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정보원이 미리 알아본 정보는 거기서 끝이 났다.
“그건 정말, 짐작도 못 했던 얘기네요.”
선경은 쉽사리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얼이 나간 표정으로 한참 동안 바닥을 응시했다. 김주원의 과거가 놀랍기도 했지만, 의심하기 시작하자 되짚어 볼수록 걸리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는 이마를 짚은 채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이윽고 결단을 내렸는지 구부정하게 숙이던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김주원 씨 재산 현황, 묶여 있는 금전 관계, 최근 만나는 주변인들 하나도 빠짐없이 알아봐 주세요.”
“네.”
갤러리와 관련된 부분은 자신이 직접 살펴볼 예정이다. 보는 눈이 많으니 회계 쪽으로는 크게 손댔을 것 같지는 않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건 수장고 쪽이었다.
“혹시 미술품 감정 전문가 알고 계시는 분 있습니까? 실력 확실한 사람으로요.”
“예전에 같이 작업했던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데 실력은 정말 좋습니다. 다만 섭외가 쉽지는 않을 겁니다.”
“조건은 원하는 대로 다 맞춰 줄 테니 빠른 시일 내에 만나 봤으면 한다고 전해 주세요. 수장고에 있는 작품들 전부 살펴봐야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정보원이 돌아가고 난 뒤, 혼자 거실에 남은 우선경은 남겨진 자료를 하나로 모았다.
다시 한번 꼼꼼히 읽어 보느라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다. 집중을 하다 보니 세 시간이 넘도록 핸드폰도 한번 들여다보지 못했다. 결국엔 한지석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 별일 없어?
“어…. 다시 잤어, 일찍 일어났더니 졸려서.”
- 잘했어. 귀찮다고 거르지 말고 점심도 잘 챙겨 먹어. 벌써 12시야.
지나친 다정에 선경은 마지못해 웃음을 지었다. 물론 통화하는 상대방은 그의 씁쓸한 표정을 볼 수 있을 리 없었다.
“한지석 씨. 오늘 몇 시쯤 와?”
- 글쎄. 일이 밀려 있어서 정시 퇴근은 어려울 것 같은데. 아마도 8시쯤.
“으응, 괜찮네. 저녁 같이 먹자. 끝나면 전화해.”
우선경은 흘낏 눈을 치켜뜨며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 한지석이 귀가하기 전 끝내 놓아야 할 일을 떠올렸다.
***
공사 현장 앞엔 허름한 식당이 있었다. 꼬질꼬질 빛바랜 간판에는 상호명도 아닌 가정식 백반이라는 글자만 덜렁 쓰여 있다. 한 끼에 단돈 오천 원, 이곳을 이용하는 손님은 대부분 현장에서 일하는 건설 노동자들이다.
오후 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점심 피크 타임이 지나고, 마지막 손님이 막 빠져나간 참이다.
사람은 없었지만, 한차례 전쟁을 치른 듯 가게 안은 엉망이었다. 테이블 위엔 미처 치우지 못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다지 넓지 않은 가게 안엔 온갖 냄새가 혼재되어 있었다. 오늘 메인 반찬으로 나온 콩나물 불고기와 시래기 된장국, 그리고 인부들이 흘리고 간 퀴퀴한 땀내와 뿌연 흙먼지까지. 과히 입맛을 돋우는 냄새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일한 지 두 달쯤 지난 김현진은 이제 제법 식당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불쾌한 냄새도 오래 맡고 있다 보면 코가 무뎌졌다. 그는 손님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묵묵히 치웠다.
가게 문에 매달린 종이 딸랑거렸다. 뒤늦게 찾아온 손님은 카운터에 서서 사장과 이야기를 나눴다. 식사를 하려나 보다 싶었던 현진은 잽싸게 빈 그릇들을 겹쳐 쌓았다. 금세 자리 하나를 깨끗하게 닦아 놓고서 고개를 들 때였다. 그의 시야에 뜻밖의 인물이 들어왔다.
“점심 먹었어요?”
“…….”
얼어붙어 있는 김현진과 달리 우선경은 마치 약속이라도 하고 온 사람처럼 담담했다.
그는 어울리지도 않는 낡은 의자를 끌어내 앉았다. 현진이 방금 치운 테이블이었다.
“앉아요, 그쪽 것도 방금 계산했으니까.”
고작 밥값이 아닌 하루 치 장사 매출을 긁었다. 뜻밖의 횡재에 사장은 신바람이 났다. 통이 큰 손님을 대접한답시고 냉장고에 고이 모셔 뒀던 반찬도 꺼내고, 하루 종일 재탕했던 국 대신 된장찌개도 새로 끓였다. 계란 후라이까지 하는지 주방 안쪽에선 자글자글 기름 튀는 소리가 들렸다.
멀뚱히 서 있기도 뭐해 현진은 눈치를 보다 자리에 앉았다. 딱히 할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만 흘렀다. 다행히 사장이 직접 쟁반을 들고 찾아와 숨 막히는 정적을 깨 주었다.
아까와는 사뭇 다른 상차림이 등장했다. 장사할 때는 늘 하얀 플라스틱 식판을 썼었는데 어디서 났는지 국그릇에, 밥그릇에, 납작한 반찬 그릇까지 즐비하게 깔렸다. 물론 이마저도 오래돼서 색이 누렇게 바랜 건 마찬가지였다.
“아유,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 손님 맛있게 잡수세요! 드시고 모자라면 언제든 얘기하시고! 현진이도 천천히 많이 먹어라!”
“잘 먹겠습니다.”
우선경은 공손히 인사하며 수저를 들었다.
빈말이 아니라 그는 정말로 식사를 시작했다. 젓가락으로 밥을 뜨고, 나물 반찬도 곧잘 집어 먹었다. 허름한 백반집에서, 가짓수도 얼마 안 되는 맛대가리 없는 반찬을 곁들여 식사하는 모습이 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김현진은 이 상황을 도통 이해할 수 없어 입을 벌린 채 쳐다봤다.
“여긴… 왜 온 거예요.”
“밥 먹고 얘기하죠. 배 안 고파요?”
꼬르륵, 그의 말에 호응하듯 뱃가죽이 허기진 소리를 내었다. 가뜩이나 공복인데, 눈앞에 따끈한 밥상이 있으니 위장이 요동치지 않고 배기겠는가. 참아 보려고 해도 절로 침샘이 흥건해졌다.
김현진은 결국 수저를 들었다. 주눅 들고 싶지 않아 일부러 밥을 크게 퍼먹었다. 볼이 미어터져라 반찬도 밀어 넣었다.
말없이 식사를 이어 가는데, 안 보려고 해도 눈은 자꾸만 앞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우선경은 마치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 같았다. 같은 밥, 같은 반찬을 먹는데도 젓가락질하는 모습은 깔끔했고, 소리도 내지 않고 밥을 씹었다.
밥을 한가득 입에 물고 우물거리던 현진은 불현듯 비교되는 현실에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둑이 터지듯 흘러나오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으며 입에 든 밥을 꿀떡 삼켰다. 온통 짭짤하고 서러운 맛이 났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예요. 내 꼴 보고 비웃고 싶었어요? 이렇게까지 안 해도 당신이 나보다 잘난 거 충분히 알아요.”
“…….”
“…왜 자꾸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어요.”
우선경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목울대가 조금 움직이더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우리가 솔직히 얼굴 맞대고 밥 먹을 사이 아니라는 거 아는데…, 그래도 한 번쯤은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어요. 부탁할 것도 있고.”
그는 눈물로 범벅이 된 김현진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았다. 휴지를 몇 장 뽑아 건네주며 말을 이어갔다.
“김현진 씨를 조금 오해했던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안 할 거예요. 솔직히 그쪽도 잘한 건 없으니까… 일이 이렇게 된 것엔 김현진 씨 잘못도 크잖아요.”
현진은 줄줄 흐르는 콧물을 들이켰다.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는 결국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서인 건가, 싶었다.
하지만 거기다 대고 감히 대들 자격은 없다. 진지하기만 한 상대의 표정에 결국 머리를 푹 숙이며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선경을 만나면 꼭 한번 제대로 사과하고 싶었다.
“지석이 형은… 한 번도 저를 이성으로 본 적 없었어요.”
“…….”
“혼자 좋아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제가 그러면 안 됐는데… 죄송해요.”
“난 별로 용서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용서 안 해 주셔도 괜, 괜찮아요.”
침묵이 내려앉은 식당 안에 김현진의 훌쩍거리는 울음소리만 가득했고, 사장과 주방 이모는 구석에 숨어 뒷말을 쑥덕거리기 바빴다. 가게 안을 조용히 둘러보던 선경은 한숨을 길게 뱉었다.
“김현진 씨한테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혹시 가족한테서 독립하고 싶지 않아요?”
“독… 립이요?”
뜬금없는 질문에 놀란 현진이 남은 콧물을 킁 들이켰다. 눈물로 범벅된 얼굴은 딱 그 나잇대답게 서툴고 어려 보였다.
“외삼촌과 함께 살고 있다고 들었어요. 아니 함께 사는 거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외삼촌이 진 빚 갚으면서 억지로 잡혀 산다던데.”
“…….”
“이렇게 지내는 거 만족해요?”
“…아니요.”
무릎 위에서 꿈지럭거리는 손은 현진의 말간 얼굴과 달리 여기저기 트고 갈라져 있었다. 스무 살이 짊어지기엔 처한 현실이 너무 혹독했다.
“그 집에서 나와요. 새로운 동네에서 자취방 얻고, 제대로 된 직장에서 대우받으며 일해요.”
“그게 말처럼 쉬운 게….”
“내가 도와줄 테니까 걱정 말고.”
우선경은 딱 잘라 말했다.
“혹시 부모님, 만나고 싶어요?”
그것까지 도와주나 싶었던 현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전 부모님 없어요.”
“어딘가엔 계실 텐데.”
“아뇨, 저한텐 이미 없는 사람들이에요. 죽었든 살았든 상관없어요. 궁금하지도 않고요.”
가족에 대한 소신만큼은 확고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될까, 어쩐지 김현진의 말을 듣고 나서도 쉽사리 마음은 편해지지 않는다. 선경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얼굴에 남아 있는 복잡한 표정을 지웠다.
“그럼 나랑 같이 나가죠. 여기선 이제 그만 일하고.”
“네? 지금요?”
“왜요. 여기 그만두기 아쉬워요? 썩… 좋은 곳 같지는 않은데.”
“아뇨, 그건 아니지만….”
김현진은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렸다.
“저한테 왜 이렇게까지 해 주세요?”
“사실은 부탁 하나만 하려고요.”
“저… 지석이 형 안 만난 지 오래됐어요. 그날 호텔에서 본 이후로, 못 봤어요. 형은 이제 제 연락 안 받아요.”
지레 겁을 먹은 김현진이 고해성사하듯 말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선경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앞으론 찾아가서 만나요. 예전처럼 같이 밥도 먹고, 운동도 하고, 힘들어하면 얘기도 들어 주고.”
“…형이 싫어할 텐데.”
“알아요. 아마 밀어내겠죠. 그래도 지치지 말고 찾아가 줘요. 한지석이 당신한테 해 줬던 거 그대로 돌려준다 생각하고… 포기하지 말고 그 사람 좀 챙겨 줘요. 내가 김현진 씨한테 하려던 부탁은 그거예요.”
챙겨 달라니, 이해할 수 없는 요구에 현진은 눈만 느리게 깜빡였다.
“…어디 먼 데 가세요?”
순수한 질문에 선경은 그저 조용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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