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15화 (115/127)

#115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익숙한 광경이 보였다. 침실의 새하얀 천장을 올려다보던 선경은 이불 속에서 한참을 뭉그적대다 겨우 일어나 앉았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가 온통 지끈거렸다.

내가 진짜 다시는 술 마시나 봐라, 앞머리를 움켜잡고서 다짐했다. 잠시 눈을 꾹 감았다 뜬 선경은 정신을 마저 챙기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 안에 붙어 있는 화장실로 들어가 상태를 확인했다.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굴은 혈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창백했고, 눈 밑은 퀭해 유령 같았다.

간단하게 세안을 마친 뒤, 엉망으로 뻗친 머리에도 대충 물을 묻혔다. 입고 있던 파자마 차림 그대로 침실을 나왔다.

한지석은 주방에서 무언가를 만드느라 바빴다.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가 워낙 시끄러워 선경이 내는 인기척마저 묻혀 버렸다.

식탁 의자에 앉아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졸음이 완전히 가시진 않았는지 하품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눈물로 축축해진 눈가를 비비며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9시 30분, 그렇게 늦은 아침은 아니었지만, 한지석의 평소 출근 시간대를 한참이나 넘긴 뒤였다.

“회사 안 갔어요?”

바닥까지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제서야 한지석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역시 간밤의 여파가 남아 있는지 피곤해 보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후에 나가려고.”

“나도 그럴까 했는데. 잘됐다, 이따가 같이 나가요.”

흐아음, 한 차례 더 길게 하품하던 선경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아, 머리 아퍼…. 중얼거리는 소리가 손바닥 틈새로 새어 나왔다.

그때 식탁 위로 유리잔이 쓱 놓였다. 기척에 손을 내리자 수상하게 생긴 주스가 보였다. 갈색도 녹색도 아닌 오묘한 색의 주스는 표면에 거품마저 부글거렸다.

“이… 게 뭐예요? 색이 왜 이래?”

“양배추 주스. 숙취에 좋대.”

“…….”

그제야 주방에 놓인 재료들이 눈에 들어왔다. 잘린 양배추 옆으로 배와 조각난 사과, 토마토, 꿀통 같은 게 보였다. 다행히 양배추만 갈아 넣은 건 아닌 듯 보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맛이 기대되진 않았다.

한지석은 제 몫의 유리잔을 들고 식탁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본인 역시 주스는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연신 우선경의 얼굴만 살폈다. 뭔가 할 말이 있는지 어울리지 않게 눈치를 봤다.

“몸은 좀… 괜찮아?”

“속은 괜찮은데, 머리가 깨질 것 같아요. 마지막에 마신 것 때문에 그런가…. 아무래도 나는 양주가 잘 안 맞나 봐요.”

“…….”

한지석의 입술이 몇 번 들썩거리다 말았다. 그는 큰 손으로 입가를 문지르며 하고 싶은 말을 참았다. 한숨을 내쉬는 게 어딘가 내심 허탈해 보이기도 했다.

결국 둘은 마주 앉아서 수상한 양배추 주스를 꾸역꾸역 마셨다. 보는 것처럼 맛도 별로였지만, 아침부터 갈아 준 정성이 있으니 억지로 한잔을 모두 비웠다.

이후 욕조에 뜨거운 물을 받은 뒤 몸을 담가 땀을 한번 쭉 뺐다. 한결 가벼워진 컨디션으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머리를 만지고, 옷도 신경 써서 골라 입었다.

어느새 멀끔하게 채비를 하고 나온 우선경은 마찬가지로 준비를 마친 한지석과 함께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우선경은 여전히 평소와 다름없었다. 그는 오히려 한지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해맑은 얼굴로 무슨 걱정 있냐고 되물었다. 사람을 심란하게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오늘 야근해요?”

“봐서.”

“그러면 이따가 회사 찾아가도 돼요?”

느닷없는 데이트 제안에 한지석은 고개를 돌렸다. 놀란 표정이 여실했다.

“회사로 온다고?”

“야근하더라도 저녁은 먹을 거 아니에요. 한지석 씨는 바쁠 테니까 내가 갈게요. 밥 먹을 시간만 비워 놔요.”

정작 말을 꺼낸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만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굴었다.

“뭐야, 반응이 왜 그러는데. 설마 나랑 잠만 자고 끝낼 생각이었어요?”

“너 기억… 해?”

“사람을 무슨 습관성 기억 상실 환자로 만드네.”

말로는 툴툴거리면서 우선경의 입가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가득했다. 마침 지하 일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선 맑은 벨소리가 났다. 막 문이 열리려 할 때였다.

선경은 지석의 뒷덜미를 끌어당겨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여전히 멍해 있는 한지석의 뺨 언저리를 톡톡 두드렸다.

“이따가 봐요. 운전 조심하고.”

승강기 문이 열리자 앞에선 강 비서가 대기하고 있었다. 거구의 남자는 늘 그렇듯 활기 넘치는 인사로 하루를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 아니 오후입니다!”

“강 비서님, 점심 드셨어요?”

“네! 그럼요. 도련님, 오늘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뭐 좋은 일 있으셨습니까?”

“모르셔도 됩니다.”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한지석은 뒤늦게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유리창에 그의 얼굴이 비쳤다. 열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온통 불그스름했다.

우선경은 이제 막 야한 짓에 눈을 뜬 스무 살처럼 굴었다.

그는 차에 타자마자 입술부터 부딪혔다. 어찌나 키스하는 걸 좋아하던지 결국엔 저녁을 먹으러 가는 것도 포기해야 했다.

임원 전용 주차장은 제법 자리가 여유 있게 비어 있는 편이다. 짙게 틴팅까지 되어 있어 밖에서 누군가 훔쳐볼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한지석은 세례처럼 퍼부어대는 입맞춤을 받으며 인내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전날보다 더 버티기 힘든 시련이 그를 괴롭혀댔다.

허리를 비틀어야 하는 자세가 영 불편한 듯 여러 번 엉덩이를 옴짝대더니 우선경은 기어코 운전석까지 넘어왔다. 한지석은 난감한 듯 눈썹을 찌푸리면서도 운전석 시트 간격을 뒤로 밀었다.

“으음….”

콧소리가 섞인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젖은 숨소리에 차 안이 후덥지근해질 정도였다. 쪽쪽 빨아대는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오갔다. 뜨겁고 축축한 살덩이는 상대가 느끼는 부분을 능숙하게 핥아 댔다.

남자의 혀끝이 입천장을 긁었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선경이 허리를 들썩거렸다.

이건 너무 반칙이야, 가뜩이나 새로운 경험에 눈이 돌아갈 지경인데 한지석은 자신을 자극하는 방법을 아주 꿰고 있었다.

숨도 돌릴 겸 잠시 입술을 뗐다. 거리를 벌린 선경은 한지석의 두 뺨을 감싸 쥔 채 그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저 쳐다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한지석이 지독하게 잘생긴 탓도 있었지만, 빈틈없이 절제된 남자가 자신이 만지는 것만으로도 흥분하고, 관능적으로 변해 가는 게 보기 좋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래가 묵직해졌다.

선경은 살짝 풀린 눈을 하고 지석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결국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붙였다. 말캉한 살을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하아, 큰일 났다. 나 이거 중독될 거 같아.”

“그래서 이렇게 발정 난 것처럼 구는 거야?”

“으응. 그러니까 한지석 씨도 페로몬 풀어 줘.”

“안 돼.”

한번 깊은 스킨십을 나눠서인지 이제는 반말이 서슴없이 나왔다. 우선경은 철없이 보채며 제 페로몬을 풀풀 흘려댔다.

비좁은 차 안에서 엉켜 있는 것만으로도 바지가 터질 거 같은데, 아찔한 페로몬까지 더해지니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였다. 한지석은 지금 제 페로몬을 통제하고 있는 게 거의 기적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바지 아래에선 이미 성기가 딴딴해져 있었다. 좁은 공간 안에 갇혀 있는 게 답답한지 자꾸만 선경의 허벅지 밑을 찔러댔다. 선경은 알고도 모르는 척 제 몸을 건드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다.

“자꾸 뭐가 닿아.”

“우선경…. 아주 날 말려 죽일 작정이지.”

“응.”

웃느라 키들거리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크고 단단한 손이 선경의 뒤통수를 잡고 내리눌렀다. 틈 없이 맞붙은 입술처럼 몸도 쉼 없이 비벼졌다. 흥분된 숨소리가 다시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띠리리릭-

그때 귀에 쏙 박히는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운전석에 기대 있던 지석이 차에 연결된 화면으로 힐끗 시선을 돌렸다. 저장되지 않은 연락처였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대충 예상은 갔다.

사고가 벌어진 날 이후로 김현진의 연락처는 차단해 둔 상태다. 그 뒤부터 현진은 종종 알 수 없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다. 몇 번 겪고 나니 아예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그게 하필 선경과 같이 있을 때 또 걸려 올 줄은 몰랐다.

벨 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몸 위에 앉아 있던 선경이 뒤를 돌아보려 했다.

놀란 지석은 선경이 고개를 돌리지 못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오른손이 성급하게 핸드폰을 찾아 전원을 꺼버렸다.

“뭐야. 무슨 전화길래 그렇게 끊어.”

“그냥 광고 전화야.”

신경 쓰지 마, 지석은 양팔로 제 품 안에 들어온 몸을 한가득 껴안았다. 선경이 답답하다며 짜증을 냈지만 놓아주지 않았다.

가느다란 목에 얼굴을 파묻은 채 우선경의 냄새를 흠뻑 맡았다. 이렇게 해도 어째선지 불안함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죄지은 것처럼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애써 모른 척했지만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불현듯 쪼아댔다.

잊으면 안 된다. 우선경이 기억을 되찾기 전에, 꼭 내 입으로 죄를 털어놓아야 했다. 그가 용서해 주지 않더라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한지석 씨, 왜 이렇게 떨어요? 지금 추워?”

잔떨림이 느껴지자, 선경은 오히려 몸을 더 가득 끌어안고 두 팔로 지석의 등을 비볐다. 따뜻한 걱정과 온기가 고스란히 전달됐다.

“집에 갈까?”

“…그래.”

우리 집으로 돌아가자. 지석은 떨리는 입술을 움직이며 겨우겨우 대답했다.

회사 주차장에서 허비한 시간이 꽤 길었다. 배가 상당히 고팠지만, 식당에 들르기엔 애매한 시간대였다. 선경이 먹고 싶다 하여 드라이브 스루로 햄버거를 사 갔다.

집에 도착한 뒤 각자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늦은 저녁을 먹으며 같이 영화도 한 편 보니 시간은 어느새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양치까지 개운하게 끝마치자 어느덧 잘 시간이었다. 거실의 불을 모두 끈 한지석은 당연하게 서재로 가려 했다. 물을 마시고 있던 선경이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아 세웠다.

“어디 가요?”

“자러.”

“침대 넓어. 같이 자요.”

별로 강압적인 부탁도 아니었건만, 발길은 어느새 침실로 이어졌다. 저조차도 어이가 없어 지석은 소리 없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오랜만에 누워 보는 킹사이즈 침대는 우선경의 말대로 넓고 폭신했다. 서재에 놔둔 비좁은 접이식 침대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무척 낯설었다. 몇 년이나 살을 맞대고 산 부부 사이였지만 그동안 떨어져 지낸 시간도 감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앞으로는 그냥 여기서 자요. 침대가 너무 넓잖아. 혼자 쓰니까 이상해.”

“…고문이 따로 없네.”

“나랑 같이 자는 게 고문이라고?”

“어.”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우선경이 혼자 의미를 파악하고 있을 때였다. 누워 있던 지석이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는 대뜸 선경을 깔아 눕히듯 자세를 잡았다.

“네 옆에서 그냥 잠만 못 자.”

“…….”

“어제는 내가 봐줬잖아. 오늘까지 버틸 인내심 같은 거 없어.”

어젯밤은 기억이 없는 그를 배려해서 삽입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밝아오도록 서로의 몸을 물고 빨고, 주물러 대면서 몇 번이나 사정에 이르렀다.

물론 우선경의 입장에선 그 역시 자극적인 경험이었겠지만, 한지석은 달랐다. 알파의 욕구는 고작 손장난이나 키스 따위로 채울 수 없었다. 그는 두 사람이 수없이 몸을 섞었던 날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느새 상체를 일으켜 세운 선경은 눈을 내리깔았다.

“…나한테 넣겠다는 거지?”

“…….”

“세상에 이 큰 걸.”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