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병원에 도착한 뒤로 정밀 검사를 받았지만 특별한 문제를 찾진 못했다. 잠깐 깨어났었던 우선경 역시 자신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떠올리지 못했다.
‘몰라, 그냥 놀라서 그랬나 봐요. 강 비서 힘이 워낙 세잖아요.’
그는 괜찮으니 걱정 말라며 맥없이 웃었다. 한지석은 새파래진 얼굴을 감싸 쥐었다.
‘큰일 나는 줄 알았어.’
‘나보다 그쪽이 더 놀란 얼굴이네. 온 김에 링거 좀 맞고 갈래요? 솔직히 말하면… 요즘 한지석 씨 엄청 피곤해 보여요. 낯빛도 안 좋고. 밥도 잘 안 먹잖아요. 그러다 조만간 쓰러질 거 같아.’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어서 누워 있어.’
이후 선경은 진정제를 맞고 다시 한번 깊이 잠들었다.
병실에서 내내 옆을 지키던 한지석과 강 비서는 다시 멀쩡해진 모습을 보고 나서야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어찌나 놀랐는지 가슴은 여전히 두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정도를 모르고 너무 심하게 굴었습니다.”
“강 비서 잘못만은 아니에요. 내가 더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어요.”
“아무래도 그때의 일이 트라우마로 남으신 것 같은데… 혹시 기억이 돌아오는 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죠.”
한지석은 곤히 잠들어 있는 선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새근거리는 숨소리에도 좀처럼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지석은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며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그 짧은 순간에도 탈력감이 어마어마했다. 우선경이 눈앞에서 잘못되는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
“대표님, 너무 보고 싶었어요!”
초면의 여성이 보내는 적극적인 애정 공세에 우선경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어깨가 그의 불편한 심경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윤진이는 꼭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았다.
이때다 싶었는지 다른 직원들까지 환영 인사에 동참했다. 두 팔을 벌리며 다가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케이크에 초까지 꽂아 내밀며 축하해 주는 있는 이도 있었다.
원래도 이렇게 직원들과 친근한 사이였던 건지, 이제 겨우 얼굴과 이름 정도만 외우고 있던 우선경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환대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결국 촛불까지 불었다. 박수가 터져 나오자 정말 책상 서랍 속에라도 기어들어가 숨고 싶었다. 우선경은 손부채질로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혔다.
물론 모든 이들이 다 낯선 건 아니다. 간혹 아는 얼굴도 섞여 있었다. 바로 김주원 같은 이들이었다.
“오늘부터 다시 복귀하시는 거죠?”
“복귀라고 하기엔 아직 좀 이르고…. 그냥 적응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저 신경 쓰지 마시고 다들 하던 대로 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도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와 주셔서 다행입니다.”
곁으로 다가온 김주원 역시 환영의 인사를 전했다. 단정한 인상은 여전했다. 조곤조곤한 말투와 행동 또한 점잖고 품위가 넘쳤다. 언제나 그렇듯 신뢰가 가는 모습이었다.
“김 수석님이 저 없을 동안 갤러리 맡아 주셨다면서요. 감사합니다.”
“이전에도 대표님 대신해서 해왔던 일인걸요. 앞으로도 걱정 마시고 맡겨 주세요. 대표님은…, 일단 회복하시는 게 먼저니까요.”
“그러게요. 저도 갤러리가 하나 더 늘었을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일단은 라움은 김 수석님께 계속 믿고 맡기겠습니다. 저는 당분간 시렌치움에 집중할게요.”
“네, 알겠습니다. 궁금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인사를 마친 김주원은 뭔가 더 할 말이 남았는지 주위를 맴돌았다. 어울리지 않게 눈치도 살폈다.
“저… 대표님.”
“네.”
“사고 관련해서는 여전히 기억이 안 나십니까? 얼마 전에 경찰서도 다녀오셨다면서요.”
“애석하게도 별로 좋아지진 않네요. 아무래도 기억이 안 나려는 모양이에요.”
“저런…. 빨리 기억하셔야 범인도 잡힐 텐데.”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우선경을 바라보던 김주원은 자신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질겅 씹었다. 예전에는 없던 습관이었다. 대표실에서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강 비서가 이 모습을 이상하게 바라봤다.
얼추 인사가 끝난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던 우선경은 직원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자, 그럼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시죠. 이제 그만 하던 일들 하세요.”
“아아….”
단호한 지시에 여기저기서 아쉬워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리를 정리한 사람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어느새 대표실에 남은 건 강 비서와 윤진이뿐이었다.
“대표님, 뭐부터 하실 건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나요?”
“글쎄요, 딱히 계획한 건 없는데.”
“혹시 몰라서 관심 가지실 만한 스케줄들을 한번 추려 와 봤어요. 오늘 기획팀에서 작가님 미팅한다던데, 같이 가 보실래요?”
개인 비서였던 윤진이는 지난 6개월간 거의 반 백수나 다름없었던 터라, 우선경의 복귀를 그 누구보다 반겼다.
“작가? 누군데요?”
관심을 보이자 윤진이가 재빨리 들고 있던 포트폴리오를 건넸다.
“이분이세요, 이번 연말에 시렌치움에서 전시회 하기로 계약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 토요일에 개인 일정으로 한국 들어오셨더라고요. 오늘 겸사겸사 식사 겸 대면 미팅 하기로 했습니다.”
“…괜찮네요. 아니 너무 좋은데요?”
화집을 넘겨보던 우선경은 순식간에 포트폴리오 속 작품에 빠져들었다. 작가의 이름은 생소했지만, 그의 화풍만큼은 마음에 쏙 들었다. 섬세한 색채와 과감한 빛 표현은 감탄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요즘 보기 드문 인상파 화가였다.
“그야 대표님이 직접 컨택하신 분이시니까요. 당연히 마음에 드시겠죠.”
“내가 섭외했어요?”
“네! 원래도 알던 사이라고 하셨잖아요.”
뜻 모를 소리에 선경은 눈을 깜빡거렸다.
알렌 민조 샤르티에. 33세. 한국계 프랑스인.
그는 최근 해외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현대미술 작가였다. 알파라는 점도 물론 눈길을 끌었지만, 무엇보다 과거 우선경과 인연이 있었다.
“작가님이 저한테 페로몬 샤워를 했다고요?”
“네. 그게 벌써 6년 전 일인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러고 보면 우선경 씨는 변한 게 거의 없어요.”
뚜렷한 이목구비에 동양적인 분위기가 살짝 배어 있는 프랑스 남자는 한국어 발음이 유창했다. 그는 선경이 기억하지 못하는 6년 전 추억을 언급하며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때도 살짝 까칠했었거든요. 아니다, 아예 철벽을 세웠죠. 내가 같이 밥 한 끼 먹자고 했는데 어찌나 단호하게 거절을 하시던지.”
“저희 대표님은 원래 까칠하신 게 매력이에요.”
“인정! 인정!”
같이 미팅을 나온 기획팀 직원들이 장난스레 말을 보탰다. 레스토랑에서 진행되는 미팅이라 그런지 거의 회식과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뭐라 반응해야 될지 몰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선경을 보고 알렌은 아이처럼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헤이즐넛 색을 담은 눈이 장난스레 휘어졌다.
“그때 샀던 제 그림 가격 많이 올랐죠?”
“아마도요.”
초창기에 그렸던 알렌의 작품은 지금 가격이 거의 수십 배로 뛰었다. 몇몇 그림은 0이 최소 3, 4개는 더 붙을 정도였다.
그의 초기 작품은 조금 더 날것의 느낌이 살아 있고, 표현도 과감한 편이라 희소가치가 높았다. 일부 애호가들은 알렌의 초기작을 수집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켜기도 했다.
“오랜만에 보고 싶은데, 다음에 구경 좀 시켜 줄 수 있어요?”
“그러죠. 아마 수장고에 보관 중일 겁니다.”
우선경 역시 궁금하던 차였다. 조만간 라움 갤러리 수장고에 방문해 알렌의 그림과 할아버지의 컬렉션을 두루두루 살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식사가 마무리되어 갈 즈음이었다. 알렌은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시며 말했다.
“사고를 당했다는 얘기 듣고 사실 많이 놀랐어요. 생각보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지만 기억을 잃은 건 유감이네요. 올해 초만 하더라도 계약 얘기 나누면서 참 즐거웠었는데…, 나 한국 오면 우선경 씨가 제대로 대접해 준다 약속했었잖아요. 그것도 기억 안 나는 거죠?”
“그 정도 약속은 기억 안 나도 지킬 수 있어요.”
“그럼 오늘 어때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데 술 한잔할까요?”
한지석은 늦게까지 회사에 남아 있었다.
요즘 이른 퇴근을 자주 하다 보니 검토해야 할 서류들이 줄줄이 쌓여 버렸다.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드르륵, 책상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강 비서가 보고차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조금 취하셨습니다.]
확인하고 있는 사이, 새로운 메시지가 연달아 도착했다.
[남아있는 인원은 갤러리 직원 두 명, 작가 한 명. 현재 작가와 따로 독대 중. 알파라고 합니다.]
[잘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핸드폰을 책상 위에 던지듯 내려놓고, 한지석은 잠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뒤로 젖혀진 머리가 벽에 걸려 있는 시계로 향했다. 어느새 시간은 열한 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술을 아직까지 마신다고.
근처 술집으로 장소를 옮긴다는 연락을 받은 게 벌써 두 시간 전이었다. 강 비서가 자석처럼 붙어 곁을 지키고 있을 테지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찌할 수 없었다.
늘어진 자세를 추스르고 다시 집중을 이어 가려고 했다. 그러나 같은 페이지를 연달아 두 번, 세 번 읽던 한지석은 결국 결재판을 덮고 쥐고 있던 볼펜을 내던졌다. 차 키와 핸드폰을 챙겨 들고 곧바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와인 바는 갤러리와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술집이 으레 그렇듯 가게 안은 어둑했고, 테이블 주변만 은근한 조명이 비쳤다. 누군가 직접 연주하는 재즈 피아노 소리가 어두운 공간을 농염하게 채웠다.
테이블엔 헤픈 웃음소리와 대화가 끊기질 않았다. 술자리가 길게 이어진 탓에 다들 취기가 올라 있었다. 빈 와인 병이 벌써 5개째였고, 손도 안 댄 안주도 가득했다. 우선경은 작가로 추정되는 외국인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파와 다름없는 장의자에 기대앉은 모습은 긴장감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옆으로 돌아앉은 채 등받이에 한쪽 팔을 걸치고 느긋하게 턱을 괴고 있는 우선경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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