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우선경은 턱을 괸 채로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진지한 시선이 한지석의 얼굴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어딘가 낯익은 부분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솔직히 그쪽 보면 뭔가 생각이 날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미안하지만 정말 기억이 안 나네요.”
구부정하게 숙였던 허리를 다시 쭉 폈다. 한지석의 텅 빈 눈빛이 자석처럼 따라 올라왔다.
“우리 헤어졌다면서요.”
“…….”
“하필 내가 다치는 바람에 관계가 어중간해진 것 같던데, 이제는 정리하는 편이 좋겠죠.”
그동안 내내 생각해오던 것을 말할 타이밍이었다. 선경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어차피 나는 당신에 대한 기억도 없고, 모르는 사람이랑 같이 살 생각 없어요. 한지석 씨는 만나는 오메가도 있다면서요.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부부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데.”
“…….”
“여기서 깔끔하게 끝내죠. 각자의 인생 알아서 챙기는 거로 해요.”
제안을 들은 한지석은 말없이 입가를 문질렀다. 힘줄이 솟은 손등이 그의 얼굴 반을 덮으며 표정을 감췄다. 그 와중에도 긴 눈매 속에 갇힌 눈동자는 끝까지 우선경을 놓아주지 않았다.
“각자의 인생.”
“네.”
마침 창문 밖에서 바람이 세게 불어닥쳤다. 페로몬이 담뿍 묻은 향기로운 냄새가 훌훌 휘날렸다.
선경은 허리를 바로 세우고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검고 윤기 도는 머릿결이 하얀 손가락에 감기며 단정하게 정리된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말했다.
“이혼합시다. 한지석 씨.”
***
얼마 지나지 않아 배 집사가 도착했다.
인기척도 내지 않고 병실로 들어온 노년의 사내는 잽싸게 내부를 확인했다.
이상한 일이다. 분명히 한지석이 병문안을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는데, 막상 와 보니 모습은커녕 머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안에는 우선경 혼자뿐이었다. 심지어 기력 없이 소파에 늘어져 있는 모습은 배 집사가 마지막으로 목격했던 두 시간 전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한 이사님은요? 벌써 가셨습니까?”
“네, 뭐.”
“괜찮으세요? 도련님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시는데.”
“모르겠어요. 머리가 좀 아픈 것 같기도 한데….”
쿠션 위에 엎드려 있던 선경은 이마를 짚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아 배 집사를 부를까, 하던 참이었다.
“아저씨, 저 약 좀 주세요.”
배 집사는 곧바로 물잔과 반으로 쪼갠 진통제를 건넸다. 걱정스러운 눈길은 덤처럼 얹어졌다.
“별일 없으셨습니까.”
“네,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던데요.”
“무슨 이야기를 하셨는데요.”
우선경은 약과 함께 물을 꼴깍 삼켰다. 아까보다 좀 더 개운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혼하자고 했어요.”
“예?”
하지만 정작 배 집사는 충격을 받은 듯 입을 뻐끔거렸다. 안 그러던 사람이 말까지 더듬었다.
“어… 그… 한 이사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알겠다던데요?”
정확히는 ‘그래, 너 원하는 대로 해.’라고 말했다. 그러더니 더는 볼일이 없는지 곧장 병실을 나가 버렸다.
아무 걱정 없는 우선경과 달리 배 집사의 안색은 점점 더 흙빛으로 변해 갔다. 혹여나 이 철없는 도련님이 무턱대고 일을 저지른 건 아닌가 싶어 눈앞이 캄캄해졌다.
“잘 생각해 보고 내리신 결정인 거죠? 아무리 그래도 이혼 같은 중대한 일을….”
“아저씨, 제가 하루 종일 병원에 있으면서 뭐 하고 지낼 거 같아요? 이미 이 문제에 대해선 수십 번도 더 생각하고 고민했어요.”
“…알겠습니다. 그러시다면, 일단 변호사에게 상담부터 받아 보시죠.”
본인이 그렇다는데 더 이상 말리는 건 무의미했다.
덩달아 두통이 몰려오는 듯해 배 집사는 남은 반쪽짜리 진통제를 제 입에 털어 넣었다. 눈가에 있는 주름이 한층 더 깊어지며, 한숨이 밀려 나온다. 인생 말년에 이게 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는 이 돌발 상황을 어찌 대처하면 좋을지 깊게 고민했다.
며칠 뒤, 마침내 퇴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서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가운데 병실로 누군가가 찾아왔다. 말쑥한 정장 차림의 남자는 무척이나 키가 컸고, 겉으로 드러나는 위압감 또한 대단했다.
옆에 선 배 집사가 남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앞으로 도련님 신변 경호를 담당해 주실 분입니다. 기억 안 나시겠지만, 이전에 같이 일한 적 있으세요. 아마 편하게 지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강준일이라고 합니다!”
남자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인사하는 목소리부터가 우렁찬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기합이 넘쳤다. 막 겉옷을 껴입던 우선경은 대놓고 눈살을 구겼다.
“경호원… 은 너무 과하지 않아요?”
“부회장님 지시입니다. 아직까지 범인을 못 잡았는데 당연히 경호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당분간은 반드시 강준일 씨와 붙어 다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혼자선 절대 외출 금지랍니다.”
우재경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외출 금지는 좀 심하지 않나. 나이가 몇인데.
“내가 무슨 애도 아니고.”
마저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선경은 문득 고개를 돌리다 강준일과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듬직한 체구와 어울리지 않는 서글서글한 인상이 의외였다.
“음… 저기, 강준일 씨.”
“네!”
입에 잘 붙지 않는지 선경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예전에는 강 비서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저도 그편이 익숙하고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요. 강 비서님.”
선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안에서 새로운 호칭을 여러 번 굴려 봤다. 확실히 이편이 훨씬 더 부르기 편했다.
***
퇴원 절차는 배 집사에게 맡긴 뒤 먼저 병원을 나왔다.
강 비서를 따라 차가 주차된 곳으로 이동했다. 세련된 디자인의 외제 차가 오랜만에 만나는 주인을 반겼다.
“차 예쁘네요.”
“사고 나기 직전까지 도련님이 직접 타시던 겁니다. 혹시나 기억을 떠올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가지고 왔습니다.”
선경은 그의 센스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눈썹을 까딱거렸다. 곧바로 차 문을 열었다.
“뒷자리에 안 타시고요?”
“잠깐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냅다 조수석 쪽에 앉은 선경은 내비게이션부터 조작했다. 기계에 등록된 주소를 차례대로 훑었다.
“여기 저장돼 있는 ‘집’이… 아무래도 제가 살던 곳이겠죠?”
“그럴 겁니다. 가 보시겠습니까?”
“한번 가 보죠. 뭔가 기억나는 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무턱대고 찾아간 신혼집은 서울숲 중심에 있는 고급 아파트였다. 입구로 들어서자 차 번호를 인식한 차단기가 저절로 열렸다.
어찌어찌 현관 앞까진 도착했는데 이번엔 도어 록이 복병처럼 나타났다. 비밀번호를 몰랐던 선경은 여기서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혹시 몰라 기계를 만져 보는데 지문을 읽었는지 띠리릭, 잠금이 풀린다. 놀란 선경은 곧바로 손을 뗐다.
“…와. 진짜 열렸네.”
넓다 못해 황량한 집엔 아무도 없었다. 우선경은 천천히 안으로 들어가서 거실을 둘러봤다.
이끌리듯 자연스럽게 소파로 가 앉았다. 엉덩이에 닿는 푹신함과 손에 만져지는 가죽의 촉감, 등받이의 높이와 기울기까지. 어디서 이런 걸 샀나 싶게 착석감이 완벽했다.
낯선 집은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가구부터 소품 하나까지도 모두 제 취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쯤 되니 확신이 들었다. 아, 여긴 내가 살던 곳이 맞나 보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지만 사람이 사는 집 특유의 생활감은커녕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낮임에도 썰렁한 한기가 들자 선경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몸을 움직였다.
“한지석 씨는 여기 계속 살고 있는 거죠?”
“네, 제가 알기론 그렇습니다.”
방문을 하나씩 열어 보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가 본 곳은 서재였다. 방 안에서 느껴지는 점잖은 분위기만으로도 이곳을 쓰는 사람이 한지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빈틈없이 정리된 책상 위와 달리, 한쪽 벽면을 채운 책장은 두서없이 꽂힌 책들로 가득했다.
대부분 경영에 관련된 것들이다. 손이 잘 닿지 않는 위 칸에는 색이 바랜 오래된 서적들도 있었다. 온통 한문으로 쓰여 있는 책들은 사전처럼 두꺼웠다. 형법, 민사, 익숙한 한글들이 드문드문 읽혔다.
그리 넓지 않은 방에는 접이식 매트리스도 하나 있었다. 왜 이런 걸 놔뒀을까? 어울리지 않는 가구에 의문만 들었다.
서재를 나온 뒤 다른 곳도 둘러봤다.
눈에 띄는 크기의 드레스룸과 청음 설비를 완벽하게 갖춘 시어터룸, 아무것도 없이 텅 비워 놓은 알파룸 몇 개까지 보고 나니 마지막으로 부부 침실만 남았다.
여태껏 봐왔던 다른 방과 달리 열어 보는 게 조금 긴장이 됐다. 선경은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입술을 사리물고 문고리를 돌렸다.
“…….”
걱정과는 달리 평범한 곳이었다. 어쩐지 지금껏 열어 봤던 방 중 가장 황량하다. 마치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것처럼.
한지석은 이 집에서 잠을 안 자나? 오히려 서재나 드레스 룸에선 약하긴 했어도 그의 냄새가 났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선경은 침대에 살짝 걸터앉았다. 생각보다 굉장히 편안했다. 앉은 그대로 슬쩍 등을 대고 누웠다.
마치 침대가 몸을 빨아당기는 것 같았다. 나른함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긴장이 풀리니 또다시 주체하지 못한 페로몬이 넘실넘실 흘러나온다. 삭막하던 방 안에 온통 상큼하고 향긋한 냄새가 돌았다.
깜빡 잠이 들었었나 보다. 문득 눈을 뜬 선경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시간은 어느새 한 시간이나 지나 있었다.
급히 거실로 나가 보니 강 비서가 우직하게 서서 기다리는 게 보였다.
“설마 계속 그러고 있었어요?”
“전 괜찮습니다.”
“죄송해요, 잠깐 눕는다는 게 자버린 것 같은데.”
“하하, 피곤하셨나 보네요. 저 때문에 괜히 눈치 보실 필요 없습니다. 이게 편해요. 그냥 석상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강 비서는 시원하게 웃어 넘겼다. 민망해진 선경은 얼굴을 문지르며 남은 잠기운을 말끔히 떨쳐냈다.
“다 봤으니까 돌아가죠.”
“여기서 지내시진 않을 겁니까?”
“네. 별로 생각나는 것도 없고, 있어 봤자 불편하기만 할 것 같고요.”
무엇보다 한지석과 한집에서 지낼 생각은 없다.
선경은 익숙지 않은 집안을 다시 한번 휘 둘러본 뒤 강 비서에게 고갯짓했다.
“성북동으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