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을잊은사이-126화 (126/127)

#126

한지석의 철저한 설계 아래 복수의 서막이 올랐다.

먼저 김주원의 범행을 도왔던 사람부터 척결하기 시작했다. 시작은 송옥희였다.

검찰이 앞장서서 송옥희를 털었다. 검찰이 개인을 기획 수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지만, 송 대표의 뒤에는 상류층의 비리가 거대한 실타래처럼 엉켜 있었다. 사실 검찰이 실제로 노리는 건 뒤에 숨은 알짜배기들이었다.

미술품을 이용한 불법 증여, 부정 축재, 탈세와 비자금 의혹 등과 관련된 뉴스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왔다. 송 대표와 연루된 유명한 기업가와 재력가들이 줄줄이 소환되었다.

검찰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된 배경에는 한지석이 있었다. 그는 검찰청을 직접 찾아가 협상을 시도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증거를 제공할 테니 기획 수사라는 판을 차려 주고, 쉽게 떡고물을 받아먹으라는 거였다. 검찰로선 손해 볼 게 없었다. 오히려 손쉽게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기회였다.

대신 한지석은 두 가지 요구 사항을 달았다.

하나, 수사와 관련된 소식은 뉴스를 통해 자세하게 알릴 것.

둘, 위조지폐의 일시적 사용을 허락할 것.

검찰의 허락 아래 총 삼천만 달러의 위조지폐가 제공되었다. 언뜻 보면 사용감이 가득한 구권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특수 염료가 발라져 있었고 전부 위치 추적이 가능했다. 사용처를 묻는 검찰의 질문에는 ‘미끼’라고만 답했다.

송옥희 게이트라고 이름 붙인 뉴스가 연일 방송을 타자, 예상대로 미술품을 구입하기로 약속했던 이들은 연락을 끊고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거래가 엎어진 김주원은 말 그대로 쓸모없는 위작과 감당 안 되는 사채 빚만 떠안은 셈이 되었다.

패닉에 빠진 김주원은 급히 차선책을 물색했다. 얼마 전 외국의 대부호가 김주원이 몰래 팔아넘기려는 작품들을 모조리 사고 싶다며 은밀히 제안해 왔던 것이 떠올랐다.

신원은 제법 확실해 보였으나 아무 접점도 없는 이가 접근을 해온 게 무척이나 수상했었다.

당시에는 당연히 무시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절실했다.

김주원은 핏기 없는 얼굴 옆에 휴대폰을 바짝 갖다 붙였다. 다이얼 소리가 길게 이어질수록 긴장으로 심장이 쪼그라들고 있었다. 겨우 전화가 연결됐다.

- 여보세요?

유창한 영어 발음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막혀 있던 숨통이 그제야 턱, 트였다. 김주원은 숨을 크게 내쉬며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때 했던 제안 아직도 유효한가요? 물건, 전부 넘길 수 있을 것 같아요.”

- 오, 그것참 좋은 소식이군요!

다행히 상대방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 그나저나 한국에선 지금 이슈가 한창이죠? 물건을 전달하는 데에는 무리가 없습니까? 우리도 리스크는 떠안고 싶지 않은데요.

“그건 문제없습니다. 작품은 모두 안전한 곳에서 은밀히 보관 중이니까요.”

- 대신 가격은 이천만 달러로 합시다. 20개 모두 사는 조건입니다.

“하!”

터무니없는 가격 흥정에 기막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김주원은 욕이 튀어 나가려는 걸 참으며 간신히 화를 눌러 삼켰다.

“그때는 분명 가격을 더 얹어 주겠다고 했잖아요!”

- 지금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한국 검찰도 상당히 주시하고 있을 텐데… 위험을 감수하는 비용이라고 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절대 불가합니다.”

-…….

한참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김주원은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다 못해 심장 마비가 올 지경이었다. 이 사람마저 안 사겠다고 하면 자신은 정말 그림을 껴안고 죽어야 했다.

- 좋습니다. 삼천만 달러로 하죠.

긍정의 대답이 들리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 날짜와 만날 장소 정해서 알려 주십시오. 우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아주 빠르고 간결한 거래였다.

거래를 약속한 날이 왔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 경기도 파주의 한적한 창고 앞으로 대형 트레일러와 고급 세단 여러 대가 들어섰다.

주변은 출판단지가 많아 평소에도 트레일러의 왕래가 잦았다. 시간대가 좀 늦었을 뿐이지 아무도 대형차의 출입을 이상하게 여기진 않았다.

미리 나와 대기하고 있던 김주원이 늦은 밤의 방문객을 맞이했다. 검은 차 뒷좌석에서 내린 이는 누가 봐도 파란 눈의 외국인이었다.

“전에 통화했던 로빈 헤르난데즈라고 합니다. 저희 클라이언트께선 직접 오실 수가 없어 제가 구매를 대행하기로 했습니다.”

독특한 영국식 억양이 배어 있는 영어는 구사하는 단어부터 발음까지 흠잡을 데 없었다. 깔끔하고 지적인 인상과 몸에 두르고 있는 명품들까지, 적어도 남자의 외형은 사기꾼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김주원은 의심으로 가득했던 눈초리에 살짝 힘을 풀며 가볍게 악수를 나눴다.

“대금은 준비되셨겠죠?”

“걱정 마십시오. 뒤따라온 차에 모두 실어 두었으니까요. 그보다 전 물건부터 보고 싶은데요. 지금 바로 확인 가능합니까?”

“따라오시죠.”

김주원은 로빈을 이끌고 컨테이너 창고로 들어갔다. 투박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부는 온습도 조절 장치를 설치해 놔 최적의 보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그 안에는 몰래 빼내 온 우 회장의 컬렉션 스무 점이 곱게 나열되어 있었다.

로빈은 작은 현미경을 들고 작품 하나, 하나를 신중하게 확인했다.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듯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주원은 그가 꽤 미술에 조예가 깊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쩌면 학예사인 자신보다 더, 보는 눈이 예리할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참을 살펴보던 로빈은 마지막 스무 번째 작품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굽혔던 허리를 폈다. 진지했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피어올랐다.

“작품 컨디션도 훌륭하고, 좋네요. 잠시 클라이언트께 보고를 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러시죠.”

그는 곧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자신을 본 것들을 설명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대부분 작품의 상태와 진품 여부에 관련된 내용이었다.

짧은 통화를 끝낸 로빈이 김주원을 향해 오른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좋은 작품 구했습니다. 대금 확인하러 가시죠.”

총 두 대의 차량 안에는 종이 박스가 꽉꽉 눌러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전부 달러가 가득했다.

김주원은 무작위로 손을 집어넣어 돈다발 하나를 꺼냈다. 직접 손으로 만져 보고 불빛에 비춰 보기도 했다.

손때가 묻어 적당히 허름해진 지폐에선 특유의 금속성 냄새 같은 게 났다. 돈 냄새는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다. 모처럼 김주원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었다. 옆에선 따라온 장정들이 대신 상자를 꺼내 공터 밖으로 날라 주었다.

“금액 맞나 세어 보시죠.”

“…….”

백 달러짜리가 300개씩 묶여 있는 돈다발이 총 1,000개다. 낱장을 세기는커녕 묶음을 헤아리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상자를 모두 뒤집어 돈다발을 쏟아낸 김주원은 제 감을 믿어 보기로 했다.

“맞겠죠. 설마 이 정도 금액을 한 번에 쓰시는 분이 돈을 빼돌리기라도 했겠습니까.”

“현명하시네요, 맞습니다. 저희 클라이언트가 미술품 관련해선 절대 돈을 아끼시질 않으시는 분이라. 금액은 아마 틀림없을 겁니다.”

로빈은 장정들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트레일러 몸통이 날개처럼 위로 열렸다. 하얀 면장갑을 낀 사내들은 조심스럽게 컬렉션들을 포장하고, 차로 날랐다. 순식간에 창고 안이 비워졌다.

“거래 즐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약서 작성도 없는 대면 거래는 싱겁게 끝났다. 한쪽은 다시 돈을 챙기고, 한쪽에선 차 문을 닫았다.

어느새 작품을 모두 실은 로빈은 마지막 인사를 건네며 트레일러와 함께 홀연히 떠났다. 김주원은 돈다발이 수북이 담긴 상자들을 둘러보며 기꺼운 웃음을 터트렸다.

“야 이 씨발것아,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 어디서 이딴 가짜 돈을 들고 와?”

사채업자가 김주원의 면전에다 돈뭉치를 집어 던졌다. 이어 재떨이와 커피잔 같은 게 날아오며 얼굴 옆을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김주원은 사색이 되어 떨었다. 갑작스러운 폭력보다 가짜 돈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가짜… 이게 가짜라고?”

“그래, 씨발! 눈이 있으면 직접 보라고! 어디서 감히 나를 속이려 들어!”

깡패와 다름없는 사채업자는 김주원의 머리채를 붙잡고 직접 책상 앞으로 데려갔다. 허름한 사무실엔 어울리지 않게 고급스러운 기계가 있었다. 실제 은행에서도 사용하는 지폐 계수기로,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남자가 뭉칫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촤르르륵, 자동으로 돈 세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에러가 떴다. 전부 위조지폐라는 이야기였다.

“헉… 허억… 이게 왜!”

붉게 점등된 글자를 보는 김주원의 동공이 파르르 흔들렸다.

“꼴값 떨고 있네. 씨발, 너 지금 연기하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사채업자는 재차 윽박질렀다. 문신이 가득 새겨진 주먹이 보란 듯 책상을 내리찍었지만, 김주원은 지금 협박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흐트러진 지폐를 움켜쥐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아냐! 내 돈! 그럴 리가 없어! 안 돼! 아니야!”

“잘 들어, 김주원. 오늘까지 제대로 된 돈 안 가져오면 니 년 약혼자 찾아가서 받아낼 거야. 무슨 사립학교 이사장이라며? 돈 많겠던데.”

“아아아악!”

김주원은 마치 발작하듯 몸부림치며 소리를 질렀다. 쿵쿵, 책상에 이마를 찧으며 내지르는 비명이 제법 선뜩했다.

그날 밤, 김주원은 오랜만에 라움 갤러리를 찾아갔다. 무단결근한 지 일주일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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