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08화 (108/127)

#108

***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입장인데 빈손으로 가긴 그래서 백화점 식품관에 들렀다. 온갖 화려한 디저트가 종류별로 있었지만 뭘 사야 할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한지석의 취향에 대해선 하나도 아는 바가 없었다.

고민 끝에 누구나 무난하게 좋아할 만한 쿠키와 초콜릿을 샀다. 양손 가득 쇼핑백을 챙겨 들고 나오는 우선경의 얼굴은 적진으로 향하는 장수처럼 어딘가 비장해 보였다.

서화 그룹 본사에 도착한 선경은 리셉션 직원의 안내를 받아 12층 집무실까지 무사히 올라올 수 있었다.

문이 열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비서실 직원들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인사했다. 얼굴엔 미소가 가득 담겨 있었지만, 긴장으로 입꼬리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갑자기 찾아와 죄송합니다.”

우선경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하나 내밀었다. 그는 눈매를 부드럽게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당 떨어질 때마다 하나씩 드세요.”

예상치도 못한 선물 공세에 비서들은 얼어붙은 채로 어색하게 눈치만 살폈다. 내민 손이 무안해지려 할 때 퍼뜩 정신을 차린 고 비서가 재빨리 쇼핑백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챙겨 주실 것 없는데….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혹시 한지석 씨, 단 거 좋아하나요? 예를 들어 쿠키라든가….”

“그다지 찾으시는 편은 아닙니다만, 우 대표님이 사 오신 거라면 좋아하실 겁니다.”

으음, 아무래도 선물은 실패한 것 같다. 뭐, 할 수 없지. 어차피 인사치레니까. 선경이 쿠키 상자를 내려다보며 쓴웃음을 지을 때였다.

안쪽 문이 벌컥 열렸다. 한지석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단란하게 대화를 나누던 이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쏠렸다.

“…….”

다소 채신없는 행동이었다는 걸 본인도 느꼈는지, 지석은 뒤늦게 침착한 척 자세를 가다듬었다.

아까부터 일은 제쳐놓고 선경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밖에서 목소리는 들리는데 도통 들어오질 않자 결국엔 그새를 못 참고 뛰쳐나온 것이다.

비서들과 한 무리를 이룬 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우선경과 시선이 마주쳤다. 머쓱함에 괜히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거기서 뭐 해.”

“인사하는데요.”

“들어와.”

한지석은 문을 활짝 열어 둔 채 먼저 들어가 버렸다.

올 것이 왔군. 우선경은 심기일전하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 다시 비장하게 마음을 다잡으며 그 뒤를 따라갔다. 살짝 당긴 문이 예상치 못하게 쾅,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름 훈훈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다시 식어 버렸다. 혹시나 또 싸움이 벌어지는 건 아니겠지? 비서실 직원들은 침묵 속에서 불안한 눈빛만 주고받아야 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집무실 안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소파에 마주 앉자 한지석은 대뜸 안색부터 살피더니 안부를 물어왔다.

“몸은 좀 어때.”

“그냥 뭐 나쁘지 않아요. 아, 그리고 이건 그쪽 주려고 샀어요.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우선경은 들고 온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슬쩍 밀었다. 지석의 시선이 리본으로 범벅된 쿠키 상자에 잠시 닿았다 떨어진다. 역시나 선물엔 별 관심이 없는지 바로 본론을 물었다.

“할 말 있다며.”

“혹시 우리 결혼에 신탁 걸려 있다는 거 알았어요?”

그 한마디에 지석은 우선경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깨달았다. 내내 경직돼 있던 얼굴엔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소파에 어깨를 비스듬히 기대며 여유를 조금 되찾았다.

“그래, 그런 게 있긴 했지.”

“알았으면 좀 말을 해 주지 그랬어요.”

우선경은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기억은 스무 살로 돌아갔어도 본래의 성격은 그대로였다.

그런 이유로, 부탁을 꺼내기에 앞서 잠시 자존심을 내려놓는 과정이 필요했다. 선경은 눈을 감고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셨다. 심호흡하는 소리가 지석의 귀에까지 닿았다.

“지금 와서 이런 말 하는 거 되게 멋없다는 거 아는데요. …우리 이혼 잠깐만 미루면 안 될까요?”

“…….”

“120일만 나랑 더 살아 줘요.”

“그거면 돼?”

“네?”

지석은 팔짱을 낀 채 지그시 상대를 바라봤다.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놀라지 않고 오히려 더 요청을 이끌어 냈다.

“원하는 거 있으면 지금 다 얘기해.”

“우리가 얼마나 사이가 안 좋았는지는 몰라도… 일단 남은 기간 동안은 좀 잘 지냈으면 좋겠고요. 내키진 않겠지만 한집에서 같이 살았으면 해요.”

“…….”

“아, 물론 따로 누굴 만나든 뭐라 간섭할 생각 없으니까 그 부분은 안심해도 돼요. 사생활은 반드시 보장해 줄게요.”

덧붙인 말은 나름 한지석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뭐가 그리 불만인 것인지 남자는 오히려 인상을 구겼다.

덕분에 한시름 놓은 선경은 눈을 힐끗 들어 올리며 지석의 반응을 살폈다.

“그쪽도 부탁할 거 있으면 지금 말해요. 나만 요구하는 것도 좀 그러니까.”

“…….”

한참 동안 생각하던 한지석은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오늘부터 집으로 들어와서 지내.”

“…….”

“그 거슬리는 존댓말도 그만두고.”

***

우선경은 정오가 다 되어서야 거실로 나왔다. 한가롭게 늦잠을 자고 일어나 이제 겨우 씻고 나온 참이다. 공부할 것을 챙겨 들고 느긋이 자리에 앉았다.

마침 주말이라 한지석도 거실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두 사람뿐인 집 안은 적막이 흘렀지만, 이상하게도 그 조용함이 불편하진 않았다.

룸메이트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기억이 안 날 뿐이지 몇 년 동안이나 살 맞대고 살아온 사이 아닌가. 게다가 평생도 아니고 고작 4개월 남짓인데, 한집에서 같이 사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았다.

[배터리가 20% 남았습니다.]

보고 있던 태블릿 화면에 배터리가 부족하다는 알림이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자, 소파에 앉아 있던 한지석이 읽고 있던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일어나더니 멀찍이 떨어진 곳에 놔둔 충전기를 들고 온다. 눈치 하나만큼은 귀신같았다.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매번 내가 부탁하기도 전에 챙겨 주는 거 되게 신기한 거 알아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는데, 정작 한지석의 표정은 어딘가 떨떠름해 보였다. 그는 선경의 얼굴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더니 땅이 꺼질듯하게 한숨을 뱉었다. 동시에 선이 긴 충전기가 허벅지 위로 툭 날아왔다.

왜 또 저렇게 기분이 안 좋아?

충전기를 주섬주섬 챙기면서 괜히 한 번 눈치를 봤다. 한지석의 반듯한 미간에 새겨진 세로 주름은 도통 펴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사실 이유는 대충 알고 있었다. 한지석은 존댓말을 들을 때마다 유독 못마땅한 티를 냈다. 약속했으니 말을 편히 해야 한다는 건 알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는 게 아니다. 우선경에게 한지석은 아직 낯선 타인이었다.

신혼집으로 들어와 산 지도 벌써 며칠이 지났다. 우려와 달리 한지석과의 동거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다행히 한 침대에서 자는 일은 없었고, 서로 각방을 쓰며 지냈다.

지금처럼 한 공간에 머물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페로몬이 느껴졌다. 머리는 기억을 못 해도 몸은 기억하는 걸까,

한지석에게서 느껴지는 은근한 페로몬은 거슬리기는커녕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젖은 흙내음이 섞여 있는 숲 냄새. 그 향기를 맡고 있다 보면 울창한 산림에서 휴식을 취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게다가 이 남자는 우선경과 함께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한 듯이 굴었다. 선경을 챙기는 작은 행동들은 인위적이라기보단 일종의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덕분에 낯선 집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는 게 조금도 거리낌이 없을 정도다. 솔직히 말하면 함께 살기엔 가족들보다 한지석 쪽이 훨씬 더 편했다.

거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이 한지석의 소파 자리까지 침범해 들어왔다. 길게 뻗은 다리와 곧은 무릎, 책장을 넘기는 손등을 온통 하얗게 적셨다.

재미없는 과거사를 달달 외우고 있던 우선경은 그 모습을 힐끗 쳐다봤다.

수트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이마를 덮은 부드러운 생머리와 티셔츠를 입은 모습이 새삼스럽게 신기하다.

이상하다기보단 꼭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역시 자신과 같이 사는 게 편안한 걸까?

티 나는 시선이 얼굴에 달라붙자, 책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한지석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왜 사람을 자꾸 훔쳐봐. 그럴 거면 그냥 대놓고 보든가.”

“훔… 쳐본 건 아니고요.”

정수리에 눈이라도 달렸나, 머쓱해진 선경은 아닌 척 고개를 돌렸다. 애꿎은 태블릿 화면만 휙휙 넘어갔다.

“그냥 주말이고 날씨도 좋은데 왜 집에 있나 싶어서 그러죠. 뭐 데이트 그런 거 안 해요?”

“데이트?”

한지석의 고개가 대각선으로 삐딱하게 기운다. 우선경이 앉아 있는 쪽으로 몸을 반쯤 틀은 그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내가 데이트를 누구랑 해.”

“…할 사람 없어요?”

하, 탄식과 함께 어처구니없어하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반응이 저러니 뭔가 실수라도 한 기분이 들었다. 선경은 슬쩍 몸을 틀어 한지석을 등졌다.

의외의 말이 들려온 건 그때였다.

“그럼 같이 나갈래?”

“…네?”

“네 말대로 날씨도 좋아 보이는데 집에만 있기는 아깝잖아. 어디 가고 싶은 곳 없어?”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에 귀가 솔깃해진다. 안 그래도 공부만 하고 있기엔 몸이 근질거렸고, 가 보고 싶은 곳도 있었다. 혼자서는 엄두가 안 나서 내내 참고 있던 중이었다.

우선경은 냉큼 태블릿을 소파 위로 내던졌다. 말라붙은 입술에 조심스레 침을 적셨다.

“같이 가 줬으면 하는 곳이 있기는 한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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