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12화 (112/127)

#112

모처럼 만의 가족 식사 자리였다.

삼 남매가 한자리에 모인 건 거의 일 년 만인 듯싶었다.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밥상머리 앞에서 기 싸움을 벌일 필요도 없었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밥이 제대로 넘어갔다.

우 회장이 앉던 상석 자리는 아기 의자가 차지했다.

가끔 말이 끊기고 어색한 기류가 흐르려고 하면 어김없이 다솜이가 나서서 잔망을 떨었다. 덕분에 식탁 위 분위기는 한결 부드럽게 풀려 가고 있었다.

후식을 먹으며 어설픈 숟가락질을 하는 아기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 있을 때였다. 혼자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재경이 찻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오늘 경찰서 다녀온 건 어땠어.”

“예상했던 대로지 뭐. 내가 기억하는 게 없는데 조사가 제대로 될 리가 있나.”

무사태평한 대답에 재경은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경찰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어떻게 된 게 다들 사건에 관심들이 없어! 아직까지 범인 흔적도 못 찾고 있는데 걱정도 안 되니?”

“뭐가 걱정이야. 경찰이 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수사하고 있던데 곧 잡히겠지.”

무신경한 대꾸가 이어지자, 우재경은 더 이상 잔소리하길 포기한 듯 머리를 가로저었다.

“갤러리는 언제부터 복귀할 거야?”

“글쎄, 다음 주쯤? 경영에 손대는 건 아직 어려울 것 같고… 그냥 가서 구경이나 하려고. 돌아가는 분위기도 파악할 겸.”

“잘 생각했어. 아무리 네 거라지만 준비 없이 경영 함부로 손대는 거 아니야. 당분간은 주변 도움 받으면서 배우는 데 집중해. 특히 회계 관련해서는 사람 너무 믿고 맡기지 말고, 항상 의심하면서 꼼꼼하게 따져 봐야 ….”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이미 우재경의 말을 반쯤 흘려듣고 있던 선경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비틀었다. 손으로 몰래 입가를 가렸다.

“…재경 누나, 점점 할아버지 닮아가는 것 같다.”

그러자 우선우가 몸을 뒤로 젖히더니 대놓고 화답했다.

“그치? 가끔 보면 빙의된 거 아닐까 의심될 때도 있어. 쟤 눈 뒤집어 깔 때 있잖아, 그때 들어오시는 게 분명해.”

“둘 다 시끄러!”

재경이 식탁을 손바닥으로 팡, 내리쳤다. 찻잔이 들썩일 정도로 큰 소리가 나자 놀란 다솜이 들고 있던 실리콘 수저를 놓쳤다. 아이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아래로 처지더니 결국엔 뿌에엥,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헉! 아니야, 아니야! 어머, 고모가 미안해. 우리 다솜이 혼낸 거 아니야.”

당황한 재경이 의자에서 일어나 허둥지둥 아기를 달랬다. 해본 적이 없으니 우는 아기를 품에 안는 것도 서툴렀다.

보기 귀한 광경에 우선우가 핸드폰 카메라를 켜며 그 모습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제 딸이 우는데도 웃느라 여념이 없었다. 역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건 다솜이가 최고였다.

이후 과일까지 챙겨 먹고 한 시간 정도를 더 머무른 뒤 집으로 돌아갔다. 한지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함께 귀가하던 길이었다.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음에도 도로에는 차가 많았다. 검은 세단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마침 정지 신호에 걸렸을 때, 말없이 운전대를 툭툭 두드리던 지석은 유난히 조용한 옆자리를 돌아봤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조수석에 앉아 있는 우선경은 사색에 잠긴 듯 창밖을 멍하니 내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 역시 혼잡한 감정이 스쳤다. 다시 고개를 바로 돌린 지석은 입술을 짓씹다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아이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어.”

“네?”

운전석 쪽을 돌아보는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그랬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느라 머리가 뒤로 젖혀진다. 헤드 레스트에 느긋이 기대 있던 우선경은 야경으로 물든 도로를 멍하니 쳐다보다 결론을 내렸다.

“안 좋아한다기보단, 관심이 없는 편에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

“…….”

“그런데 막상 보니까 예쁘더라고요. 조카라서 그런가, 아니면 딸이라서 더 그런 걸 수도 있고.”

운전대를 움켜쥔 손가락이 새하얗게 질려 갔다. 지석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 순간 어떤 말을 한다 해도 기억을 잃은 상대를 기만하는 것밖에 되지 않았다.

뱃속에서 15주를 채웠던 그들의 아기 역시 딸이었다. 작디작은 생명은 결국 대수술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버렸다.

성별에 관한 것은 손바닥만 한 분홍색 신발과 수첩에 적어둔 일기를 발견하며 알게 되었다. 기억을 잃은 선경은 자신이 유산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실제로는 그가 꽤 아이에게 진심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것도 모르고 아기를 지웠을 거라 함부로 속단했었다. 아이에 대한 미련이 없는 게 분명하다고 멋대로 착각하고 결론 내렸던 건 다름 아닌 한지석, 자신이었다.

‘형이 나한테 이러는 게… 내가 말 안 하고 아이 지운 것 때문에 그런 거면 그거….’

분명히 그때 우선경은 진실을 말하려고 했었다. 듣지도 않고 그를 밀어냈던 것 역시 본인이 한 짓이었다.

그날 널 문밖으로 내몰지 말았어야 했다. 네 말을 좀 더 들어 줬어야 했다. 너와의 관계를 함부로 끊어내지 말았어야….

“한지석 씨! 신호 바뀌었어요.”

톡톡 두드리는 손길이 생각에 잠겼던 한지석을 깨웠다. 순간 목구멍에 걸려 있던 호흡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눈썹 앞머리를 잔뜩 구긴 채 숨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요? 내가 아기 이쁘다고 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아무것도 모르는 우선경은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평온하게 웃었다.

“아니야, 그런 거.”

핸들을 쥐고 있던 손은 온통 땀에 젖어 미끌거렸다. 지석은 저릿저릿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지르고 가볍게 손을 풀었다.

미적거리자 어김없이 뒷차가 클랙슨을 울렸다. 그제서야 정신을 챙기며 서둘러 액셀을 밟았다. 다시 차는 출발했고 행렬을 이어갔다. 답지 않은 행동에 선경이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올려다봤다.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렸는데.”

“…미안해.”

“갑자기? 미안할 일이 뭐가 있는데요?”

“그냥 내가… 다 미안해.”

“오늘 진짜 이상하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선경은 생각할수록 황당한 듯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같은 공간에 있음에도 두 사람의 기분은 완전히 극과 극을 향했다.

“무슨 잘못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알겠으니까 표정 좀 풀어 봐요. 얼굴만 봐선 죽을죄를 지은 사람 같아서 나까지 기분 이상해지려고 그래.”

“…응.”

요구대로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풀어 보았지만, 차마 미소가 지어지지는 않았다. 웃는 건 도저히 못 할 짓 같아 결국 운전대를 잡지 않은 손으로 입가를 덮었다.

***

오랜만에 신혼집이 떠들썩했다. 주말 아침, 느닷없는 강 비서의 호신술 교육이 진행되고 있었다.

거실에 있는 소파까지 벽으로 밀어놓자 넓은 공간이 생겼다. 강 비서는 셔츠 소매를 팔꿈치 위까지 걷어붙인 채 열성적으로 강의를 이어 갔다.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도련님 아시겠죠! 가장 중요한 건 뭐다? 바로 상대방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겁니다!”

“…….”

하지만 수강생의 반응은 떨떠름하기만 하다.

요청하지도 않은 호신술을 알려 주겠다며 호들갑을 떨어 대는 게 영 못마땅했지만, 차마 필요 없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내내 지켜보던 참이었다.

땀으로 범벅된 강 비서는 비법을 전수해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열의가 불타올라 미처 선경의 표정을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자, 그럼 실습을 한번 해보죠. 누가 만약에 머리채를 잡았다!”

“대체 누가 내 머리채를 잡는다는 거예요.”

“제가 그래서 ‘만약에’라고 했잖습니까.”

“…….”

눈살을 구긴 선경이 고개를 획 돌렸다. 멀리 떨어져서 이 모습을 관전하고 있는 한지석에게 엄한 불똥이 튀었다.

“거기서 보고만 있을 거예요?”

“내 도움까지 필요해?”

“오, 이사님 도와주시면 감사하죠! 도련님이랑 둘이 하니까 영 협조도가 떨어져서 말입니다. 오셔서 같이 좀 해 주세요.”

강 비서까지 손짓하자, 한지석은 어쩔 수 없이 마시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설렁설렁 걸어와선 기꺼이 교육에 참여했다. 그는 친절히 시범 상대가 돼 주었다.

“잘 보세요, 누가 도련님 어깨에 팔을 걸친다 칩시다. 이렇게 손목을 딱 잡고! 그대~로 옆으로 돌아 나오면서 꺾어요. 그러면 대부분 아파서 허리를 숙이게 돼 있어요. 이때 체중을 실어서 누르면 끝! 쉽죠?!”

한지석까지 참여하자 내내 뚱해 있던 우선경도 슬그머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범을 지켜보더니, 느리고 어설프지만, 곧잘 동작을 따라 했다.

매의 눈으로 지도하던 강 비서는 제법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요, 이번에는 다른 걸 배워 볼게요. 만약에 누가 납치를 해 간다! 그런 상황이 생긴다면 보통 뒤에서 입을 확 틀어막겠죠?”

“…상황이 너무 극단적인데, 좀 더 실용적인 걸 배워야 되는 거 아니에요?”

“한 이사님. 잠깐만 제 뒤에 서 보실래요?”

강 비서는 이제 아예 우선경의 불만을 깡그리 무시하기로 했나 보다. 그는 대꾸도 하지 않고 한지석과 함께 시범을 보였다.

문짝만 한 체격을 가진 남자 둘이 서로 얽히고설켜 가며 동작을 재연하니 확실히 눈에 쏙쏙 들어오긴 했다. 설마 저걸 나보고 하라는 건 아니겠지, 선경은 삐뚜름한 자세로 몸싸움을 지켜봤다.

“자, 이렇게 하면 됩니다. 아시겠죠?”

“…….”

“그런 표정 하셔도 안 봐드립니다. 이거 무조건 습득하시기 전까진 안 끝내드릴 거예요.”

결국, 포기한 선경이 팔짱을 풀었다. 강 비서가 손짓하는 대로 털레털레 다가오더니 뒤돌아섰다. 물론 순응하는 것과 별개로 표정은 여전히 하기 싫은 티가 역력했다.

“제가 납치범 역할을 할게요. 뒤에서 잡아 볼 테니 한번 빠져나와 보세요.”

“나 진짜 세게 때릴 거예요.”

“당연하죠. 저도 진심으로 할 겁니다.”

둘은 비장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아무리 짜고 치는 상황극이라고 하지만 나름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나, 둘, 셋! 신호를 내뱉자마자 강 비서는 온 힘을 다해 우선경을 뒤에서 덮쳤다.

“흡! 으읍!”

상체를 포박하고, 입을 틀어막은 힘은 생각보다 더 억셌다. 비명은커녕 신음조차 내지르지 못했고, 강한 힘에 떠밀려 다리가 절로 휘청거렸다.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는 거친 공격에 우선경은 배운 걸 써먹지도 못하고 버티기에 급급했다. 강 비서는 상황극에 몰두했는지 예정에 없던 대사까지 내뱉었다.

“어디 겁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시나!”

‘오메가가 밤거리를 혼자 돌아다니고 그래요. 겁도 없이.’

“얌전히 따라와!”

‘쉬, 가만히 있어요. 우선경 씨.’

‘소리 질렀다간 그 예쁜 얼굴 다 찢어 놓을 거니까 눈치 챙겨요. 우리 얌전히 갑시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강 비서의 음성과 겹쳐졌다. 순간 섬뜩한 기억이 뇌리를 스쳤다.

흐읍, 으읍! 선경은 거세게 몸부림치며 얼굴을 누르는 손등을 긁었다.

두툼한 손바닥이 짓누르는 건 고작 입술과 아래턱뿐인데도, 마치 콧구멍까지 틀어막힌 듯 숨을 제대로 내쉴 수 없었다. 어디선가 차갑고 뻣뻣한 가죽의 촉감과 희미한 쇠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우선경!”

이상 증세를 발견한 한지석이 재빨리 강 비서의 손을 치우고 우선경을 끌어당겼다. 눈이 하얗게 뒤집힌 선경은 바닥으로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허억! 도련님!”

“선경아, 선경아! 정신 차려!”

경기를 일으키듯 전신을 떠는 모습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를 바닥에 반듯이 눕힌 뒤 상태부터 확인했다. 덜덜거리던 몸은 어느 순간 전원이 나간 듯 축 늘어졌다.

“왜, 왜 이러시죠?!”

“당장 차 시동 걸어요!”

이대로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한지석은 기절한 우선경을 들처 업고 현관문으로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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