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새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6년의 공백은 어딜 가나 느껴졌다. 가장 비슷하고 변한 게 없으리라 여겼던 본가마저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못 보던 식구들이 그를 반겼다.
“산쬰! 음마, 산쬰!”
처음 보는 세 살짜리 아기가 우선경을 보자마자 발망치를 찧어가며 와다닷 뛰어왔다. 지켜보던 보모들이 놀라 손을 뻗었지만, 아기는 짧은 다리로도 용케 넘어지지 않고 복도를 질주했다.
선경의 왼쪽 다리에 껌처럼 달라붙는 아이는 키가 고작 무릎 근처를 오갔다. 간식을 먹다 나온 건지 양손에는 침에 젖어 눅눅해진 쌀 과자가 들려 있었다. 온통 단내가 풍겼다.
“선우 형 딸… 이에요?”
이름이 다솜이라고 했던가, 큰형이 사진과 동영상을 지겹도록 보여 줘서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아이를 다리에 매단 채 뻣뻣하게 굳어 있자, 뒤이어 형수라는 사람도 다가와 인사했다. 모두가 자신을 알아보고 반가워하는데 선경은 그들이 생소하기만 했다.
천천히 집 안을 살펴봤다. 벽지와 가구 같은 인테리어는 물론이고, 내부 구조까지 싹 바뀌어 있었다. 그야말로 남의 집 같았다.
“여긴 언제 공사한 거예요?”
“저희 결혼하던 당시였으니까 벌써 4년 정도 됐네요.”
“아….”
어색하게 대답하는 선경을 보며, 아이를 품에 안은 형수가 맑게 웃었다.
“2층 올라가 보세요, 도련님 방은 그대로 놔뒀으니까요.”
최수연의 말처럼 우선경의 방은 이 집에서 유일하게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리모델링을 하더라도 자신의 방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단다. 덕분에 놀랍도록 기억과 똑같았다.
익숙한 것을 보는 게 얼마 만이던가, 별것도 아닌데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그제야 보금자리를 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앉자 안락함이 느껴진다. 그래, 이거지. 선경은 머리를 뒤로 젖히며 작게나마 감탄했다. 편안한 제 방에서 마음껏 늘어지려 할 때였다.
똑똑.
때마침 배 집사가 방으로 찾아왔다. 품 안에는 묵직한 상자가 들려 있었다.
“앞으로 공부하셔야 할 것들입니다.”
테이블 위에 두툼한 바인더가 차곡차곡 놓였다.
정치, 경제, 예술, 인맥 등 타이틀도 큼직하게 달려 있다. 모두 지난 6년간의 기록들이었다. 과거에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 정보들은 물론이고, 우선경과 연관된 사람들에 관한 인적 사항도 담겨 있었다.
모두 그가 암기해야 할 숙제들이었다. 방대한 양에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막막했다. 선경은 질린 얼굴로 바인더를 들춰 봤다.
“설마 이 많은 걸 다 봐야 하는 거예요? 거의 백과사전인데?”
“네. 당연하죠. 여기 태블릿에도 넣어 놨으니까 틈날 때마다 보고 외우세요.”
배 집사가 종이봉투에 담긴 서류 꾸러미를 또 하나 건넸다.
“그리고 이건 변호사에게 전달받은 합의 이혼 관련 서류입니다.”
“아, 이리 주세요.”
요청했던 서류가 생각보다 빨리 준비됐다. 선경은 보고 있던 바인더 커버를 덮고, 날름 종이봉투부터 열어 보았다.
두툼해 보이는 것과 달리 이혼 신청서는 생각보다 얄팍했다. 나머지 서류들은 대부분 변호사가 따로 챙겨 준 위자료와 재산 분할에 관한 내용들이었다.
어려운 용어들을 천천히 읽어 가던 선경은 문득 별첨으로 표시된 부분을 발견했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뭐예요? 신탁?”
“…모르셨습니까? 이혼하신다고 하셔서 당연히 알고 계시는 내용인 줄 알았는데요.”
“뭔데요, 난 처음 듣는데?”
“회장님이 선경 도련님 앞으로 남겨 놓으신 겁니다. 결혼 의무 기간을 채우시면 받으시는 조건이고, 5년짜리입니다.”
“이혼하면 못 받는 거고요?”
“네, 아마도 몇 개월 뒤가 만기일 겁니다.”
들고 있던 서류 뭉치가 무릎 위로 우수수 떨어졌다. 배 집사를 바라보는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아니…. 그 얘길 지금 해 주면 어떻게 해요.”
할아버지는 정말로 치밀한 사람이었다.
손주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측이라도 하셨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조건을 걸어 두셨을 리가 없다.
배 집사가 급히 구해다 준 신탁 계약서를 읽고 또 읽었다. 우선경은 죄 없는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보면 볼수록 이해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내용 자체는 의외로 간단했다.
결혼 기간 5년을 채우면 할아버지가 신탁 기관에 걸어 두신 (주) 서화의 주식 240만 주를 우선경과 한지석이 나눠 받게 된다. 이는 전체 주식 지분 중 5%에 해당하는 상당한 양이었다.
문제는 그 전에 이혼하는 경우다. 기간을 못 채울 시 해당 주식은 모두 구도경에게 돌아간다고 적혀 있었다.
우선경은 서화 그룹의 주식 보유 현황을 살피며 계산기를 두드려 보기 시작했다. 만약 구도경이 주식을 받게 된다면 개인으로서는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우재경 다음으로 많은 지분을 갖게 되는 셈이다. 만약에 주변 세력이 힘을 보태 준다면 언제든지 우재경의 입지를 불안하게 뒤흔들 수 있었다.
“하아….”
선경은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틀어쥐었다. 차라리 사회에 환원되는 거라면 몰라, 구도경이 받게 되는 건 끔찍하게 싫었다. 그 이죽거릴 얼굴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치가 떨렸다.
“신탁 있다는 거 구도경도 알아요?”
“아마 정확한 조건까지는 모르시겠지만, 존재 자체는 알고 계실 겁니다. 유언장에도 언급되어 있으니까요.”
“알고 있을 게 분명해요. 그 인간이 모르고 있을 리가 없겠죠.”
선경은 한숨을 터트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어찌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계약서에 적힌 날짜를 보니 이제 겨우 120일가량이 남은 상황이다. 고작 4개월. 이대로 날리기엔… 미치도록 아까웠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이혼은 계속 진행하실 것인지….”
“이미 말해 버린 걸 어떻게 해요.”
조금만 더 빨리 알았어도 그렇게 건방을 떨진 않았을 텐데.
온갖 멋은 다 부려 가며 폼을 잡았던 당시가 생각났다. 으아악,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선경은 계약서로 심란한 얼굴을 덮었다.
“하아, 이걸 어떻게 수습하지….”
“제가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얼굴을 가리고 있던 종이가 슬쩍 아래로 내려갔다. 까만 눈동자가 빼꼼히 드러나며 배 집사를 찾았다.
“…아저씨.”
“네, 도련님.”
우선경은 간곡하게 부탁했다.
“한지석 씨한테… 전화 좀 해 주세요.”
***
한지석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쉬지 않고 일했다.
인수 합병이 무사히 체결됐으니 이제부터는 새롭게 목표를 세우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덩달아 회사 내 법무팀도 바빠졌다. 계약 사항을 검토하고 그에 파생되는 수십 가지의 하도 계약을 진행하기 위해 하루 종일 서류에 파묻혀 지내는 중이다.
평소에도 바빴지만, 오늘은 유독 심했다.
오전 7시부터 지금까지, 10시간째 쉴 틈 없는 릴레이 회의가 이어졌다.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느라 직원들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가고 있었다.
“오 분만 쉬었다가 하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책상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은 앞다투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터질 것 같은 방광을 비우고, 밀린 담배를 연달아 피우고, 커피도 한 잔 마시려면 1분 1초가 급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빠져나가자 썰렁해진 회의실엔 한지석과 그의 동기인 최정훈만 남았다.
“아이고, 죽겠다아아!”
정훈은 앓는 소리를 내가며 허리가 뒤집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늘리고, 건조한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렌즈가 뻑뻑한 동공 위를 겉돌았다.
쓰읍, 내가 인공 눈물을 가져왔던가. 최정훈은 사탕과 초콜릿으로 가득 찬 재킷 주머니를 뒤지며 점안액을 찾았다. 그러면서 심드렁히 한지석에게 말을 붙였다.
“너 지금 선경 씨 때문에 이러는 거지.”
“뭐가.”
“직원들 혹사시키고 일에 미친 놈처럼 굴어대는 거 말이야. 너 꼭 니 남편이랑 관련된 일만 생기면 스트레스받아서 이렇게 풀잖아. 다른 생각 안 하고 일에 매달리는 거 한지석 특, 아냐.”
“…….”
정곡을 찔렀음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최정훈도 더 이상 타박하지 않았다.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오죽하면 저럴까 싶기도 했다.
그는 지난 반년 동안 한지석이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산증인이기도 했다.
눈꺼풀을 벌리고 인공 눈물을 떨어트렸다. 정훈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여상하게 물었다.
“의식 되찾았다면서. 병원 가 본 거지? 상태는 좀 어때?”
“멀쩡해. 잘 돌아다니고, 건강해 보여.”
“진짜로? 세상에… 몇 개월이나 누워 있었던 사람이 어떻게 그래?!”
“그런데 날 못 알아봐. 기억이 안 난대.”
“…….”
뭐라고? 황당한 소식에 정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어렵게 넣었던 인공 눈물이 눈 밖으로 또르르 흘러내렸다.
옆에서 질질 짜든 말든, 한지석은 팔짱을 낀 채 덤덤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혼하자고 하던데. 어차피 기억도 없는데 같이 살 이유가 없다고.”
“…어쩌려고?”
“해 줘야지, 걔가 원하는 건 다 해 줄 거야.”
그때,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 전화가 길게 진동했다. 액정에 뜬 발신자는 배 집사였다.
지석은 피곤한 얼굴 가죽을 쓸어 만지며 전화를 받았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여보세요.”
-…….
“배 집사님. 말씀하세요.”
-전데요.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에 늘어져 있던 허리가 저절로 곧추세워졌다. 한지석은 애써 침착하게 대꾸했다.
“응, 말해.”
-할 얘기가 있어서요. 전화로 하기엔 좀 그런데.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
-바쁘면 할 수 없고요. 그냥 다음에….
“어디로 가면 돼? 너 지금 어딘데.”
참을성 없이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그의 성급한 닦달에 스피커 너머로 당황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한지석 씨가 올 필요는 없어요. 일하느라 바쁠 테니까 내가 회사로 갈게요.
“…언제까지 올 수 있는데.”
-어… 아마 한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요.
“차 보낼까?”
-아니요. 데려다 줄 사람 있어요.
“알겠어.”
다소 무뚝뚝한 대답과 함께 통화는 금방 끝났다.
핸드폰을 움켜쥔 한지석은 서둘러 책상을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펼쳐 둔 서류들을 쓸어 담듯이 정리하기 시작했다.
“회의 접자.”
“누가 와?”
“우선경.”
반쯤 누워 있던 최정훈도 덩달아 몸을 일으켰다.
“뭐야, 당장 이혼 도장 찍어 달래? 혹시 변호사 필요해? 옆에 있어 줄까?!”
쓸데없는 오지랖이 길게 따라붙었지만, 한지석은 이를 무시한 채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무감한 표정과 달리 집무실로 걸어가는 발걸음은 속도가 무척 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