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09화 (109/127)

#109

***

“한지석 씨, 여기요. 이쪽!”

“…….”

우선경은 새하얀 건물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꽤 흥분했는지 평소보다도 목소리 데시벨이 높았다.

한지석은 그의 성화에 못 이겨 따라가면서 주변을 살폈다. 깊게 눌러쓴 모자에 도수 없는 안경, 마스크까지 착용한 모습은 누가 봐도 수상함, 그 자체였다.

앞서 걸어가던 우선경도 똑같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서 이러고 다니니 오히려 시선이 집중되는 것 같다.

이 말도 안 되는 위장에 동참해 주던 한지석은 억지로 쓴 마스크를 턱 밑으로 슬쩍 내렸다.

“아무래도 벗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아, 진짜 말 안 들으시네, 협조 좀 해 달라고요!”

하지만 우선경은 득달같이 달려와 마스크를 원위치해 놓는다. 아직 직원들이 알아보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잘생긴 하관은 꼼짝없이 다시 가려졌다.

그렇게 가고 싶어 하던 곳은 한남동에 있던 시렌치움 갤러리였다. 라움에 비하면 규모는 훨씬 작았지만, 이곳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롯이 우선경의 능력으로 이룬 곳이라 의미가 깊었다.

갤러리는 주말답게 방문객으로 넘쳐났다. 두 사람도 기꺼이 일반 관람객들 사이에 섞여 줄을 섰다. 한참이나 순서를 기다린 뒤에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침 입구에선 갤러리 직원이 전시회 내용을 간략하게 담은 책자를 하나씩 나눠 주고 있었다. 제 차례가 오자 우선경도 당연한 듯 손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즐거운 관람 되십…!”

홍보물을 넘겨주던 직원의 눈이 화등잔만큼 커졌다. 아무리 꽁꽁 싸매고 있어도 대표를 몰라볼 리가 없었다. 세트처럼 붙어 있는 한지석까지 발견하자 더욱 확신했다. 그녀는 놀란 입을 쉬이 다물지 못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선경은 책자를 훑기 바빴다.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한지석은 몰래 마스크를 끌어 내리며, 입술 위에 검지를 붙였다.

“조용히 둘러만 보고 나올게요. 다른 분들께도 아는 척 말아 달라 전해 주세요.”

“아, 네! 네!”

속삭이듯 말을 전하자 눈치 빠른 직원이 재차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상황을 알리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다행히 부탁이 잘 전달됐는지, 갤러리에 있던 직원들은 우선경을 보고도 모른 척해 줬다. 이를 알 길 없는 선경은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쓰며 정체를 감추는 데 신경 썼다. 이 와중에도 눈동자는 바쁘게 돌아갔다. 갤러리와 작품들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1층부터 3층까지 꼼꼼히 훑어보느라 시간이 꽤 걸렸다. 다시 밖으로 나온 뒤에야 답답했던 마스크를 벗었다. 공기 중에 노출된 선경의 두 뺨은 온통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있던 한지석은 콧잔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우선경의 얼굴을 구경했다. 그 역시 모자를 벗으며 눌린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소감이 어때?”

“완전 마음에 들어요, 딱 내가 꿈꾸던 느낌이라.”

“그야 네가 전부 기획한 거니까.”

“하아, 빨리 와서 일하고 싶다.”

갤러리를 올려다보는 까만 눈동자가 연신 반짝거렸다. 기대에 찬 우선경은 마치 물을 잔뜩 머금은 생화처럼 싱그러웠다.

너는 정말로 네 일을 좋아했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한지석은 조용히 웃음을 삼켰다. 어쩐지 입안이 썼다.

충분히 구경했는지, 우선경은 두 팔을 쭉 들어 올렸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며 담벼락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향해 물었다.

“배고픈데 밥 먹고 들어갈래요? 모처럼 나왔으니까 내가 살게요. 먹고 싶은 거 말만 해요.”

자리를 옮긴 곳은 타이 레스토랑이었다. 이국적인 인테리어만큼이나 메뉴들도 독특했다. 음식들의 이름조차 생소한 우선경과 달리 한지석은 여길 몇 번이나 와 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주문하기 시작했다.

“고수랑 고추 전부 빼 주시고요, 고추는 그릇에 따로 담아 주세요.”

특이한 요청 사항을 듣던 선경이 물었다.

“한지석 씨 고수 안 먹어요?”

“아니, 네가 싫어하잖아. 고추는 맵다고 다 골라내면서 가끔씩 찾기도 하고.”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우선경은 순간 하던 것을 멈췄다. 저도 모르게 물끄러미 한지석을 쳐다보고 말았다.

자신도 잘 모르는 취향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게 신기했다. 반면 자신은 한지석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걸 못 먹는지 조금도 아는 바가 없다.

“…….”

나도 예전엔 당신에 대한 모든 걸 꿰고 있었을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 내심 답답했다.

집에 돌아와서는 바로 목욕을 하고 나왔다. 오랜만에 한 외출인 데다 생각보다 오래 걸어서 그런지 가만히 있어도 노곤함이 몰려왔다.

우선경은 졸린 눈을 비비며 못다 한 공부를 이어 갔다.

아직 외워야 할 게 산더미였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미뤄 두자니 오늘 갤러리를 보고 온 뒤부턴 하루빨리 본업에 복귀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시간이 삼십 분 정도가 흘렀을까, 서재에서 잠시 급한 일을 처리하고 나온 한지석은 거실 소파에 앉은 채로 자고 있는 우선경을 발견했다. 어찌나 곤히 잠들었는지 불편한 자세에도 얼굴은 편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오 분 정도를 곁에서 지켜보던 한지석은 결국 그를 침실로 옮겨놓기로 결정했다.

무릎에 올려놓은 쿠션과 태블릿을 옆으로 치운 뒤, 그대로 안아 들었다. 잠에 취해 늘어진 몸은 한없이 가볍기만 했다.

잘 정리된 침대 위에 우선경을 눕혔다. 수면 등을 아주 약하게 밝히고 이불이 가슴 위까지 올라오도록 꼼꼼히 덮었다.

베개까지 편하게 받쳐 준 다음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해 주었다. 이제 막 물기가 말라 보송해진 머리에선 익숙한 샴푸 냄새가 났다. 앞머리를 넘겨 주는 손은 선경의 이마를 떠나질 못했다.

“…한지석 씨. 당신 참 좋은 사람이야.”

우선경이 중얼거렸다. 어루만지는 손길에 잠이 깼는지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있었다. 지석은 쓰다듬던 것을 멈추고 되물었다.

“내가 좋은 사람이라고.”

“응….”

말끝을 길게 늘이는 우선경은 여전히 반쯤 잠에 취해 있었다. 꿈과 현실 어딘가를 헤매는 듯 보였다.

“우리 결혼이 실패한 건… 아마 내 잘못도 크겠지. 나도 내 성격 알아. 내 고집 맞춰 주기도 힘들었을 거야.”

“절대 그런 거 아냐.”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꼬대하듯 입술만 느릿느릿 움직이며 이야기했다.

“기억 못 해서 미안해요. 그런데… 생각이 하나도 안 나는 걸 어떻게 해. 나도 내가 답답해….”

“…….”

“빨리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웅얼거리던 우선경은 고개를 옆으로 뉘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세를 고치듯 잠시 비비적거리더니 얼마 안 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완전히 잠이 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한지석은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움켜쥐고 있던 이불이 온통 땀으로 젖고, 구깃구깃하게 주름이 졌다.

“미안해…, 내가, 정말… 미안해. 선경아.”

지석은 침대 위에 고개를 처박고 사죄를 읊었다. 희미한 목소리는 대부분 이불에 삼켜져 들리지 않았다.

걱정과 불안에 좀먹혀 아직 제대로 사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우선경은 결혼 생활이 불행했던 이유가 저 때문이었을 거라고 말한다. 과연 모든 사실을 알고도 넌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에야 내가 저지른 과오를 털어놓을 수 있을까.

우선경과 다시 함께하는 순간이 너무나 기껍다가도, 순간순간 몰아닥치는 죄책감에 짓눌려야 했다.

지석은 침대맡에 엎드렸다. 숨죽인 채 선경의 손가락을 가만히 붙잡았다. 따뜻한 체온에 자꾸만 결심이 흔들린다.

“선경아, 나한테 조금만 더 시간을 줘.”

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조금이나마 더 지속됐으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네가 여전히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비록 내 죄책감과 업보가 끝도 없이 깊어지더라도.

바래서는 안 되는 욕심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한지석은 스스로에게 욕지거리를 뱉었다. 이런 마음을 품는 저 자신이 너무 역겹고 한심했다.

***

우선경이 갤러리를 방문했다는 보고를 들은 뒤로 패닉에 빠진 사람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벌써 그렇게 건강이 좋아진 건가, 이대로라면 금세 복귀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자 불안감은 걷잡을 수 없이 몸집을 불려 갔다.

유일하게 알고 있는 번호로 수백 번 전화를 걸었다. 발신 전용 번호라 당연히 연결은 되지 않았지만 집착과 같은 통화 시도는 계속됐다.

청부업자들은 완벽하게 잠적해 버렸다. 착수금은 이미 1억이 들어간 상태였고, 작업 성공 시 1억을 더 주기로 했지만 결국엔 실패하고 말았다.

우선경의 목숨은 참으로 질겼다. 6층에서 추락하고도 살아남을 줄은 몰랐다. 의식이 없는 상태가 오랫동안 계속되기만을 빌어 왔는데, 기어코 눈을 뜨기까지 했다. 아직 빼돌려야 할 우 회장의 컬렉션들이 한참이나 남은 상황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연결이 되지 않는 전화기만 붙들고 있다가 이번엔 다른 번호로 통화를 시도했다. 신호는 끝없이 이어졌다. 이번에도 포기하려던 찰나, 다행히 전화가 연결됐다.

- 어머, 김 수석 오랜만이네? 무슨 일로 전화를 다 줬어?

콧소리가 가득 실린 하이 톤의 목소리가 이토록 반가울 줄은 몰랐다. 김주원은 손에 쥔 핸드폰을 단단히 붙들었다. 긴장한 탓인지 손바닥이 땀으로 미끌거렸다.

“혹시 그 사람들 연락돼요?”

- 그 사람들이 누군데? 자기야, 안부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이러는 거 실례잖아. 안 그래?

뻔뻔스러운 송옥희는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얄밉게 살랑대는 목소리에 절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김주원은 두 눈에 불을 켜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이 소개해 준 그 청부업자들 연락되냐고! 대체 어쩔 거야, 일은 이딴 식으로 처리해 놓고 저들끼리만 숨어 버리면 다야? 내 돈이라도 다시 돌려주든가!”

결국엔 악에 받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김주원은 단정하게 묶고 있던 머리를 스스로 휘어잡고 헝클었다. 정신 나간 짓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다.

- 김 수석, 청부업자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혹시 요즘 뭐 약 같은 거 해? 사람이 이상해졌네?

송옥희는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김주원은 분에 못 이겨 핸드폰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또다시 한자리를 오가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언제 다시 수사망이 좁혀 올지 모른다. 어떻게든 대책을 세워 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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