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김현진이 기어코 집까지 찾아왔다.
그동안 무수히 반복되는 연락을 거절하고, 회사 앞에서 기다리는 것도 모른 척 지나쳤었다. 하지만 한지석의 완강한 거부에도 현진은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
“나도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그 사람이 형 돌봐 달라고 부탁했단 말이야!”
결국에는 저도 힘들었는지 이게 다 우선경이 시킨 거라 고백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망치로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이것도 지난번 오메가를 소개해 주었던 것과 같은 연장선인가. 그렇게 내 옆에 자신 대신 누군가를 밀어 넣고 싶은 걸까? 혼란에 빠져 있는 한지석에게 김현진은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 사람이 내가 일하던 식당에 찾아왔었는데….”
우선경이 부탁했다는 말들엔 하나같이 자신에 대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꽤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역시 혼자 남겨질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쓰레기처럼 살아갈 것을 예견했던 것이다. 비록 동정심일지언정 그 마음이 기껍고 소중했다. 선경이 제게 과분한 존재였다는 걸 다시금 떠올렸고, 그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저 자신을 비난했다.
이후 김현진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찾아왔다. 와서 딱히 뭘 하는 건 아니고, 그냥 어떻게 살고 있나 안부차 들르는 것뿐이다.
별로 관심 없어 하는 한지석에게 묻지도 않은 제 근황을 털어놓고, 최근 재미있게 본 인터넷 글이나 예능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예상은 했지만,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벽에다 대고 얘기하는 것 같았지만 김현진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럴 거라는 사실을 본인도, 우선경도 모두 예상하지 않았던가. 내치는 것보다 투명 인간 취급하는 게 차라리 다행이라 여겼다.
그렇게 일상이 이어지던 어느 날이었다.
“현진아, 이제 됐어. 앞으로 그만 와도 돼.”
“말했잖아요. 이제 형 안 좋아한다니까?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정말로 시키는 대로 하는…!”
“알아, 알았으니까 이제 정말 그만해.”
지석은 아주 오랜만에 말을 걸었다. 차분한 목소리로 거절 의사를 밝혔다. 네 도움 없이도 괜찮다고, 보란 듯 입매를 끌어올리며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하지만 김현진이 보았을 때, 그건 제대로 된 웃음이 아니었다.
한지석은 날이 갈수록 불안정해 보였다. 완벽함을 두른 외관은 여전히 강직해 보였지만 공허한 눈동자는 숨길 수가 없었다. 마치 속이 썩어 텅 빈 나무 같았다. 그게 언제 꺾여 버린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갈 테니까, 일단 밥부터 먹어요. 형 숟가락 뜨는 것만 보고 갈게요.”
모른 척 시선을 피하며 음식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최근 새롭게 다니기 시작한 회사 근처 맛집에서 포장해 온 것들이었다. 다행히 아직 식지는 않았다. 현진은 온기가 남아 있는 국과 밥을 그릇에 담아 식탁으로 옮겨놨다.
먹지 않으면 가지도 않겠다고 협박해 겨우 자리에 앉힐 수 있었다. 한지석은 젓가락을 천천히 움직였다. 입에 들어가기는커녕 밥알만 셌다.
저럴 줄 알았지, 현진은 고개를 저으며 집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어질러진 곳 하나 없이 깨끗하고 불도 환하게 켜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삭막해 보인다. 이런 곳에서 혼자 지내면 멀쩡하던 사람도 우울증이 올 것만 같았다.
“이사 갈 생각 없어요?”
“…….”
“이 집은 혼자 살기에 너무 넓잖아요. 차라리 회사랑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게 어때요? 그쪽에 오피스텔 많이 있던데.”
“내가 알아서 해. 왜 그런 걸 네가 신경 써.”
한지석은 그나마 움직이던 손마저 멈췄다.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땅이 꺼지도록 깊은 한숨을 뱉었다. 입에 넣은 것도 없는데 속이 울렁거린다. 체할 것 같았다.
“이러니 선경이가 싫어했지. 너랑 진작에 선을 그었어야 했는데.”
지석은 곱씹어 말했다.
“이제 정말 보지 말자, 제발.”
“…다음에 또 연락할게요. 형 잘 지내요.”
괜한 불똥이 튈까 봐, 김현진은 서둘러 가방을 챙기며 일어났다. 그가 날쌔게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고 다시 텅 빈 집에 한지석만 홀로 남았다. 그나마 혼자 떠들던 사람마저 사라지니 정말로 쥐 죽은 듯한 정적이 밀려왔다.
머리가 지끈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고개 숙인 채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던 지석은 그대로 의자를 밀치며 일어났다.
주방 하부장에 달린 서랍을 열었다. 매일 찾아 먹다 보니 아예 처방 약들을 이곳으로 죄다 옮겨 놓았다.
색색의 알약들은 그새 종류가 늘었다. 또다시 한 움큼 입에 털어 넣었다. 쓴맛이 느껴지자 겨우 마음이 진정되었다.
이후 식탁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먹지도 않은 저녁밥은 전부 개수대에 쏟아붓고 그릇들은 대충 헹궈 식기 세척기에 넣었다.
김현진이 벌려놓고 간 음식 포장재들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대리석 상판 위에 올려 둔 노란 커터칼을 발견했다. 아마도 비닐을 찢을 때 썼던 것 같았다.
다다닥-
손잡이를 위로 밀자 칼집에서 긴 칼날이 튀어나왔다.
지석은 아무 생각 없이 칼날을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날카로운 절삭 면에 자꾸만 눈길이 닿았다.
‘형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
목소리가 머릿속을 왕왕 울렸다.
결국, 스트레스로 병이 났다. 아침부터 열이 펄펄 끓기 시작하더니 상임 이사회 도중 쓰러지고 만 것이다.
죽어도 병원에는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 결국 집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던 터라 고 비서가 의사를 집까지 불러왔다. 약간의 탈수 증상과 영양 결핍 증세. 그리고 단순 고열이라 해열제 주사를 놔주고 영양제를 섞은 수액을 달아 주는 것 외에는 특별히 해 줄 것이 없었다.
“환자 깨어나면 나중에 따로 정밀 검사 한번 받아 보시죠. 지금은… 일단 휴식을 취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습니다.”
“…괜찮을까요?”
“약 효과가 돌기 시작하면 열은 금세 내릴 겁니다. 아마 앞으로 대여섯 시간은 푹 주무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심란한 표정으로 입술을 말아 물던 고 비서가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의사는 한 번 더 환자를 돌봤다.
수액이 잘 내려올 수 있도록 링거줄을 정돈하고, 주삿바늘을 꽂은 손등도 꼼꼼하게 살폈다.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있던 그는 문득 한지석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
시곗줄 아래를 들여다보던 의사는 조용히 손을 내려놓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른침을 모아 삼키고는 급히 바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떨리는 손가락이 어디론가 바삐 문자를 보냈다.
그날 새벽. 혼자 있는 집에 도어 록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바닥을 스치는 가벼운 발걸음은 헤매지도 않고 곧장 침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방은 어스름한 수면 등만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기절하듯 잠든 한지석이 더운 숨을 쌕쌕 내쉬는 탓에 침실 안은 온통 그의 페로몬 냄새로 가득했다.
바깥바람을 가득 묻힌 손이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직 열이 떨어지지 않았는지 손에 닿는 모든 곳이 불덩이 같았다.
축축하게 젖어 이마에 들러붙은 앞머리도 시원하게 뒤로 넘겨 주었다. 여전히 정신을 잃고 잠들어 있는 남자를 내려다보는데,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미련해, 매번 이렇게 참으니까 결국 병이 나지.”
우선경은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 잘 갈무리해 두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협탁 위에 있던 식은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이마와 뺨, 목덜미까지. 땀으로 끈적거리는 몸을 세심히 닦았다. 절절 끓어오르는 체온 때문에 차갑던 물수건은 금세 미적지근해져 버렸다.
“도어 록 왜 안 바꿔놨어. 아직도 그대로면 어떻게 해.”
우선경은 잠들어 있는 남자를 질책했다.
이 집에 온 것은 지극히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들어갈 방법이 없다면 되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신혼집은 우선경이 떠났던 상태 그대로였다.
땀을 닦아 주던 선경이 시체처럼 늘어진 지석의 팔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푸른 정맥이 도드라진 손등을 쓰다듬고, 뒤집어 손목을 살폈다. 그게 오늘 이 집에 온 이유였다.
직접 확인한 손목은 생각보다 더 엉망이었다. 희미하고 긴 상처가 가득했고 어떤 건 얼마 안 됐는지 붉은 기가 선명했다. 있어서는 안 되는 흔적 위를 손가락이 배회했다.
선경은 참다못해 물수건을 집어 던졌다. 얼굴을 감싸 쥐며 원망에 가까운 탄식을 뱉었다.
“이러지 마. 내가 왜 형이랑 헤어졌는데.”
“…….”
늘어져 있던 손이 선경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겨우 들어 올린 눈꺼풀이 천천히 깜빡거렸다. 눈빛은 여전히 흐리멍텅했다.
시름시름 앓고 있는 주제에 우선경을 붙잡은 손아귀 힘은 꽤 셌다. 꿈이든 현실이든지 절대 놓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마저 느껴졌다.
“나 죽이려고 했던 범인, 찾았어.”
그를 내려다보던 선경은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어떻게 처리할지 계속 고민 중이야. 경찰에 넘겨 버리기엔 너무 편안하게 죗값을 치를 거 같아서….”
한지석과 헤어져 있던 사이 꾸준히 살인 청부업자의 행적을 좇았다. 몇몇 의심스러웠던 이들 중에 결국 자신을 없애려 한 범인도 밝혀냈다. 덩달아 일을 저지르도록 부추긴 교사범까지 줄줄이 찾아냈다.
증거는 이미 충분했고, 그대로 경찰에게 맡기면 끝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선경이 겪은 일들이 너무 참혹했다.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
“되갚아 주려면 나 역시 진창에 손을 담가야 하더라. 결국 나도 범죄를 저지르는 게 되는 거겠지.”
여전히 옳은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점차 복수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직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 이는 몇 없었다. 선경은 제 주변의 사람들이 더러운 일에 엮이지 않길 원했다.
“나 때문에 힘들다며, 이혼을 먼저 원한 것도 형이었잖아. 그럼 놔줄 때 빨리 나한테서 벗어났었어야지.”
그중 한지석을 가장 지키고 싶었다. 이미 많은 것을 잃은 그를 위험한 일에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진 않았다.
“그런데 이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잘 살라고 보내 줬더니 왜 사람이 망가져 가냐고!”
안타까운 마음에 선경은 지석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악에 받친 소리를 질렀다.
이러다 한지석이 죽어 버릴까 봐 겁났다. 그는 정말로 하고자 하는 일은 실현할 사람이었다. 세상에 미련이 없는 듯 살다가 어느 날 덜컥 목숨을 끊을지도 모른다.
“절대로 죽을 생각하지 마! 진짜 용서 안 할 거야.”
어느새 일어나 앉은 남자는 무작정 선경을 품에 끌어안았다. 후끈한 체온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의 절박함에 몸이 데일 것 같았다. 선경은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아.”
한지석은 겨우 입술을 움직였다. 꺼끌거리는 목소리엔 사무치는 괴로움이 잔뜩 끼어 있었다.
“나는 이미 한 번 널 잃어 봤잖아, 너랑 무의미한 관계가 되는 거 생각보다 더 버티기 힘들어. 평생을 이렇게 살 자신이 없어.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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