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05화 (105/127)

#105

“손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희 코리아나 항공은 여러분의 탑승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이 비행기는 서울까지 가는 코리아나 항공 747편입니다. 목적지인 서울까지 예정된 비행시간은 이륙 후 11시간 20분으로 예정하고 있습니다. 저희 승무원들은 여러분께서 안전하고 편안하게 여행하실 수 있도록….”

이륙 준비로 분주한 비행기 안에 승무원의 또박또박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창문 너머로 광활한 활주로를 내다보던 지석은 기내 방송을 들으며 잠시 눈을 감았다. 드디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묘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열흘간의 미국 출장이 끝났다.

사실 우선경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일정을 중단하고 귀국하려 했다. 급하게 비행기 티켓을 수배하고 공항으로 가던 와중에 우재경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이제 막 깨어났어. 아직 안정이 필요하니까 서두를 것 없어.’

‘네가 지금 온다고 해서 뭐가 크게 달라질 것 같아? 계약이라도 책임지고 마무리해. 그거 끝마치기 전엔 선경이 얼굴 볼 생각하지 마.’

우재경은 한국으로 가겠다는 지석을 강경하게 막았다. 그건 가족의 겁박이기도 했지만, 부회장으로서 내리는 지시이기도 했다. 결국 지석은 애타는 마음을 누른 채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야 했다.

원래는 보름간의 체류 일정이었다. 하지만 한지석은 최대한 짧게 일정을 단축했다.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는 일에 있어서만큼은 완벽주의에 가까웠고, 늘 하던 대로 신중하게 임했다. 다만 자는 시간, 쉬는 시간을 할애해 가며 몸을 갈아 넣었을 뿐이다.

인수 합병 계약은 만족스럽게 이뤄졌다. 목적했던 것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체결했으며 미흡한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 사인까지 마치고 난 뒤, 한지석은 비로소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마음이 후련하면서도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깨어난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우선경을 어떤 낯으로 마주해야 할지도 걱정이었다.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 탓인지 그 어느 때보다 지치고 피곤했다. 고질병이 되어 버린 불면증은 요 며칠 사이 증세가 더 심해졌다. 지난 이틀간은 한숨도 자지 못해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였다.

건조한 기내 공기에 목이 칼칼해진다. 지석은 묵직한 눈꺼풀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려면 조금이라도 잠을 청해야 했다. 결국은 수면 유도제를 한 알 꺼내 물과 함께 삼켰다.

목을 조이는 넥타이 매듭을 조금 헐겁게 풀어내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약효가 돌려면 아직 멀었지만, 돌덩이를 매달아 놓은 듯 팔다리가 늘어지고, 머리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당장이라도 수마에 잠길 것 같으면서도 막상 쉬이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우선경이 다양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어느 날은 지석에게 버림받아 상처 입은 얼굴이었고, 또 어느 날은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나타나기도 했다.

최근 며칠 동안은 온몸에 피멍이 들고 부어 있는, 얼굴조차 알아보기 힘든 모습으로 등장했다. 악에 받친 목소리로 원망과 비난을 쏟아부었다. 악몽과 다를 게 없었다.

“손님, 곧 착륙합니다. 죄송하지만 의자를 바르게 해 주시겠습니까?”

승무원의 상냥한 목소리가 과거를 부유하던 지석의 정신을 깨웠다. 곧바로 눈이 떠졌다.

11시간이 넘는 비행이었지만 이번에도 역시 한숨도 자질 못했다. 뜨겁고 뻑뻑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의자를 바로 세웠다. 피곤한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출국장으로 나오니, 고 비서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공항 밖으로 이동하면서 앞으로의 스케줄에 관한 보고를 받았다. 대기하고 있던 검은 세단에 올라탄 한지석은 곧바로 목적지를 말했다.

“병원부터 가죠.”

“네.”

미리 예상했는지 내비게이션에는 이미 우선경이 입원해 있는 병원 주소가 세팅돼 있었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는 큰 도로에 진입하고 금세 속도를 붙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고 비서가 반쯤 몸을 틀더니 어렵게 말을 붙였다.

“저기, 이사님. 미리 말씀 못 드린 게 있습니다만….”

“얘기하세요.”

“우 대표님 상태가 썩 좋지 않은 모양입니다.”

차창에 팔꿈치를 걸친 채 눈가를 가리고 있던 한지석은 그 소리에 손을 내렸다. 불면으로 예민해진 얼굴이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건강하다고 들었는데요. 무슨 문제 있습니까.”

“정밀 검사 결과는 괜찮지만, 그… 머리 쪽에 조금 문제가 생기신 모양입니다. 최근 6년간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계시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도 경과가 좋아지는 게 아닌가 봅니다.”

고 비서는 저 역시도 난처한 듯 연신 이마를 긁으며 말했다.

한지석은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깥의 풍경은 지나가는 세월처럼 휙휙 변하고 있었다.

“기억을 못 한다고.”

허탈한 목소리가 혼잣말을 되뇌었다.

***

서울 시내 중심에 있는 대형 병원에 도착했다.

약 이 주 만에 와 보는 VIP 병동은 웬일인지 예전과 분위기가 다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삼엄하게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우선경의 병실이 있는 복도는 아예 차단봉으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그 너머에 서 있던 보안 요원이 손바닥을 들어 올리며 한지석의 접근을 막았다. 경계하는 눈초리가 기다란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우선경씨 남편입니다.”

생각보다 가까운 관계가 의외였는지 보안 요원은 눈을 홉떴다. 입고 있는 조끼를 더듬어 무전기를 찾더니 어딘가로 보고를 넣는다. 치직대는 잡음과 함께 짧은 대화가 오갔다.

허가가 떨어지자 보안 요원이 한지석을 향해 눈짓했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왼쪽 가장 끝 병실입니다.”

까만 벨트가 스르륵 말리며 길을 열었다.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었다.

잘 정돈된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호텔 방을 옮겨 놓은 것 같은 VIP 병실은 온통 조용했다. 늘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사람도, 항상 그 곁을 지키던 간병인조차 보이질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한지석은 익숙한 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넓은 병실은 창문이 모두 열려 있었다. 바람결에 잠자리 날개만큼 얇은 커튼이 창문 안팎으로 나부꼈다. 그 사이로 온기를 품은 햇빛들이 새록새록 숨어 들어왔다.

우선경은 창가에 붙어 있는 소파에 누워 있었다.

푹신한 쿠션 여러 개를 겹쳐 베개 삼고, 새하얀 발을 내놓은 채 잠든 모습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차마 깨울 수 없어 그 앞에 서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까만 앞머리가 바람이 날려 살랑살랑 흩날렸다. 그럴 때마다 둥그런 이마가 드러났다. 조금 더운지 두피와 이어지는 부분이 땀으로 젖어 반질거렸다.

하얀 뺨은 장밋빛처럼 불그스름한 혈색이 돌았다. 새근거리는 들숨에 가슴이 잔잔하게 부풀어 오른다. 낮잠을 자고 있는 이는 어딜 봐도 반년 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환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따듯하고 건강해 보였다.

무엇보다 병실 안엔 그리웠던 냄새가 가득했다.

그동안은 맡을 수 없었던 우선경의 페로몬이 병실을 채우다 못해 온몸을 휘감고 적셔댔다.

잊고 있었던 향기는 눈앞이 아찔해질 만큼 자극적이었다. 지석은 자신도 모르게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힘줄이 불끈 선 주먹을 들어 올려 코 밑을 가리던 때였다.

내려앉아 있던 선경의 눈꺼풀이 천천히 움직거렸다.

“…….”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몽롱하던 까만 눈동자에 조금씩 초점이 잡혔다. 우선경은 누운 채로 제 앞에 서 있는 장신의 남자를 바라봤다.

“한지석 씨?”

무척이나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아주 낯설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

뜬금없이 나타난 남자를 보고, 우선경은 저도 모르게 떠오른 이름을 불렀다. 한지석. 아마도 그가 맞을 것이다.

실물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저렇게 생긴 남자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뭔가 이상했다. 여태껏 우선경이 마주한 이들은 한결같이 반가워하고, 감동에 젖은 얼굴을 했지만 이 사람은 어딘가 고통스러워 보였다.

문득 한지석이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코를 막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왜 저러지? 의아한 듯 쳐다보던 우선경은 뒤늦게 불편한 이유를 깨달았다.

“아아, 잠시만요.”

서둘러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을 가린 커튼을 열어젖혔다. 소리가 거슬려 잠시 꺼 둔 페로몬 청정기도 전원을 모두 눌렀다.

기다란 원통형 기계는 곧바로 제 역할을 시작했다. 모터가 힘차게 돌아가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 가며 농도 짙은 페로몬을 희석했다. 온통 붉은색으로 점등된 기계들을 보며 우선경은 머쓱해했다.

“미안해요, 소리가 시끄러워서 잠깐 꺼 뒀더니… 냄새 많이 심해요?”

“…….”

“정 힘들면 잠깐 나갔다가 들어와도 되고요. 청정기 켜 뒀으니까 한 오 분 정도 지나면 좀 괜찮아질 거예요.”

민망한 기분에 혼자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쏟아내는데, 정작 상대방은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나마 코를 막고 있던 손은 내려왔지만, 여전히 표정은 굳어 있는 채였다. 신경이 잔뜩 곤두선 사람처럼 보였다.

“분명히 괜찮다고 들었는데… 페로몬 조절에도 문제 있어?”

“어… 문제라기보다는.”

“기억이 안 난다는 거 진짜야?”

대답도 나오기 전에 한지석은 재차 확인하듯 물었다. 말투에는 어쩐지 조급함이 섞여 있었다.

선경은 그의 충혈된 눈을 올려다봤다. 과거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 자신은 한지석에게 아무런 사심도, 원망도 없었다. 그의 반응이 어떻든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일단 앉아요. 우리 얘기할 게 좀 많을 것 같은데. 상의해야 할 문제도 있고.”

“…….”

우선경은 소파에 먼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대화 요청에도 한지석은 요지부동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다.

기다리다 지친 선경은 한숨을 내쉬며 맥없이 허리를 기댔다.

“올려다보고 있기 힘들어서 그래요. 잠깐이면 되니까 앉아 봐요.”

환자복을 입고 있으면 조금만 힘을 빼고 말해도 아파 보이는 티가 난다. 효과는 제법 괜찮았다. 통나무처럼 서 있던 한지석도 곧바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몸은 생각보다 괜찮아요. 오래 누워 있던 것치고는 움직이는 데 이상 없고, 수술했던 부위도 경과가 좋더군요. 뭐 근육량이 좀 빠지긴 했는데 원래도 그렇게 튼튼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기억에 좀 문제가 생겼어요.”

“오면서 들었어, 스무 살 때가 마지막 기억이라고. 발현한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선경은 제 상황에 대해 담담히 인정했다. 이제는 거의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페로몬 조절 안 되는 것도 그것 때문이야?”

“잘 안 된다기보다는, 내가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자꾸 깜박깜박해요. 통제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던데요. 뭐 금방 몸에 익겠죠.”

“…나도, 모르겠어?”

바싹 메마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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