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그렇게 보지 마요. 속이 조금 안 좋은 거뿐이니까.”
“넌 왜 항상 그렇게 무모해.”
구도경과의 기 싸움은 끝을 보지 못했다. 중간에 한지석이 나타나 알파와 대치 중인 우선경을 데리고 나간 탓이다.
장소를 의식해 큰 소리를 내진 않았지만 흉흉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숨길 순 없었다. 우선경을 둘러싸고 있던 알파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다른 형질인까지도 그의 분노한 감정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능수능란해진 통제 능력을 믿었지만, 다수의 알파들의 페로몬을 완전히 버텨내는 건 무리였다. 뒤늦게 올라오는 구역감에 우선경은 결국 도망치듯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온갖 추한 꼴은 다 보여 주고 있었다. 우선경은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종이 타월로 닦아내며 지친 숨을 삼켰다. 자신도 이번 일이 너무 무책임하고 감정적이었다는 것을 통감하고 있었다.
“나도 잘못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이미 충분히 힘드니까 당신까지 보태지 마.”
연이은 헛구역질로 기력이 다 빠져나갔다. 눈앞이 캄캄하다 못해 빙글 돌았다. 선경은 세면대를 양손으로 짚고 늘어지려는 몸을 겨우 추슬렀다. 다시 밖으로 나가기 위해 흐트러진 정신을 똑바로 챙겨 보려던 때였다.
“하아….”
뒤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지켜보던 한지석은 우선경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힘이 죄다 빠진 몸은 저항도 못 해보고 그에게 끌려갔다.
호텔 화장실 안쪽엔 숨겨진 곳이 있었다. 파티션처럼 벽이 세워져 있어 볼일을 보는 쪽에선 잘 보이지 않는 작은 휴식 공간이었다.
한지석은 비틀거리는 우선경을 아무것도 없는 대리석 테이블 위에 앉혔다.
벽에 등을 기대게 하고 자신의 넥타이를 끌러냈다. 매끄러운 실크천이 셔츠 깃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목 쪽의 단추를 연달아 풀었다. 셔츠를 벌리자 한지석의 목과 빗장뼈가 훤히 드러났다. 그는 우선경을 벽과 자신 사이에 가둬 두고 페로몬을 풀어냈다. 바싹 말라 있던 목 언저리엔 우물처럼 진한 페로몬이 고였다.
눈앞에 보이는 맨살에 우선경은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자신도 모르게 코를 킁킁대며 얼굴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비상식적인 행동에 깜짝 놀라 뒤늦게 허리를 뒤로 뺐다. 한지석은 선경이 물러난 만큼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어느새 등 뒤로 손이 감겨왔다. 상체가 엉겨 붙고 두 무릎이 마주 닿는 건 순식간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지금 이러면 안 될 것 같은데.”
“괜찮으니까 기대. 천천히 숨 쉬어 봐.”
“…….”
우선경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시키는 대로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한지석의 페로몬이 들어찬다. 신기하게도 울렁대던 속이 단번에 진정되고 있었다. 전신이 그의 향기를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솔직히 말하면 감격스러울 정도였다.
어느새 벌어진 셔츠 사이로 코를 박고 깊게 심호흡을 하는 중이다. 빠르게 뛰는 맥박과 따뜻한 체온이 맞닿은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덩달아 선경의 가슴도 널을 뛰었다.
한지석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마신 선경은 페로몬에 취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이상해, 왜 당신만 다를까. 당신 냄새는… 너무 좋아.”
“넌 원래부터 내 거만 좋아했어.”
“그래서 그쪽이랑 결혼한 건가.”
하하, 선경은 느리게 웃었다. 등에 감긴 팔이 부쩍 조여진다. 귓가엔 지석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한지석 씨.”
우선경은 눈을 감은 채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잘해 줘요.”
“지금은, 감당이 안 돼?”
“조금. 나도 모르게 당신이 좋아질까 봐 겁나.”
“…….”
말이 없던 한지석은 제게 안겨 있는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손길에서 그의 복잡한 심경이 묻어났다.
그때 벽 너머의 문이 벌컥 열렸다. 뒤이어 바닥을 내딛는 구둣발 소리와 젊은 남자들의 목소리가 소란스럽게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엉켜 있던 두 사람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변기가 있는 쪽에서 동시에 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왁자하게 떠드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으, 냄새. 뭔 놈의 파티가 알파 천지야. 토 나와.”
“여기도 알파 냄새 나는 것 같지 않냐? 무슨 호텔 화장실이 이래?”
“하여간 이 새끼들, 처음 와보는 티 내기는. 야 원래 이런 데엔 알파가 득실득실해. 잘나가시는 분들만 모아 놨는데 당연한 거 아니겠냐고.”
이들은 모두 고등학생들이었다. 오늘은 부모님을 따라 창립 기념 파티에 참석했다.
몸에 걸친 턱시도는 하나같이 새것이었고 디자인은 원숙했다. 앳된 얼굴들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았지만, 번지르르하게 차려입고 연회장을 누비는 것만으로도 벌써 성공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볼일을 다 본 녀석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변기 칸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슬쩍 뒷담화를 꺼냈다.
“오늘 우재경 고개 빳빳한 거 봤냐? 알파 포스 지리더라.”
“그 여잔 대체 누구랑 결혼할까?”
“왜, 관심 있어?”
“아니?!”
“와, 이 새끼 진짜 싫은가 봐. 꼬추 쪼그라들었어.”
“놀란 거 맞어? 원래 사이즈 아니고?”
프하핫, 웃음과 야유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애들답게 서로를 놀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누가 될지는 몰라도 우재경이랑 결혼하면 완전 쥐 잡듯 잡혀 살걸? 난 그렇게는 못 살아, 씨바 알파 가오가 있지.”
“야, 가오 포기하고 그 집 발 닦개 된 인간도 있잖아.”
“아… 그 우성 알파? 이름이 뭐였더라. 한…, 뭐였는데.”
“한지석?”
안겨 있던 몸이 덜컥 굳는다. 우선경은 어깨를 밀치며 흥분했다. 벽 너머를 노려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저것들이.”
“괜찮아. 그냥 있어.”
당장 뛰쳐나가려는 걸 한지석이 놓아주지 않았다. 어차피 어린 애들이다. 치기 어린 말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었다.
“오늘도 왔던데? 멀리서 봐도 뭐 완전 하인이 따로 없드만, 그렇게까지 굽히며 살고 싶나?”
“너 솔직히 말해 봐, 존나 부럽지? 오늘 계속 입 벌리고 쳐다봤잖아.”
“새꺄, 부러우면 부럽다고 말을 해. 음습하게 뒷담까지 말고.”
“시발, 하나도 안 부럽다고!”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원래 성공하려면 비위가 좋아야 한다고 그랬어. 뭐든지 잘 빨아 줘야 되거든. 재벌 발가락이든, 밑구멍이든.”
“웩, 역겨워.”
여러 명이 섞여 말하는 대화는 중구난방이었다. 시끄러운 목소리들은 그 뒤로 한참을 더 떠들다 사라졌다.
문이 닫히자 화장실 안은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그제서야 한지석은 붙잡고 있던 어깨를 놓아주었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이 공중에서 부딪혔다. 억지로 분을 삼킨 탓인가, 선경의 눈가가 벌겠다.
“늘 이런 취급 받아요?”
“오늘은 별로 심한 것도 아닌데.”
“한지석 씨는 화도 안 나요? 왜 저런 소릴 듣고도 참는 건데요.”
자신 대신 화를 내 주는 게 제법 기특했다. 우선경을 내려다보던 긴 눈매가 그윽하게 젖어 들었다.
“누가 그러더라고. 원래 사람들은 자기보다 잘난 사람 싫어한다고, 피해 입은 것도 없는데 트집 잡으려 안달을 낸다던데.”
“…….”
한지석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둥그런 이마를 쓸어 넘기던 손이 선경의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고, 손끝은 여린 눈 밑을 더듬었다.
“난 괜찮아. 이제는 익숙해졌어. 아무렇지도 않아.”
“…….”
“네 말대로 싹 다 밟아 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직까지 그러진 못하고 있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떤 웃음이 지어졌는지는 모르겠다. 우선경은 여전히 자신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얼굴을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었다.
한지석은 참지 못하고 선경을 와락 끌어안았다. 품 안에 들어온 몸은 어찌할 바를 몰라 팔을 늘어트린 채 얌전히 있었다.
“…….”
머뭇거리던 손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선경은 까만 재킷 위에 덮여 있는 넓은 등을 위로하듯 쓸었다.
어른스러운 모습 뒤에 숨겨져 있는 한지석의 위태로움이 무척이나 안쓰러웠다.
***
며칠 뒤 우선경은 경찰 조사를 받았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계속 미뤄 두었던 피해자 증언을 이제서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별 소득은 없었다. 뭔가 떠오르는 게 있다면 언제든 연락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뒤로하고 경찰서를 나왔다.
그 길로 성북동으로 넘어갔다.
우선경이 집에 들렀다는 소식에, 우재경과 한지석도 퇴근 후 본가로 향했다.
정원에서 맞닥뜨린 두 사람은 어색한 눈인사만 주고받은 뒤 말없이 본채로 걸어갔다. 고용인의 마중을 받으며 막 현관문을 열던 참이었다.
쿵쿵쿵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찌! 끼히!”
손에 오렌지를 움켜쥔 세 살배기 아기가 우재경과 한지석의 귀가를 반겼다. 뜻밖의 환대에 두 사람 모두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멈춰 서 버렸다.
뒤따라 온 우선경이 옹알이를 하는 조카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한쪽 골반에 통통한 두 다리를 끼운 자세가 제법 안정적이다. 방실방실 웃으며 기쁨을 주체 못 하는 아기에게 우선경은 나름 엄격한 목소리로 지적했다.
“아니지 우다솜, 삼촌이 뭐라고 가르쳐줬어.”
“찌- 산쬰!”
다솜이 뭉개진 오렌지를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오동통한 검지가 한지석을 정확히 가리켰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는 나름 그를 지칭한 모양이다.
“다솜아, 지석 삼촌 어서 와, 해 줘.”
“찌! 어사와아!”
혀 짧은 인사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내내 굳어 있던 한지석도 그제서야 긴장된 표정을 풀며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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