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21화 (121/127)

#121

***

해외로 장기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무려 15박 16일간의 긴 일정이었다.

우선경을 혼자 두고 가야 하는 게 몹시도 맘에 걸렸지만, 한지석이 직접 관리 감독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곤란해하는 그를 보며 선경은 자신이 애도 아닌데 유난을 떤다며 핀잔을 던졌다.

다행히도 요즘 들어 우선경은 컨디션을 되찾기 시작했다. 건강도 썩 나쁘지 않았고 기분도 좋아 보여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며칠 전부터는 다시 갤러리에 복귀하기도 했다. 확실히 일을 시작하면서부터 부쩍 활기를 띠는 게 눈에 보였다.

결국 출장을 떠나야 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해서 새벽같이 일어나 준비를 해야 했다. 고 비서를 불러 짐을 먼저 실어 보내고도, 뭐가 그리 아쉬운지 작별의 인사를 길게 이어 갔다.

가벼운 옷차림에 모자까지 눌러쓴 한지석은 평소보다도 훨씬 어려 보였다. 웃고 있으면 제법 대학생처럼 보이기도 했다. 차림새만큼 정신 연령도 어려졌는지 덩치가 산만 한 남자는 자신보다 훨씬 작은 오메가에게 들러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결국 무거운 몸을 대롱대롱 매단 채 현관 앞까지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신발까지 골라 신기고, 핸드폰과 지갑까지 꼼꼼히 챙겨 주며 보낼 준비를 했다.

우선경은 옷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며 지석에게 몇 가지 당부를 전했다.

“너무 틀어박혀서 일만 하지 말고 공기도 자주 쐬고 그래.”

“응.”

“형은 특히 스트레스받으면 위가 잘 상하니까, 밥 꼭 잘 챙겨 먹고.”

“…….”

“새벽에 잠 안 온다고 수면제 같은 거 먹지 마. 그런 약 함부로 먹는 거 아니야.”

오랜만에 듣는 살가운 잔소리가 그저 좋은지 지석은 부드럽게 입술 끝을 들어 올렸다.

“나를 꼭 어디 멀리 보내는 사람 같다.”

“멀지, 여기서 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인데.”

선경은 지석의 손목을 붙잡고 시계를 흘낏 살폈다. 이제는 정말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얼른 가.”

“다녀올게.”

마지막으로 가볍게 끌어안고 입술을 맞댔다.

작별 인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서울과 휴스턴과의 시간은 대략 15시간 정도 차이 났다. 일이 바쁘기도 했거니와 두 도시의 생활 리듬이 정반대다 보니 연락이 닿기가 무척 어려웠다. 한지석은 틈나는 대로 문자를 남기며 안부를 묻고, 제 일상을 전했다.

한 가지 기쁜 소식이 있다면 파견 일정이 예정보다 일찍 마무리되었다는 것이다. 운 좋게도 항공편을 변경할 수 있어서 한지석은 빠르게 귀국하기로 했다. 나름 우선경을 놀라게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일부러 연락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올랐다.

집은 이상하게 썰렁했다. 사람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묘하게 집 자체가 텅 비어 보였다. 특별히 달라진 부분이 없어 보이는데도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거실을 둘러보던 지석은 불현듯 스치는 생각에 드레스 룸을 열어 보았다.

그 안에 있던 우선경의 물건들이 모두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이 집에서 그의 흔적만 도려낸 것처럼.

당황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지지부진하게 연결음이 이어지더니 한참 만에 겨우 연락이 닿았다.

- 여보세요.

침착함을 가장해 보려 했으나 선경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 게 무너져버렸다. 한지석은 아찔해지는 눈앞을 손바닥으로 덮었다. 덜덜거리는 목소리가 볼품없게 흘러나왔다.

“선경아. 집에, 네 짐이 하나도 없어.”

-…….

“우선경. 듣고 있어?”

- 어.

짧은 대답은 무척이나 차분했다.

그리고 한동안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 시간을 참고 기다리는 게 대체 뭐라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지석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단단히 쥐어야 했다. 머지않아 작은 한숨과 함께 선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는데.

“…….”

- 알겠어. 집이라고 했지? 그쪽으로 갈게.

한 시간 뒤, 초인종이 울렸다.

정장 차림에 서류 가방을 손에 든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왔다. 그들은 검고 빳빳한 명함을 내밀며 자신들을 프라이빗 뱅커, PB 매니저라고 소개했다.

“여긴 대체 무슨 일로….”

“오늘 우선경 대표님과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이쪽으로 장소가 변경되었다고 전달을 받아서요.”

가뜩이나 당황스러운 상황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방문객까지 더해지자 한지석은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혼란이 가중되던 그때였다.

띠리릭-

도어 록이 자동으로 해제되더니 우선경이 현관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의 뒤로는 익숙한 고문 변호사도 보였다.

선경은 복도에 멀뚱히 서 있는 PB 매니저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가볍게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했다. 그들이 올 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이 대처가 자연스러웠다.

“먼저들 도착하셨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넓은 거실 한가운데에서 뜻밖의 모임을 가졌다.

PB 매니저들이 가지고 온 자료들을 부지런히 꺼냈다. 우선경과 한지석이 보기 편하도록 소파 테이블에 진열해 놓았다.

선경은 별말 없이 팔짱을 낀 채 이들의 행동을 지켜보았고, 지석은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말을 아끼며 기민하게 눈을 밝혔다. 마침내 준비를 끝낸 은행 직원이 공손하게 손을 뻗으며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서류철을 가리켰다.

“요청하신 신탁 계약서 원본입니다. 상속 요건은 어제 날짜로 모두 채우셨고, 주식들은 언제든지 원하실 때 청구하실 수 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저희 쪽에서 계속 투자 관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수혜자는 저와 한지석 씨 둘로 등록되어 있는 거죠? 혹시 소유권 양도도 가능합니까?”

“네. 가능하십니다. 대표님.”

“제 몫은 모두 한지석 씨 앞으로 돌려 주세요. 이후 관리는 따로 상의해 주시고요.”

“그럼 관련된 서류를 작성해 주셔야 하는데 지금 하시겠습니까?”

“네, 가능한 건 지금 다 해 버리죠.”

펜을 든 우선경은 어딘가에 수차례 서명을 하기 시작했다. 한지석은 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대충 파악은 됐으나 도무지 머리가 받아들이질 않았다.

많은 서류가 오갔다. 신탁의 수혜자가 모두 한지석으로 바뀌었다. 불과 삼십 분 만에 지석은 서화의 대주주이자 몇천억대의 자산가가 되었다.

할 일을 모두 끝마친 은행 직원들이 떠났다. 옆에서 조언을 해 주던 고문 변호사는 자신이 챙겨 온 묵직한 서류 봉투를 전달해 준 뒤 잠시 자리를 피했다. 넓은 집에 겨우 둘만 남게 되었을 때, 선경은 봉투를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이혼 서류였다.

“형만 사인하면 돼. 나머지는 전부 준비 끝냈어.”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야.”

“약속했잖아. 120일만 같이 살기로.”

예상치도 못한 이야기에 지석은 멍한 눈을 치켜들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도리어 우선경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지석의 반응에도 흔들림 없이 제 말을 이어 갔다.

“어제로 우리가 약속한 날짜 끝났어. 이제 이혼해도 문제 될 거 없어.”

“…….”

“형 오기 전까진 다 끝내 놓을 생각이었는데, 솔직히 오늘 올 줄은 몰랐어. 다행히 변호사가 빨리 준비해 줘서….”

“안 돼!”

한지석은 실성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선경의 몸을 황급히 끌어안고 그의 주먹 쥔 손을 억지로 펼쳤다.

덕분에 들고 있던 이혼 서류가 허무하게 땅바닥으로 흩날렸다. 허리를 꽉 옭아맨 팔에서 떨림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대체 왜 그래, 왜….”

“나 기억나.”

귓가에 닿는 차분한 목소리에 지석의 등이 움찔 떨렸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 다 기억난다고.”

“…….”

“형이 나한테 했던 말, 내가 겪었던 일들 다 또렷이 기억해. 그러니까 이제 나 좀 그만 괴롭혀.”

“선경아.”

“놔줄 테니까 가라고.”

한지석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낭떠러지에 내몰린 사람처럼 몸만 덜덜 떨었다. 한번 시작된 떨림은 아무리 애를 써도 좀처럼 멈추질 않았다.

충격을 받은 모습에 선경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그 작은 반응에 얼어붙은 몸이 또 움찔 떨린다.

선경은 손을 들어 넓은 어깨를 토닥거렸다. 진정해 봐, 달래듯이 내뱉는 말은 무덤덤하게만 들렸다.

“나… 용서해 준 거 아니었구나.”

한지석은 팔에 힘을 풀고 천천히 상체를 뒤로 물렸다. 이제야 우선경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기억을 되찾았다는 선경은 자신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원망을 쏟아내기는커녕 미련 따위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무관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혼자 정리를 끝낸 우선경은 이미 제 인생에서 한지석을 잘라내 버린 뒤였다.

지석은 소파 아래로 흘러 내려왔다. 바닥에 두 무릎을 꿇고 선경의 다리를 잡았다. 제발 매달려 볼 여지라도 남아 있길 바랐다.

그의 돌발 행동에 선경은 난색을 보였다.

“형. 하지 마.”

“선경아,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이렇게는 안 돼.”

힘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다. 결국 지석을 밀어내는 걸 포기한 선경은 잠시 허공을 쳐다보며 기다림의 시간을 가졌다.

적막이 감도는 거실엔 지석의 흥분에 찬 숨소리만 들렸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트릴 듯 헐떡이는 호흡에 덩달아 선경도 질식할 것 같았다.

결국 손을 들어 제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남자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나 당신 정말로, 너무 많이 사랑했어.”

“…….”

과거형으로 말하는 고백에 지석은 결국 눈물을 터트렸다. 그가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울고 있다는 걸 선경도 알았다.

“형이 후회한다는 거 알아. 그렇지만… 이제는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아. 우리 안 좋은 기억이 너무 많잖아. 형 볼 때마다 자꾸 떠오르는데 어떡해. 그걸 어떻게 참고 살아.”

“미안해, 내가 미안해….”

지석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엎드려 오열하는 걸 지켜보던 선경은 결국 바닥까지 함께 내려갔다. 눈물로 흠뻑 젖어 있는 얼굴을 닦아 주고 그를 안아 주었다.

“나랑 결혼하고 나서 많이 힘들었던 거 잘 알아. 지금까지 버텨 준 것도, 끝까지 나한테 맞춰 준 것도 고마워.”

담담한 인사가 이어졌다. 한지석은 대꾸도 못 하고 선경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울었다.

“할 만큼 했어.”

“…….”

“놓아줄 테니까 이제부턴 형 하고 싶은 거 하면서 편하게 살아. 정말로 미안하다면 그렇게 해 줘.”

우리의 결혼 생활이 끝났다.

“그동안 나한테 매여 있느라 고생했어.”

5년 만에, 완전한 남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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