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25화 (125/127)

#125

김주원이 변하기 시작한 건 상류 사회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부터다.

그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자신의 삶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라움 갤러리의 수석 큐레이터라는 직함은 어디를 가나 인정받았고, 누군가에겐 롤 모델이 되기도 했다.

비록 들키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긴 했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짐만 되는 가족들과는 애저녁에 인연을 끊었다. 낳자마자 버렸던 아이는 애초부터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보고 싶다는 생각도 일절 해본 적 없었다. 그러니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역시 당연히 궁금할 리 없었다.

신분 세탁은 완벽했으며 몇 번의 성형 수술까지 거쳐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다. 김유주는 김주원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해외에 가 있는 우선경을 대신해 라움 갤러리의 운영을 맡게 되면서부터 그에 맞는 융숭한 대접을 받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더 좋은 집에서 살게 되고, 기사가 딸린 차를 탔다. 내키는 대로 명품을 사들여도 될 만큼 넉넉한 월급도 보상처럼 따라왔다.

좋아하는 일, 높아진 커리어, 그에 맞는 대우. 모든 게 만족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어울리는 사람들도 달라졌다. 갤러리 일을 하다 보니 행사와 파티에 참석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어느덧 만나는 사람들 수준도 높아지고, 김주원의 주변인은 상류층 사람들로 채워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결혼까지도 약속했다.

그는 유서 깊은 집안의 둘째 아들이었고, 장래도 유망했다. 베타였지만 알파 못지않은 훤칠함을 자랑했다. 제 인생에 언제 다시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남자였다.

그와 수준을 맞추고 싶었다. 어쩌면 제 과거를 더욱 깊이, 완벽하게 숨기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가지고 있는 것, 먹고, 쓰고, 즐기는 것까지 모두 최고급으로 바꾸고 싶었다. 그러려면 결국엔 돈이 필요했다.

지금 자신이 누리고 있는 것들은 어차피 제 것이 아니다. 모두 우선경의 지원으로 얻은 허상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고객들의 요청을 받아 희귀한 작품을 구해 준다거나, 작가를 개인적으로 연결해 주는 등의 일을 하며 소소한 부수입을 챙겼다. 물론 노고에 비해 얻게 되는 이득은 미미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부자들의 비자금 은닉을 도와주기도 했다. 주로 작품 가격을 부풀려 받는 방식이었는데 운이 좋으면 수천만 원대의 커미션을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점점 횟수와 규모가 커지자 결국 우선경도 알아차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김주원의 씀씀이는 이미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커진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뒷돈을 챙길 루트가 막히자 환장할 노릇이었다. 급기야 수장고에 있는 작품들에 손을 대고 말았다.

라움은 규모가 큰 갤러리라 두 곳에 나눠 수장고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중 라움 갤러리 지하에 있는 메인 수장고엔 우 회장의 컬렉션들을 보관 중이었다.

수백 점의 미술품들은 모두 고가의 희귀품이었는데, 워낙 오랜 시간 동안 중구난방으로 사들인 작품이 많다 보니 보관 리스트에서 누락된 것들도 몇 있었다.

그중 두세 개를 몰래 팔아치웠다. 의의로 간단했고, 순식간에 큰돈이 들어왔다.

한번 성공하고 나자 김주원은 조금 더 대담해졌다. 컬렉션을 구매할 만한 부호들을 은밀히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렵게 송옥희와 연락이 닿았다.

김주원 역시 최근 들어 부쩍 상류층 사람들과 엮여 들긴 했지만 사실 송 전(前) 대표만큼 재력가들과 인맥을 트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녀는 제 연줄을 통해 미술품 불법 거래와 탈세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다녔다. 라움에서 쫓겨난 이후로도 하던 짓은 여전했다.

‘혹시 우 회장 컬렉션에 관심 있어 할 사람들 소개해 줄 수 있어요?’

‘어머, 자기 의외다. 김 수석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 몰랐네? 사랑의 힘이 대단하긴 하구나!’

눈치 빠른 송옥희는 몇몇 기업가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들은 욕심 많게도 하나같이 귀한 작품들을 원했다. 당연히 쉽게 빼내 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고민하고 있는 김주원에게 송 대표는 위작 작가를 소개해 주었다.

컬렉션을 가짜로 바꿔치기할 계획을 세웠다.

목표로 한 것은 총 20여 점. 금액만 해도 삼천만 달러, 우리 돈으론 약 사백억 규모였다.

위작 그림을 준비하느라 김주원은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을 탕진했다. 송옥희에게 입막음 조로 미리 몫을 떼어 주느라 사채까지 끌어다 썼다. 계획이 망하는 순간 자신의 인생은 끝장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선경은 느닷없이 수장고 접근을 통제했다. 그림을 자유롭게 출납할 수 있었던 것이 막혀 버린 거다. 금방 풀어 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기간이 길어졌다.

혹시 자신을 의심하는 건가,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더불어 사채 빚의 부담도 커져 갔다. 주위 상황이 김주원을 점차 압박하기 시작했다.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무슨 방법 없어요?! 이러다 다 망하게 생겼다고요!’

김주원은 송옥희를 달달 볶았다. 위작 얘기만 꺼내지 않았어도 이 지경까진 되지 않았다며 책임의 화살을 그녀에게 돌렸다. 급기야 돈 받은 값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자신도 가만히 있지 않겠다며 협박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어요. 우 대표를… 어디 납치라도 하든가 해야겠어.’

‘자기 미쳤어?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당신, 그런 일 하는 사람들 알고 있죠?’

부자들은 더러운 일을 대신해 주는 사람이 있다고 들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대신 손봐 주거나 협박해 주는 그런 일 말이다.

문제는 얼마나 실력이 확실한가였다.

결국 송옥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해결사라며 형제를 소개해 줬다. 그들은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해 준다고 했다.

‘사람 좀 처리해 줄 수 있어요? 상대가 좀 까다로운데….’

‘누군데, 유명인 뭐 그런 거야?’

‘재벌이에요.’

‘2억은 받아야겠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의뢰 비용이 셌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 일주일 정도 납치해서 감금만 해 주면 돼요.’

‘감금은 씨발, 애들 장난도 아니고. 우린 무조건 죽여. 대신 일은 깔끔하게 해 줄게.’

‘…좋아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선경을 죽일 만큼의 원한은 없었지만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당장 제가 죽을 판이었다.

며칠 뒤 발신 전용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현진 씨. 일 끝나면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남은 일억 준비해 두고 있어요.’

청부업자들은 그날부로 계획을 실행했다. 우선경의 뒤를 따라붙으며 그를 덮칠 타이밍만 노렸다.

김현진의 이름을 가명으로 쓴 건 나름의 꼼수였다.

물론 처음부터 현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선경의 최근 동향을 파헤치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놀랍게도 그가 자신이 낳았던 아들임을 알아채게 되었다.

세상에 운도 없지, 이렇게 일이 꼬일 수가 있는가. 아무리 서울 바닥이 좁다지만 이런 식으로 버린 자식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물론 김현진은 김주원이 친모라는 사실을 알아챌 리 만무했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엮여 있다는 사실 자체가 거슬렸다.

만약에 진실이 드러난다면 어떻게 될까, 스폰서, 미혼모, 학력 조작, 신분 세탁… 여태껏 숨겨 왔던 과거가 까발려지는 순간 김주원의 커리어는 물론이고 연인까지, 모든 것이 망가질 게 확실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청부업자들이 경찰에 잡히더라도, 수사망은 가장 먼저 김현진에게 쏠릴 것이다. 아주 잠깐의 시간을 버는 것뿐이겠지만 보험을 들어 놓고 싶었다.

그리고 청부 살인은 실패로 끝났다.

“김주원이 만나는 남자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응. 내가 직접 만나서 확인했어.”

“누군데?”

“형도 그때 기부 행사에서 봤을 거야. 한빛 재단 심승우 이사장.”

한지석은 남자의 얼굴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우선경이 그토록 살갑게 대화하던 이가 바로 김주원의 약혼자였다.

“그럼 그날 일부러 접근했던 거야?”

“그냥 김주원에게 얼마나 진심인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 했던 거지.”

“…….”

“남자는 상당히 괜찮아. 건실한 사람이고 김주원에 대한 애정도 깊은 편이야. 이쪽 세계에선 보기 드물게 순수하던데. 물론 김 수석도 그걸 알고 있었을 테고.”

우선경은 자신이 알아낸 사건의 전말을 한지석에게도 공유해 주는 중이었다. 앞으로 어찌할지는 머리를 맞대고 함께 고민해 보기로 했다.

우선경은 소파에 앉아 머리를 비스듬히 괴었다.

“다만 김주원의 과거에 대해선 까맣게 모르는 눈치였어. 부모님도 전부 외국에 계시고, 그럭저럭 잘 사는 집안이라 생각하는 거 같아.”

“…어떻게 할 거야. 바로 밝힐 거야?”

“아니 그건 가장 마지막에. 김주원이 제일 놓치고 싶지 않았던 거니까 피날레로 남겨 둬야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석의 눈빛이 벼린 듯 날카롭게 빛났다. 그 역시 턱을 괸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수장고에 있는 컬렉션들은 벌써 다 바꿔 치웠다고 했지.”

“어. 아직 팔지는 못했고.”

“그거 우리가 다 사들이자.”

선경은 내키지 않은 듯 눈썹을 찡그렸다.

“…이미 사겠다는 사람이 정해져 있을 텐데. 아무리 돈을 더 준다 한들 쉽지 않을 거야. 지금 한창 경계가 심할 때인데… 김주원 성격에 섣불리 계획을 바꾸진 않을 거 같아.”

“만약에 그 사람들이 전부 구입을 포기한다면?”

한지석은 머릿속에 그려둔 청사진을 읊기 시작했다.

“송옥희 대표 먼저 잡아넣어. 중개해 준 브로커가 걸리면 사겠다고 예약 걸어 놨던 인간들도 겁먹고 나가떨어지겠지. 그러면 아마 김주원 쪽에서 먼저 연락이 올 거야. 어떻게든 팔아치워야 할 테니까.”

“…정말로 다 사겠다고? 그 돈은 다 어떻게 마련할 건데.”

“…….”

한지석이 눈을 또렷이 치켜뜨며 선경을 마주 보았다.

“혹시 검찰이랑 손잡아 볼 생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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