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18화 (118/127)

#118

“…석 씨! 한지석 씨!”

놀란 선경이 누워 있는 지석을 흔들어 깨웠다. 끙끙거리는 소리를 내길래 처음에는 그냥 잠꼬대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이어 땀을 비 오듯 흘리고, 호흡 곤란이라도 온 사람처럼 몸을 비틀자 가만히 놔둘 수가 없었다. 어깨를 흔들어도 일어나지 않아 뺨을 수차례 때렸다. 짝, 소리가 나도록 갈겼을 때가 돼서야 한지석은 눈을 떴다.

“허억… 헉….”

“왜 그래요, 꿈꿨어요?”

“…선경아, 내가… 잘, 못했어.”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세상에, 땀 좀 봐…. 괜찮아요? 잠깐만 일어나 봐요.”

그 잠깐 사이에 식은땀으로 온몸이 젖어 있었다. 걱정이 된 선경은 물을 챙겨 오기 위해 몸을 돌렸다. 침대 아래로 다리를 뻗으려는데 한지석이 허리에 손을 감으며 그를 붙잡았다.

“가지 마, 내가, 잘못했어.”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래.”

결국은 다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도 못 하고 매달리는 남자를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었다.

끙끙대는 한지석을 아이처럼 끌어안고 달랬다. 덩치도 커다란 남자가 품속으로 엉겨 붙어왔다.

“뭐야, 애기도 아니고. 나랑 헤어지는 꿈이라도 꿨어요?”

“제발…. 선경아, 잘못했어.”

“알겠어. 다 용서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자요.”

튼실한 팔뚝을 토닥토닥 두드렸다. 어르고 달래 주는 왼손엔 결혼반지가 제대로 끼워져 있었다.

얼마 안 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진이 빠졌는지 한지석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무겁게 늘어진 몸을 똑바로 눕혔다.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주고, 이불을 가슴 위까지 끌어올려 덮어 주었다.

아닌 밤중의 소란에 정작 우선경은 잠이 홀딱 깨고 말았다. 다시 누워 봤자 잠들기는 그른 것 같아 선경은 상체를 조금 세워 기대앉았다.

잠든 한지석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겁이 나면 악몽까지 꾸는 걸까. 그의 불안이 심상치가 않았다. 선경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길게 한숨 쉬었다.

“당신… 도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그래.”

만약에 정말 기억을 되찾으면 한지석의 걱정처럼 그를 혐오하게 될까.

선경은 부디 그러지 않기만을 바랐다.

***

“나 거의 도착했어.”

- 혹시 xx문고 보여? 그 건물로 오면 돼.

핸드폰을 들고 있던 우선경은 주변에 보이는 건물들을 훑었다. 권무열이 말하는 대형 서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어, 저기 있네.”

광화문은 오늘따라 인파로 북적였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지나다니는 사람들과 몸이 턱턱 부딪힐 정도였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야?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 무슨 집회 한다고 그러더라고. 일단 서점에 가 있어. 쿨럭! 나 금방 정리하고 내려갈 테니까. 쿨룩!

감기에 걸렸다던 권무열은 중간중간 폐병 환자 같은 기침을 쏟아냈다. 예사롭지 않은 소리에 선경은 들고 있던 전화기를 잠시 귓가에서 떼어냈다.

“너 괜찮은 거야? 곧 죽을 것 같은데.”

- 괜찮, 쿨럭, 쿨럭! 10분만 기다려 줘.

“알겠어, 천천히 일 봐.”

마침 신호가 바뀌었다. 통화를 마친 우선경은 핸드폰을 손에 단단히 쥐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횡단보도를 건너는 그의 표정은 사뭇 즐거워 보였다.

오늘은 한지석과 재결합하게 된 사연을 소상히 고해바치기 위해 권무열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보단 출퇴근이 자유로운 편이라, 이번에는 선경이 찾아가기로 했다.

무슨 집회 때문인지는 몰라도 광화문으로 들어서는 넓은 8차선 도로는 대부분 통제되고 있었다. 줄지어 선 경찰들이 시끄럽게 호루라기를 불며 진입하려는 차들을 우회시켰다.

다행히도 권무열의 회사는 바로 코앞이었다. 절대 안 된다는 강 비서를 설득해 근처에 내려 달라고 했다.

늘 차로만 지나다녔던 광화문 거리를 직접 걸어 보는 경험은 나름 색다르고 좋았다. 물론 사람이 너무 많아 정신이 없긴 했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탓인지 거슬릴 게 없었다.

지하층을 통째로 사용 중인 대형 서점은 곧바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가 따로 마련돼 있었다.

서점 입구치고는 조명이 어두웠다. 약간 굴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라 머뭇거리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선경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저기요, 이거 떨어트리셨는데요.”

“네?”

처음 보는 남성이 손을 불쑥 뻗었다. 어이없게도 남자가 내민 것은 고가의 명품 시계였다. 갈색 가죽 끈에 금색의 베젤이 둘린 시계는 선경이 알고 있기론 한국에서 쉽게 구하기 힘든 브랜드였다.

“…제 거 아닌데요.”

“그쪽 거 맞을걸요. 잘 확인해 보세요.”

남자는 재차 시계를 내밀며 말했다. 어딘가 수상한 느낌에 저절로 뒷걸음이 쳐졌다.

우선경이 경계심을 보이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손을 내렸다. 들고 있던 시계는 다시 점퍼 주머니에 무심히 쑤셔 넣고는 캡 모자를 눌러썼다.

다소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휘어지며 흐드러지게 웃는다.

“혹시 나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아니요.”

“이래도?”

남자가 오른손으로 자신의 하관을 덮었다. 드러나는 건 쭉 찢어져 사나워 보이는 눈뿐이다.

선경은 의도를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모른다고 했잖아요. 장난치지 마시고 갈 길 가시죠.”

“흐음, 뭐… 그래요. 몰라보니 다행이네. 계속 그러고 다니는 게 좋을 겁니다.”

남자는 모호한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친구한테 인사하듯 손을 위로 뻗어 흔들더니 수많은 인파 속에 섞여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

우선경은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 확실한데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의 기이한 행동 때문일 거라 생각하며 애써 발길을 돌렸다.

서점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꽤 가팔랐다. 하지만 통로가 워낙 넓었고 사람들은 양방향으로 질서정연하게 오갔다.

계단을 천천히 내려가던 우선경은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손잡이를 붙들고 잠시 멈춰 섰다. 참아 보려고 했지만 무릎이 후들거려서 도저히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허억, 헉, 하아.”

이러다 심장이 터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제멋대로 뛰어대는 심장 박동에 호흡이 달리고 가슴이 조여왔다. 선경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억지로 숨을 고르게 내쉬려 노력했다. 그 짧은 순간에 식은땀이 비 오듯 쏟아져 전신을 뒤덮었다.

“…저기.”

뒤따라 내려오던 행인이 선경의 상태를 보고 걱정이 됐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걸며 어깨에 살짝 손을 짚었다. 예기치 못한 접촉에 선경은 오히려 까무러치듯 놀라며 몸을 떨었다.

“허억!”

마치 자신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다. 어쩌면 흉기를 꺼내 예고도 없이 찌를지도 모른다. 뒤에서 목을 조를지도 몰랐다. 주변을 오가는 모든 사람이 다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우선경은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의 광적인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오히려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하기 바빴다.

중간에 몇 번이나 다리를 접질리고, 넘어졌다. 선경은 한쪽 발을 절뚝거리면서도 뭐에 쫓기듯이 허겁지겁 도망쳤다.

서점은 밝고 사람도 많았다.

이곳에 숨어들면 안심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칸칸이 막혀 있어 더 불안함을 부추겼다. 미로처럼 되어 있는 코너들이 마치 언제가 미친 듯이 헤매었던 공사장을 보는 것 같았다.

결국 가장 안쪽 모퉁이까지 들어갔다. 그곳은 사방이 책장이었다. 수백 권의 외국어 교재가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지만, 선경의 눈엔 그게 노출된 콘크리트 외벽으로 보였다.

더는 갈 곳이 없다는 생각에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두 손으로 덮었다. 자꾸만 보이면 안 되는 것들이 겹쳐 보였다. 선경은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손님, 괜찮으세요!?”

근처에서 책 정리를 하던 서점 직원이 그 모습을 보고 다가왔다. 한눈에 봐도 도움이 필요해 보였지만, 어떻게 대처할 바를 몰랐다.

“허억, 헉, 사, 살려, 주세요.”

애원하는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숨이 꼴딱 넘어갈 것 같았다. 선경은 여전히 경기하듯 몸을 떨었다.

때마침 바닥에 떨어져 있던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권무열의 전화였다.

눈치를 보던 직원이 대신 전화를 받아 이곳의 상황과 위치를 설명했다. 서점에 막 들어왔던 터라 권무열은 금방 우선경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

“선경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멀리서 권무열의 모습이 보였다.

감기에 걸린 그는 검은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 뛰어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쩐지 아까 봤던 남자와 겹쳐 보인다. 이제서야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어디선가 환청이 들려왔다.

‘혹시 나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요. 너무 억울하면 유언이라도 남기시든가.’

‘아프지 않게 죽여 줄게요.’

‘벌써 임신 14주네요. 공주님도 잘 크고 있어요.’

‘우선경, 너랑 결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우리가 가족이긴 해?’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난 너랑 함께 있으면 숨 막혀.’

‘제발 나 좀 살려 주라. 이제 그만 나 좀 놔줘.’

한꺼번에 몰아닥치는 6년 치의 기억은 마치 쓰나미 같았다. 겁에 질린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졌다.

혼절해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우선경을 간발의 차로 받아냈다.

“119 불러 주세요! 빨리!”

권무열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하루하고 반을 꼬박 잠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익숙한 병원 천장이 보였다.

모든 기억이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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