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24화 (124/127)

#124

“미쳤어? 그래서 죽겠다고?!”

“…….”

선경은 눈앞에 보이는 머리와 어깨, 등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주먹으로 퍽퍽 때리는 힘이 상당했다. 제법 아플 텐데도 한지석은 묵묵히 얻어맞고만 있었다. 맞는 족족 몸이 휘청거리는데도 화가 난 선경은 봐주질 않았다.

“그딴 생각 하기만 해봐! 다신 내 얼굴 못 볼 줄 알아!”

“…….”

“고개 들어, 한지석! 빨리 나한테 약속해!”

손바닥이 두 뺨을 찰지게 갈겼다. 노성과 같은 닦달에 지석은 힘없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물을 참느라 새빨갛게 충혈된 눈동자가 선경의 얼굴을 좇았다. 고집스러운 입술을 꾹 다문 채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이 치사하고 나쁜 새끼. 분한 마음에 속에서 확 열불이 올랐다.

이 남자가 너무 밉고 불쌍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안타까워서 도무지 혼자 놔둘 수가 없었다.

선경은 지석의 뒷머리를 움켜잡고 끌어당겼다. 오랜만에 침범한 그의 입속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고,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고통과 같은 입맞춤에 선경은 왈칵 인상을 찡그렸다. 입술을 섞을수록 가슴에 저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각질이 일어난 입술은 거칠고 따가웠다. 선경은 제 혀를 밀어 넣어 부르튼 입술과 메마른 점막 안을 척척하게 적셨다. 허리를 안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지석은 옴짝달싹도 못 하고 굳어 버린 채로 쏟아지는 키스 세례를 받았다.

그리웠던 숨소리, 진한 체취,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익숙한 감각들.

대체 얼마나 절실히 원해 왔던가. 지석은 마음이 울컥 북받쳐 올랐다. 이대로 당장 죽는다 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에 부쩍 더 힘이 들어갔다. 빈틈없이 상체를 맞붙이고 살아 움직이는 우선경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깔짝이는 혀를 세게 빨아당겼다.

가득 고인 타액과 입안에서 터지는 신음까지 모조리 삼켰다. 진득하게 깊어지는 입맞춤처럼 두 몸이 열렬하게 서로를 찾고, 뒤엉켰다.

“하아, 선경아.”

순간 열이 오른 한지석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옆으로 휘청댔다. 놀란 선경이 재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하마터면 침대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괜찮아?”

“…….”

지석은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쌕쌕대는 숨이 습하고 무척 뜨거웠다.

“잠깐 기다려봐, 약 가져올게.”

이대로 두면 안 될 것 같아 선경은 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허둥지둥 해열제를 찾았다. 분명 의사가 두고 간 게 있을 텐데 마음이 급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주방 서랍을 뒤져 처방 약들을 모아 놓은 걸 발견했다. 처음 보는 약들이 어찌나 많은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 안에서 해열제를 찾아낸 선경은 약 봉투를 손에 움켜쥔 채 가만히 멈춰 섰다. 싱크대 상판에 기댄 뒤 잠시 떨리는 숨을 골랐다.

지금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판단이 제대로 서질 않는다.

고민하고 있는 사이 등 뒤로 한지석이 다가왔다. 달아오른 체온과 제어하지 못하고 흘러나오는 페로몬만으로도 그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긴 팔이 뻗어 나오더니 한지석은 선경이 쥐고 있던 해열제를 가져갔다. 알아서 입안에 털어놓고, 스스로 물도 마셨다. 그가 깊은숨을 내쉬며 양팔로 상판을 짚었다.

우선경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마주 본 얼굴은 힘없이 억지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지석은 고개를 숙여 선경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

“괜찮아. 가.”

“…….”

“대신… 마지막으로 나 한 번만 안아 주고 가.”

간절한 부탁에 선경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오는 감정을 꾸욱 눌러 삼켰다. 비어 버린 손으로 안타깝기만 한 알파의 얼굴을 들어 올려 한참을 바라봤다. 기어이 그의 입술을 다시 찾았다.

깊숙이 혀를 밀어 넣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눈물이 고여 있던 한지석의 입안은 온통 짭짤하고 뜨거운 맛이 났다. 덩달아 선경의 체온도 데워지는 것 같았다.

“…하아, 한지석, 당신 아파서 기절해도 난 몰라.”

선경은 숨을 몰아쉬며 페로몬을 풀었다. 드디어 빗장이 열렸다. 지석은 내내 참아오던 욕구를 터트리며 열렬하게 선경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제 몸 따위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발정기가 찾아온 짐승처럼 사흘 밤낮을 뒹굴었다.

맨바닥, 식탁 위, 거실의 소파와 욕실에서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몸을 섞었다. 더러워진 몸을 씻거나 잠시 눈을 붙일 때조차 떨어지지 않고 최대한 엉겨 붙어 있었다.

한지석은 선경과 몸을 깊게 섞을수록 열이 뚝뚝 떨어져 갔다. 기절은커녕 오히려 기력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그가 아팠던 원인은 상사병이었던 게 분명했다.

질퍽한 정사를 나누면서도 귀로는 애달픈 사죄와 고백을 들었다. 잘못했다, 사랑한다. 마치 이번이 생에 마지막인 듯이 한지석은 쉬지 않고 제 마음을 고해바쳤다.

날짜 감각이 무뎌져 갈 때쯤, 더 이상은 이렇게 지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선경은 항복을 선언했다. 침대에 누운 상태로 팔을 휘저었다.

“내가 졌어. 알겠으니까 이제 좀 그만하자.”

힘겹게 말을 꺼내자 납작한 뱃가죽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한지석이 눈을 치켜들었다. 선경의 말뜻을 곡해했는지 허리를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하루만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나 아직 너한테 다 빌지도 못했는데….”

“안 도망간다고. 그리고 형 마음은 충분히 알았어. 받아 줄 테니까 이제 그만해.”

“…….”

불안한 시선이 떨어질 줄 몰랐다. 그 눈을 마주 보던 선경은 한탄 섞인 신음을 내쉬었다.

어휴, 하여간 의심은 많아 가지고. 힘 빠진 손을 내려 지석의 양 뺨을 붙잡고 끌어올렸다. 쪽, 소리가 크게 나도록 입술에 제 입을 가져다 박았다.

“내 짐 여기로 가져오라고 할게. 오늘부터 여기서 지내면 좀 믿을래?”

“…….”

“정말이라고. 그러니까 이제 좀 일어나서 사람답게 살자. 그리고 나 배고파. 우리 밥 안 먹은 지 한참 된 거 알아?”

한지석의 성기가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꽉 차는 느낌이라, 섹스를 할 때는 뭘 먹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나마 물과 빵, 초콜릿이나 과일 따위를 먹으며 최소한의 당분과 수분을 섭취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계가 왔다. 위장이 텅텅 비다 못해 쓰라렸다.

배고프다는 말에 지석은 망설이지도 않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근육으로 꽉 찬 상체도 울긋불긋한 흔적이 가득한 건 마찬가지다.

“이제 뭐 좀 먹을 수 있겠어? 만들어 줄까?”

“어. 나 그거 해 줘. 계란 볶음밥.”

주문이 들어오자 그는 곧바로 바지만 주워 입고 나갔다. 열린 문틈으로 냉장고를 여닫는 소리와 프라이팬을 꺼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선경은 조금 더 게으르게 누워 있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침대 시트가 죄다 젖어 손으로 짚는 곳마다 축축했다. 슬쩍 내려다본 제 몸은… 하도 빨아 거의 퉁퉁 불어 있는 수준이었다.

“…어후.”

민망해진 낯을 문지르며 욕실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덩이는 물론이고 허벅지 사이까지 온통 홧홧했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씻고 나오니 맛있는 냄새가 선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지석은 이미 밥을 뚝딱 만들어 놓은 뒤였다. 더러워진 시트까지 싹 벗겨 세탁기도 돌려 놓았다.

“맛있겠다.”

윤기 도는 볶음밥을 보는 순간 저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기진 뱃속이 요동치고 입안에는 침이 고였다.

지석은 막 접시에 밥을 옮겨 닮고 있었다. 따뜻한 접시와 숟가락을 챙겨 든 선경은 식탁으로 가지도 않고 그대로 밥을 떠먹었다. 멀쩡한 아일랜드 식탁은 그저 허리를 기대는 용도였다.

숟가락이 쉴 틈 없이 입안으로 들어간다. 평소엔 입도 짧으면서 어찌나 잘 먹는지, 만들어 준 사람조차 신기한 듯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배고프다는 게 사실이었는지 금세 한 그릇을 비우고 도로 접시를 내민다. 지석은 당연스레 제 몫을 양보했다.

그릇이 거의 바닥을 보였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선경은 아예 아일랜드 식탁 위로 껑충 올라앉았다. 살짝 뜬 다리를 까딱거리며 지석이 건네준 물을 마셨다. 멍해진 시선으로 바닥 어딘가를 내려다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의 둘의 관계는 잠시 제쳐 놓더라도, 지금 당장은 더 급한 문제가 남아 있었다.

한참 만에 멈춰 있던 입술이 움직였다.

“…김 수석이 날 죽이려고 했어.”

생각지도 못한 범인의 정체에 지석의 눈이 한껏 커졌다. 그런 반응이 나올 거란 건 예상하고 있었다. 선경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돈이 많이 필요했었던 모양이야. 할아버지 컬렉션에 손을 대려고 했는데, 내가 수장고 접근을 막아 버리니 난감했던 거지. 갤러리는 내가 부재중일 경우 김 수석이 권한 대행을 이어 가게 되어 있어. 아마도 그걸 노렸던 것 같아.”

“…그런 일을 그 여자가 혼자서 벌였다고?”

“물론 도와준 사람들이 몇 명 있지.”

한지석은 말없이 입술을 씹었다. 예전의 기억은 떠올리기도 싫은지 곧은 눈썹이 죄다 비틀려 있었다.

“그날… 김현진이 호텔에 오게 된 건….”

“알아, 구도경이 카드 키 보낸 거지?”

“…….”

“어떻게든 우리 헤어지게 만들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인간이었으니까. 하지만 구도경은 의외로 김주원과 관련이 없어.”

우선경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형, 내가 말했지. 난 경찰에 신고할 생각 없어.”

“…….”

“김주원한테 내가 겪었던 거 고스란히 되갚아 줄 거야. 그게 비도덕적인 방법이라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엮이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발 빼.”

냉정하게 얘기하고 있지만, 선경 역시 겁이 나는 건 마찬가지였다. 식탁을 짚고 있던 손끝이 잘게 떨려왔다. 선경은 불안을 감추기 위해 경직된 손을 말아 쥐었다.

어느새 얼굴 앞에 그림자가 졌다. 큰 손이 떨리는 주먹을 감쌌다. 한지석의 깊은 목소리가 귓바퀴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이미 늦었어. 네가 있다면 난 거기가 지옥이라도 따라갈 거야.”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