염도 안 자라!”
“그거야 오메가가 되면 호르몬이… 아니 멍청아, 학교 다닐 때 다 배운 거 아냐. 문과지만 나도 그 정도는 알아!”
“이십 년을 멀쩡하게 베타로 살아왔는데 갑자기 이러니까 황당하잖아. 나 앞으로 어떻게 사냐고.”
“잠깐만. 나 왜 이 대화가 익숙하지?”
무열은 아까부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우선경이 발현했을 당시 자신을 붙들고 했던 하소연들과 똑같았다.
‘아래 털도 다 없어졌다고!’
체모가 다 빠져 민둥민둥해졌다며 울고불고했던 것도 기억이 났다. 이건 뭐 하나도 변한 게 없다.
권무열은 큰일 아니라며 손을 내젓고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푹신한 쿠션에 머리를 기대며 여전히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친구 놈에겐 적당한 위로를 건넸다.
“뭐… 심정은 이해한다만 어쩌겠냐. 그런데 너 생각보다 잘 받아들였어. 발현이 늦었다뿐이지 어차피 오메가가 될 몸이었던 거잖아. 그냥 운명이겠거니, 하고 받아들여.”
우선경은 앞머리를 틀어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넌 지금 내가 얼마나 심란한 줄 모를 거야. 나는 그냥 자고 일어났을 뿐인데, 눈 떠 보니 바뀐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나이는 여섯 살이나 더 먹었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 오메가로 발현한 것도 모자라 결혼까지 했다고 하질 않나… 아니, 일찍 결혼한 거는 그럴 수 있다 쳐. 그런데 남자랑 했다는 건 이해를 못 하겠어. 적어도 재경 누나처럼 여자 알파랑 할 수도 있었잖아.”
“글쎄다. 너희 집에서 결혼을 억지로 시키긴 했다만, 상대는 네가 골랐던 거 같은데. 게다가 찐하게 연애도 했잖아.”
“내가 원해서 남자를 만났다고?”
응, 권무열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절친의 연애사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으로서 확실히 증언할 수 있었다.
우선경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저녁을 거른 무열은 허기진 배를 문질렀다, 밥 좀 시켜도 되냐? 물으며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 사람 이름이 한지석이야?”
“…….”
“맞아?”
막 배달 어플을 열어 가게 목록을 훑고 있던 무열은 벙찐 얼굴을 들었다.
“지석이 형도 기억 안 나?”
“응.”
“나 지금 좀 당황스럽네. 어떻게 우선경이 한지석을 잊을 수 있지?”
“이름도 오늘 처음 들었어.”
“와… 너 기억 잃었다는 더 이제 좀 실감 난다. 하긴 형을 만난 게 스무 살 넘어서였으니까 생각이 안 나긴 하겠구나. 잠깐만, 기다려 봐.”
무열은 급하게 앱을 닫고 대신 핸드폰 갤러리를 열었다. 같이 찍었던 사진이 어딘가에 저장돼 있을 것이다. 사진첩을 훑는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스크롤을 한참 내리던 중 그나마 가장 최근 사진을 발견했다. 잘 보이도록 화면에 띄워 놓고 선경에게 핸드폰을 통째로 넘겼다.
“봐봐, 얼굴을 보면 기억이 좀 날 수도 있어.”
“이 사람이야?”
선경은 흥미가 동했는지 순순히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사실 궁금한 나머지 오늘 인터넷에 그의 이름을 검색해 봤었다. 나온 것은 한지석. 31세. 기업인. 학력과 짧은 경력 몇 줄이 전부였다.
텍스트로 이루어진 무미건조한 검색 결과와 달리 사진첩 속에 있는 남자는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한참이나 남자의 웃는 얼굴을 응시했다. 뭐라고 해야 될까, 이상하게 자꾸 시선이 갔다.
담백함과 짙음이 오묘하게 섞인 잘생긴 이목구비 탓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가 입고 있는 정장이 대단히 선경의 취향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관심이 쏠리는 것에 대해 이유를 대라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 남자는 매력적이었다.
자신의 미적 기준이 꽤나 까다롭다고 여겨왔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남자는 거슬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 좀 놀라울 정도였다.
“…잘생겼네?”
아까는 남자 알파는 말도 안 된다면서 질색 팔색하더니 얼굴을 보고 나서는 말투가 누그러졌다.
다른 사진을 더 보고 싶었는지 손가락으로 액정을 좌우로 밀었다. 한지석 대신 관심 없는 권무열의 셀카 사진만 나오자 눈썹을 구기며 대놓고 아쉬운 티를 냈다.
“사람이 참 한결같아. 기억을 잃어도 취향은 여전하구만. 절대 변하질 않아.”
“객관적인 사실을 얘기하는 거야.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건 그렇지, 지석이 형은 남자가 봐도 잘생겼어.”
무열은 쉽게 인정했다. 알파들 잘난 거야 백날 말해 봤자 입 아플 정도지만 그중 한지석은 유독 남달랐다. 우성 알파의 표본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집안, 학벌, 얼굴, 체격, 인성 뭐 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우선경과 둘이 서 있으면 꽤나 그림 합도 볼만했다.
“너희 꽤 잘 어울렸어.”
“과거형이네?”
“…뭐.”
그렇게 됐다는 식으로 권무열이 어깨를 으쓱거린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났고 우선경은 더 궁금해졌다. 그에 관한 얘기를 더 듣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일단 권무열을 구슬리기 위해 배부터 채워 주기로 했다.
무열의 식성에 맞춘 음식들을 대신 주문했다. 어느새 소파 테이블 위엔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배달 음식들이 채워졌다. 기름지고 자극적인 냄새가 솔솔 풍겼다.
무열이 먹음직스럽게 튀겨진 닭 다리 하나를 건넸다.
“하나 잡숴.”
“됐어. 아직 그런 거 못 먹어.”
우선경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대신 컵에 탄산음료를 따라 주며 살뜰하게 식사 시중을 들었다. 볼과 입술을 쉬지 않고 오물거리는 친구를 지켜보다 넌지시 말을 붙였다.
“아까 그거 더 얘기해 봐. 그 한지석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뭐가 궁금한데?”
“우린 어쩌다 사이가 틀어진 거야? 바람… 뭐 그런 거 피웠나?”
치킨 상자를 뒤적거리던 무열은 손을 멈추고 그대로 눈을 치켜떴다. 둥그렇게 뜬 두 눈엔 황당함이 서려 있었다.
“기억나?”
“아니. 그냥 던져 본 건데, 진짜야?”
“그게… 좀 말하자면 좀 복잡한데.”
권무열은 물티슈를 한 장 뽑아 기름이 잔뜩 묻은 손가락을 닦았다. 치킨이 다 뭐냐, 배고프던 게 싹 가셨다. 지금은 이쪽이 더 급했다. 그는 어렵게 운을 뗐다.
“원래는 둘이 죽고 못 살았어. 너랑 결혼하겠다고 지석이 형이 공부하던 것도 다 포기하고 너한테 자기 인생 가져다 바칠 정도였으니까. 뭐 지금은 공감이 안 되겠지만, 너도 형 엄청 좋아했었고. 솔직히 잘 어울렸어.”
권무열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 중에 몇 가지 대표적인 사건들을 얘기해 주었다.
그것은 달달한 연애담이기도 했다가, 서로를 상처 입히는 싸움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가서는 거의 별거에 가까운 결혼 생활을 한 것 같았다. 너무 사랑해서 죽을 것 같았다던 관계가 어쩌다 그렇게 변질된 걸까?
모든 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꼭 남의 인생을 듣는 것 같기도 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단순한 사실 이외에도 서로가 교류했던 감정과 추억, 심지어 애증조차 모두 잊게 되는 거였다.
“결정적으로 네가 지석이 형이 다른 사람 만난다고 의심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사이가 거의 빠그라졌지. 진짜 지긋지긋하게 싸워댔거든.”
“바람을 피웠어? 날 두고?”
“아니 진짜 바람이 났다는 게 아니고, 의심을! 했다니까.”
권무열은 목소리를 키우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이래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닌데, 혹시라도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애한테 잘못된 선입견을 심어 줄까 봐 얘기를 하면서도 내내 신경이 쓰였다.
“지석이 형이 되게 오랫동안 후원해 주는 애가 하나 있었는데, 걔 이름이 김현진인가 그래.”
“…설마 걔야?”
“아, 좀 들어 봐. 아무튼 그 관계를 오해하기 시작한 거지. 안 그래도 의심하고 있는데 애가 대뜸 오메가로 발현까지 한 거야. 꼭 너처럼, 스무 살 넘어서.”
“환장했겠네.”
“그렇지. 완전 막장이었지. 너는 그때부터 완전 눈이 돌아 가지고, 형이랑은 맨날 싸우고 난리도 아니었어.”
“…….”
“그런데 나도 이해는 안 가. 상황이 그렇게까지 치달을 정도면 형도 좀 거리를 두거나, 피했어도 됐을 텐데. 너 사고 났던 날에도 둘이 만났다더라고. 그것도 호텔에서.”
“흐음.”
우선경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머리를 소파에 기댔다. 남자에 대한 감정이 없다 보니 이야기를 들어도 화가 난다거나, 섭섭해지는 것도 없다.
한마디로 별 상관없었다.
선경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을 톡톡 두드렸다. 잠들어 있던 화면이 켜지며 한지석의 사진이 다시 등장했다.
아까는 그토록 감탄이 나오던 얼굴이 이제는 시시하기만 하다. 액정에 비치는 얼굴을 툭, 때렸다.
“잘생긴 쓰레기였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