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22화 (122/127)

#122

***

이혼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서류를 제출하고, 법원에서 확인서를 발급받고, 신고하면 끝났다. 아이도 없어서 숙려 기간은 한 달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우선경이 떠난 이후로 지석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홀로 남겨진 집에서 햇빛도 보지 않았고, 밥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덩그라니 남겨진 상태로 스스로를 방치한 채 지냈다.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았다. 며칠 동안이나 연락이 닿질 않아 억지로 문을 따고 들어온 고 비서가 아니었다면 정말로 큰일이 났을지 모른다.

어떻게든 한지석을 챙겨 보려 했으나, 삶의 의욕이 사라져 버린 남자를 구슬리기란 쉽지 않았다.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하거나, 제대로 먹지도 않는 식사를 챙겨 주거나, 회사 일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것만이 고 비서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랬던 그가 폐인 생활을 접은 건 어느 날 걸려 온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무려 6주 만이었다.

‘혹시나 해서 전화했어.’

‘…선경아.’

‘우리 다음 주에 만나는 거 잊지 않았지? 시간 꼭 비워 두고.’

‘…….’

‘별일 없으면 그날 같이 점심이나 먹자.’

마지막 이혼 절차를 위해 우선경을 만나야 했다. 차마 이런 비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지석은 그때부터 제대로 사람 꼴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경과는 두 번을 더 만났다. 물론 장소는 법원이었지만, 이혼하는 사이치고 분위기는 썩 나쁘지 않았다.

만날 때마다 간단하게 밥도 먹고, 차도 마셨다. 대화의 주제는 재산 분할이나 이혼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지만 어찌 되었든, 한지석은 그마저도 좋았다.

우선경은 두 사람이 헤어진 날 집을 완전히 떠났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느냐 물어도 자세한 언급 대신 따로 지낼 곳을 구했다고만 답했다. 신혼집은 한지석이 계속 살기로 했다. 선경은 팔아치워도 된다고 했지만, 끝까지 미련스럽게 남아 있었다.

우선경이 그렇게 아득바득 지키고자 했던 신탁 주식은 위자료라는 명목으로 모두 한지석에게 넘어갔다. 애초부터 구도경이 갖는 게 싫었을 뿐, 주식에 대한 욕심이 컸던 것은 아니다. 싫다고 거절하는 한지석에게 그 정도 가질 자격은 충분히 있다고 우선경은 말했다.

뜻하지 않게 자산가가 되었지만, 이혼의 대가로 얻게 된 재산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이것이 우선경과 견줄 만한 가치가 되는가. 가당치도 않았다. 차라리 도로 가져가고 그를 돌려달라 하고 싶었다.

‘헤어졌다고 당장 모르는 사이가 되는 건 아니잖아. 도움 필요한 일 생기면 언제든지 연락해.’

이혼 신고를 마친 날, 우선경은 기분 좋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악수를 청하면서 짓는 미소가 너무나 홀가분해 보였다.

이제 정말로 남이 되었다. 하지만 선경의 말처럼 끝은 아니라고 여겼다. 친구처럼 지내지는 못할지언정 원수가 될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한지석이 여전히 서화에서 중요 직책을 맡고 있는 이상 우선경과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질 리 만무했다. 지석은 실낱같은 관계를 붙잡고 목적 없이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서화에서 주최하는 기부 행사에서 마주칠 기회가 생겼다.

한지석은 여태껏 살면서 오늘처럼 긴장해 본 날이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자신을 꾸몄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작 겉껍데기를 치장하는 것밖에 없었다.

완벽하게 재단된 검은색 실크 정장이 훤칠한 몸을 휘감았다. 넥타이와 커프스단추, 구두까지 누군가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신경 써서 골랐다. 모처럼 단정하게 자른 머리는 전문가의 손길까지 더해져 잘생긴 이목구비를 더욱 돋보이게 해 주었다.

전신에서 윤택함이 흘러넘쳤다. 한지석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고전적인 매력에 사람들이 관심이 쏠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오늘 파티에 참석한 이들 중 가장 눈에 띄었다.

홀 안에 들어선 한지석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선경을 단번에 찾아냈다. 그 곁으로 자연스럽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선경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우선경이 부름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 한지석에게도 산뜻하게 웃어 주었다.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응, 형은 언제 왔어?”

“방금 전에.”

사사로운 안부가 오갔다. 서로의 건강과 요즘 하는 일. 심지어는 어린 다솜이의 근황까지. 가족이었으니까 물을 수 있는 사적인 영역까지 서슴없이 묻고 대답했다.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호사가들의 시선이 꽂혔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 멋있다. 신경 좀 썼구나?”

우선경이 상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훑어보며 놀라워했다. 한눈에 봐도 제 취향으로 꾸미고 온 게 확연히 보였지만, 일부러 언급하진 않았다. 한지석도 모른 척 딴소리만 했다.

“방송 나온 거 봤어.”

“아, 그거…. 젠장. 주변에 안 본 사람이 없네.”

얼마 전 공중파에서 짧은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최근 해외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연 한국 작가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그녀의 일상을 소개하던 와중에 미술계 지인으로 잠깐 등장했을 뿐이다.

이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웬만해선 영상 매체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재벌가 일원의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다. 본방 시청률은 2%밖에 안 됐건만, 그가 나온 부분만 편집된 쇼트 영상은 인터넷에 널리 퍼져 나갔다. 한지석 역시 하루에도 수십 번을 돌려보곤 했다.

“왜, 예쁘게 잘 나왔던데.”

“아주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우선경은 기가 찬다는 듯이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바람에 뒤로 넘겨 놓았던 앞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곧은 이마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리자 익숙하게 지석의 손이 뻗어 나갔다.

“머리가….”

“괜찮아, 내가 할게.”

손이 닿기도 전에 선경이 먼저 뒤로 물러났다. 얼굴엔 여전히 옅은 웃음을 띠고 있었지만 명백한 거부 의사였다.

“…….”

살가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우선경은 확실하게 선을 그어 놓고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인간들은 이혼해도 여전히 사이가 좋다는 둥, 잘하면 재결합도 가능하겠다며 허튼소리를 떠들어 댔지만, 당사자가 느끼는 거리감은 상당했다. 이제는 함부로 만질 수도, 걱정할 수도 없었다. 한지석은 머쓱해진 손을 바지 주머니 안에 넣었다.

앞머리를 정리하던 선경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를 발견했는지 까만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어딘가를 계속 주시하던 얼굴이 제자리로 돌아오더니 황급히 지석에게 물었다.

“혹시 누구랑 같이 왔어?”

“아니.”

“잘됐다. 이따가 소개해 줄 사람 있거든. 만찬 시작할 때쯤 형 테이블로 갈게. 파티 잘 즐기고. 나중에 봐.”

뭐가 그리 급한지 제 말만 던져놓고 가 버린다.

뒤에 홀로 남겨진 지석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선경의 자취를 따라갔다. 그는 이제 막 행사장으로 들어온 남자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는 중이다.

굉장히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주최 측의 배려인지 늘 붙어 있던 만찬 테이블 자리는 떨어져 있었다. 그래 봤자 바로 옆 테이블이라, 고개만 조금 돌리면 우선경이 정면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와 시시각각 변화하는 표정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옆에는 아까 봤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남의 이야기를 듣는 편이었던 우선경은 오늘따라 웬일로 수다스럽다. 몸까지 반쯤 틀어 가며 주도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게 새삼스럽게만 보였다.

지석은 조용히 물을 마시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고 싶지 않아도 눈길이 향하는 걸 막을 수 없었다. 목이 타는 느낌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때마침 우선경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뭔가 중요한 얘기인지 손바닥으로 입가를 가리며 귓속말을 전한다.

우선경은 물러나기는커녕 더 가까이 어깨를 기울였다. 얼굴을 맞붙인 채 속닥속닥 밀담을 나누는 모습은 친밀해 보이기 그지없었다.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으세요?”

맑은 목소리가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한지석을 불렀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자 단정하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석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싱긋 미소를 짓는 남자에게서 달큼한 바닐라 향이 풍겨왔다. 그는 아까 전 우선경이 소개해 준 오메가였다.

둘이 잘 맞을 것 같다며 자리까지 옆에 붙여 주고 갔다. 그때 느낀 허탈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괜찮습니다.”

“한 입도 안 드셔 놓구.”

살짝 기대를 품고 있었던 오메가 역시 한지석의 무미건조한 반응에 관심이 식은 지 오래다.

“그럼 술이라도 한잔하실래요? 와인 맛 괜찮던데.”

“…….”

그냥 편하게 식사나 즐기려는 건지, 들이대는 것을 포기하고 와인병을 들어 술을 채웠다. 여러 번 건배를 제안하자 한지석은 마지못해 잔을 들고 부딪히는 시늉을 했다.

“누구 만나 볼 생각은 없어요?”

“네.”

“흐음, 아직 마음 정리를 못 하셨나 보네.”

단호한 대답에 오메가는 별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렸다.

하긴, 아까부터 뚫어져라 전남편만 쳐다보고 있는 게 예사롭지가 않았다. 저쪽은 완전히 맘 떠난 것 같던데 어쩐담. 남자는 와인을 홀짝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다시 돌아온 집은 늘 그렇듯 어두컴컴했다. 한지석은 불도 켜지 않고 몹시 지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걸어가다 우두커니 멈춰 섰다. 오늘따라 빈 집이 너무 넓고 쓸쓸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 있다 와서 그런가, 유독 이 세상에 혼자 버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석은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걸어 죽 늘였다. 목을 조이는 셔츠 단추도 가슴까지 풀어 내렸지만 답답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느리게 발을 끌며 침실로 들어갔다.

협탁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서 줄줄이 엮인 투명한 약 봉투가 딸려 나왔다. 지석은 익숙하게 봉투 하나를 찢었다. 손바닥 위에 탈탈 털어 모은 알약이 수북했다.

그걸 한입에 털어 넣었다. 물도 없이 씹어 먹으니 마치 담즙처럼 쓴맛이 혀 위에 가득 고였다.

최근 불면증이 다시 재발했다. 증상이 심해져 결국엔 정신과에 가서 약을 처방받아 오기에 이르렀다.

예전처럼 악몽을 꾸는 건 아니었지만, 깊은 우울감과 무기력함이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다. 의사의 말로는 상실감이 큰 원인이라고 했다.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한지석은 언제나처럼 왼쪽에 놓인 베개를 찾아 끌어안고 얼굴을 파묻었다. 흉곽이 크게 부풀도록 숨을 쉬었다. 아쉬움에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이제는 냄새도 거의 안 나네.”

몇 달을 껴안고 살다시피 했던 탓일까. 이제 베개에선 선경의 체취 대신 제 향이 더 진하게 맡아졌다.

우선경이 입었던 옷들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가 쓰던 베개와 같이 덮던 이불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도저히 잠들 수 없는 날이면 그것들을 둘둘 말아 대신 끌어안고는 했다.

희미해져 버린 냄새를 머릿속으로 대신 그려냈다. 오늘 오랜만에 얼굴을 봐서 그런지 유난히 더 기억이 생생하다.

“조금만 더 있어 주지.”

냄새마저도 자신을 떠나가는 것 같다. 지석은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쓰라린 숨을 토해냈다.

지석의 속은 빠른 속도로 곪아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고통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습이 어려울 정도로 상처가 썩고 문드러져 갔다.

하지만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방치해 두려 한다. 이마저도 자신이 겪어야 할 죗값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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