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14화 (114/127)

#114

그 반응에 덩달아 신이 난 알파는 과장된 몸짓을 보탰다. 흥분한 탓에 한국어와 프랑스어가 두서없이 섞여 나왔다.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Je ne rigole pas, 진짜로!”

“그래요, 뭐. 믿어 보죠.”

곰곰이 말을 되새기던 우선경은 또 한 번 풋, 하고 싱거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와 마주 보듯이 몸을 틀고 있던 알렌이 뿌듯한 얼굴로 잔을 내밀었다. 두 개의 술잔이 부딪히며 특유의 청명한 소리가 났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오늘은 유독 술도 잘 들어갔다.

반쯤 남은 와인을 막 입술 사이로 흘려보내려는데 얼굴 옆으로 큰 손이 불쑥 나타나더니 와인 잔을 수거해 갔다.

“이제 그만 마셔.”

낯익은 목소리에 우선경은 고개를 뒤로 꺾었다. 코끝을 스치던 향기만으로 상대가 누군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하던 사람이 맞았는지 선경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언제 왔어요.”

“…….”

“표정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조도가 낮아 어두운 와중에도 딱딱하게 굳어 있는 얼굴은 선명했다. 한지석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건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누구신지.”

가뜩이나 눈에 띄는 남자의 인상적인 등장에 알렌은 눈치를 살피다 물었다. 우선경은 아주 간단하게 그를 소개했다.

“남편이에요.”

“아하! 안녕하세요!”

알렌은 서둘러 일어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어 정중하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어디서 배워 왔는지, 왼손바닥까지 배에 붙이는 게 완벽한 한국식 인사였다.

“알렌 샤르티에입니다.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한지석입니다.”

점잖게 통성명을 나누면서도 악수를 하는 손엔 힘이 꽈악 들어간다.

역시 기분이 별로인가 보군. 알렌은 애써 웃으며 콧등을 찡긋 구겼다. 얼얼해진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가 폈다.

“남편분이 친히 데리러 오실 줄은 몰랐는데, 우선경 씨는 이제 가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벌써요? 나는 조금 더 마셔도 되는….”

“술은 그만. 너 지금도 충분히 많이 마셨어. 차라리 물을 마셔.”

한지석은 직접 물 한 잔을 가져와 선경의 빈손에 쥐여 주었다. 그의 주량을 뻔히 아는 마당에 더 마시게 하는 건 자칫 위험할 수도 있었다.

“…….”

손에 들린 유리잔을 보던 선경은 할 수 없이 억지로 한 모금 삼켰다. 시원한 물이 텁텁한 입 안을 개운하게 적셨다. 덕분에 살짝 몽롱하던 정신이 깨어나는 것 같았다. 알게 모르게 조금 취해 있었나 보다.

“아… 그러네, 그만 마셔야겠다.”

입술을 핥던 선경이 혼잣말을 중얼대며 일어나자 한지석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외투와 핸드폰을 챙겼다. 손도 대지 않고 순식간에 귀가할 준비를 마쳤다.

“그럼… 가 볼게요. 작가님은 더 놀다 가세요.”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다음엔 내가 밥 살 테니까 또 시간 내줘요.”

가까이 다가온 알렌은 선경의 어깨를 잡고 프랑스식 작별 인사를 나눴다.

양 볼이 맞닿고 입술로 쪽 소리를 내는데 뒤에서 쳐다보는 시선이 불을 뿜는다. 인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한지석은 선경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깍듯한 인사와 달리 한지석의 표정은 칼을 문 듯 날카로웠다.

그는 우선경의 손목을 붙잡은 채 미련 없이 뒤돌아 가게를 떠났다. 남은 자리엔 오싹오싹한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잔류하고 있었다.

장난이 너무 지나쳤나, 알렌은 소름을 털어내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다시 테이블로 돌아갔다.

집은 하루 종일 비어 있던 탓에 썰렁한 한기가 돌았다.

한지석은 들어오자마자 불을 켜고 난방 버튼을 눌렀다. 넓은 집 안에 온기가 채워지려면 시간이 좀 필요했다.

그사이 우선경은 침실로 들어가 씻을 준비를 했다. 입고 있던 옷가지가 허물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하얀 알몸을 드러낸 선경이 방 안에 딸린 욕실 문을 열었다.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 수전을 올리자 위에선 금세 따뜻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 내디뎌 샤워기 아래로 들어갔다. 후끈후끈한 온수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흐르자 딱 기분 좋을 만큼 취기가 돌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왔을 땐, 썰렁하던 집 안엔 제법 훈기가 돌고 있었다. 선경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대충 말리고 가운에 매달린 허리끈을 한 번 더 꽉 묶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바닥을 맨발로 디디며 부엌으로 향했다. 곧바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고용인의 손길이 닿은 냉장고 속에는 모든 식재료들이 보기 좋게 정렬되어 있었다. 그 안을 둘러보던 선경은 음료수와 맥주가 늘어서 있는 칸에서 분홍색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도수가 약한 과실주였다.

음료수처럼 톡톡 튀는 탄산에 적당한 알코올이 들어가 있어 아쉬운 입안을 달래기엔 딱이었다. 차가운 과실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텅 빈 거실을 둘러봤다.

떠드는 사람이 없으니 집 안은 온통 조용했다. 와중에 서재에선 희미한 기척이 들려왔다. 발길은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빼꼼 넣어보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한지석이 보였다. 옷도 갈아입지 않았는지 답답해 보이는 넥타이까지 그대로다. 선경은 어깨로 문을 슬쩍 밀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스스럼없이 책상 위에 걸터앉자, 의자에 앉아 있던 한지석이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불만스러운 시선이 우선경의 얼굴과 손에 들려 있는 분홍색 캔에 차례대로 박혔다. 그러는 본인 또한 가득 따른 위스키 잔을 들고 있었다.

째려보거나 말거나, 우선경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옆에 놓인 양주병을 집어 들더니 감정하듯 라벨을 살폈다.

“뭐 마셔요? 아. 이거.”

예전에 권무열과 함께 마셔 봤던 술이었다. 선경은 보기만 해도 독한 맛이 떠오르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신 제가 마시던 과실주를 선심 쓰듯 내밀었다.

“내 거 먹어 볼래요? 맛있는데.”

인상을 쓰던 한지석은 캔을 가져가더니 단번에 술을 마셔 버렸다. 다 비워 버린 걸 증명하듯 캔을 구기고는 책상 아래에 있던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빈 깡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뭐야?”

그 모습이 어찌나 황당한지 선경은 쓰레기통을 내려다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맛만 보랬지, 다 마시면 어떻게 해요?”

“취했으면 곱게 들어가서 잠이나 자.”

“하! 참나!”

나는 뭐 술 못 마실 줄 아나? 홧김에 한지석의 술잔을 가져가 벌컥벌컥 들이켰다. 놀란 지석이 일어나 그의 행동을 막았을 땐 이미 반절이나 마셔 버린 뒤였다.

“씁, 하으!”

우선경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가슴을 내리쳤다.

시간차를 두고 독한 위스키의 후폭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분명 두어 모금 마실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술이 지나간 자리마다 뒤늦게 불길이 일었다. 화끈화끈 타들어 가는 느낌에 목욕 가운을 쥐고 흔들며 괴로움을 삭였다. 발가락이 절로 말려 들어갔다.

한지석이 어이없어하며 물을 찾아 건넸다. 고맙다는 말을 할 여유도 없었던 선경은 허겁지겁 목을 축였다.

생수 한 통을 다 비운 뒤에야 화끈거리는 식도를 겨우 달랠 수 있었다. 젖은 입가를 닦아내던 선경은 머쓱해졌는지 작게 중얼거렸다.

“미안, 해요.”

“정도껏 해.”

“한지석 씨, 오늘 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요? 왜 자꾸…!”

아까부터 묘하게 날 서 있는 태도에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소리를 쳤더니 급하게 마신 양주 탓인지 순식간에 머리가 띵해졌다.

책상에 앉아 있던 몸이 휘청하고 앞으로 고꾸라지자, 한지석은 급히 선경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마가 한지석의 가슴 위로 곤두박질치고 놀란 두 손이 한 박자 늦게 단단한 허리를 잡았다. 위험천만한 행동과 달리 반응은 이상하게 느리고 굼떴다.

철렁한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는데 머리 위에선 한숨이 터지는 게 느껴졌다.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난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이 정리가 안 돼서 그래.”

“뭐가 그렇게 복잡한데요.”

늘어진 발음으로 물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이 내려오며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양팔에 몸이 구속되는 느낌은 의외로 편안했고, 안정감마저 느껴졌다. 선경은 얌전히 얼굴을 기댔다.

잔뜩 구겨진 셔츠는 체취가 가득한 데다, 페로몬도 짙게 배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가슴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들이마셨다. 언제부터인지 한지석의 냄새를 맡는 게 익숙했다.

“…나랑 같이 사는 거 때문에 그래요? 혹시 내 얼굴 보는 게 힘든가?”

“…….”

“당신 나 보면서 되게 괴로운 표정 짓는 거 알아? 가끔씩…, 아니 사실은 자주 그런 생각 했어. 한지석 씨가 내색은 안 하지만 나를 싫어할 수도 있겠다고. 어쩌면 꼴도 보기 싫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눈치도 없이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한 건 아닐까….”

술기운을 빌어 내내 곱씹던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늘 친절하니까, 착한 사람이니까. 다 참고 나한테 억지로 맞춰 주고 있는 걸 수도 있겠다 싶더라고.”

얼굴에 마주 닿아 있던 상체가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아도 한지석의 표정이 그려졌다. 틀림없이 또 괴로움을 애써 숨기는 얼굴을 하고 있겠지. 보는 사람이 다 안타까워지도록 말이다.

“나한테 속지 마. 난 절대 착한 사람이 아니야.”

한참 만에 입을 연 지석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말했다.

“내가 너한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한다면 절대 그런 말 못 할 텐데.”

우선경은 기대 있던 얼굴을 들었다. 마주한 얼굴에서 형형하던 눈빛이 사라진 지는 오래다. 길게 뻗은 눈매엔 음울함과 고통이 가득했다. 바로 이거였다. 한지석이 자주 짓는 그늘진 표정이.

“네가 아무것도 모르고 태평하게 굴 때마다 나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 줄 알아? 아직도 너랑 헤어졌던 날이 머릿속에 생생해.”

“…….”

“이러면 안 되는 걸 아는데도 자꾸 욕심을 내게 돼. 그래 맞아, 사실 너 보는 거 힘들어. 헤어지자고 말한 거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어. 도무지 너를… 놓아줄 자신이 없어.”

무수히 상처 입혔던 날들이 후회스럽다.

사랑하지 않는다며 널 버렸던 그 순간을 돌이키고 싶다.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것도 모르는 네 곁에 부득부득 남아 있고 싶었다.

네가 날 두고 떠날까 봐 두렵다.

우선경은 말없이 손을 들어 괴로워하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살이 빠져 날카로워진 이목구비가 손바닥에 쓸렸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위로라고는 고작 이런 게 전부였다.

“뭐 어때. 욕심내도 돼.”

“…….”

“당신이라면 괜찮아.”

한지석은 제 뺨을 감싸진 선경의 손을 끌어오더니 손목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마셨다. 어둑하게 잠겨 있던 눈빛에 번뜩 힘이 들어갔다.

진하고 선명해진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물씬 다가오자 등골이 섬찟해질 만큼 전율이 끼쳤다.

우선경은 자신도 모르게 등을 뒤로 젖혔다. 바로 뒤가 책상이라 도망갈 곳은 없었다.

팔꿈치로 기울어진 몸을 겨우 지탱했다. 당장 누워도 이상할 것 없는 자세였다. 한지석은 상체를 숙이며 누를 듯이 압박했다.

탐색하는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그는 마치 먹잇감을 살펴보는 맹수 같았다. 아슬아슬하게 닿는 거리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처분을 기다렸다.

선경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입안의 고인 침을 삼키느라 목울대가 크게 요동쳤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던 탓인지 심장이 미치도록 들썩거리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위로 따뜻한 온기가 스치길 반복했다. 몇 번이나 닿았다 떨어지더니 결국은 긴 한숨과 함께 몸이 뒤로 물러났다. 얼굴 위로 내려앉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사납게 덮치던 페로몬도 순식간에 날아갔다. 마치 모든 게 착각이었던 것만 같았다.

“너 지금 취했어.”

“…….”

“이러면 안 돼.”

한지석은 본인 스스로에게 말하듯 중얼거리더니 어설프게 누워 있는 선경을 억지로 세워 앉혔다.

조금 흐트러진 가운 깃도 살뜰히 여며 주곤 아예 책상에서 일으켰다. 챙겨 주는 손길에도 우선경은 허망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이제 그만 가.”

“…….”

하지만 완벽한 축객령엔 할 말이 없었다. 안 가겠다고 버틸 수도 없어서 선경은 머뭇거리다 발걸음을 떼었다.

막 서재 문고리에 손을 올릴 때였다.

“선경아.”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우선경은 어깨를 화들짝 떨었다.

“…어?”

“문 꼭 잠그고 자.”

한지석은 아까 선경이 그랬듯이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온통 뒷모습만 보여 그의 표정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를 뒤로하고 서재를 빠져나갔다.

선경은 방 손잡이를 붙잡은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이 아쉬운 기분은 뭘까.

손잡이를 쥐고 있던 오른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고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침실 앞까지 도착했던 발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서재는 잠겨 있지 않았다.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책상에 몸을 기댄 채 병째 술을 마시고 있는 한지석이 보였다.

그는 왜 다시 왔냐고 묻지 않았다.

술병을 내려놓고 엉덩이를 일으킨 한지석은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뜨거운 손이 선경의 양 뺨을 붙잡았다. 오크 향이 물씬 풍기는 짙은 위스키 향이 맡아졌다. 몸이 저절로 뒤로 밀렸다. 조금 열린 서재 문이 등에 부딪히며 닫혔다. 쾅, 소리와 함께 성급하고 거친 입맞춤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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