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완결)
다행스럽게도 아직 출입 패스는 온전하게 살아 있었다. 익숙하게 보안을 해제한 김주원은 귀신 같은 몰골을 하고 갤러리 안을 누볐다. 어찌 된 일인지 오늘따라 경비 직원들도 보이질 않았다.
수장고 안에는 여전히 수많은 컬렉션들이 있었다. 김주원은 홀린 듯이 캔버스와 액자를 어루만지며 사이 사이를 오갔다.
이 중에 몇 개만 들고 나가면 되지 않을까? 이렇게 많은데 한두 개쯤 나눠 줘도 괜찮잖아! 이제는 당연하다는 듯이 도둑질을 꿈꿨다.
작품들을 스쳐 지나가던 김주원의 눈에 낯익은 그림이 들어왔다. 그건 자신이 한 번 빼돌렸었던 우 회장의 컬렉션이었다. 그리고 옆에는 보란 듯이 나머지 열아홉 점의 그림들이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
이게 위작일 리 없었다. 진짜를 본 사람은 그 차이를 안다. 아무리 색채와 기법을 똑같이 따라 그렸어도 진품 속에 녹아 있는 원작가만의 미세한 표현력까지 모방할 순 없다. 그제서야 김주원은 자신을 속이고 그림을 가져간 자가 누군지 깨달았다.
“범인은 다시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다는 말 알아요?”
“…….”
“다시 와 본 소감이 어때요, 김 수석?”
계단 위 높게 솟은 곳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주원은 두 눈을 치켜들었다. 우선경이 후광처럼 쏟아지는 빛을 등에 업고 수장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더불어 그의 알파가 방패처럼 뒤를 받쳐 주고 있는 것도 보였다.
“…역시 다 알고 있었어. 나를 함정에 빠트리려고!”
“누가 들으면 김주원 씨가 피해자인 줄 알겠네.”
“이렇게까지 할 건 없잖아! 당신은 다 가졌으면서! 그거 좀 가져간다고 해도 티도 안 나잖아, 여기 봐! 이렇게 많이 가지고도 부족해?!”
악에 받친 항변을 듣던 선경은 바지춤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벌레를 보듯 혐오스러운 시선이 제 발치보다도 한참 아래에 있는 김주원을 응시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신이 내 걸 마음대로 가져갈 권리는 없어.”
“…….”
“뭔가 착각하나 본데, 날 죽인다고 해서 내가 가진 것이 당신 게 되진 않아. 그쪽이 아무리 숨기고 덮어도 본질은 김유주인 것처럼.”
“아니야!”
“너무 욕심이 컸어. 김주원 씨. 이제 당신이 벌인 짓에 책임을 져야지.”
안 돼…, 안 돼! 김주원은 실성한 사람처럼 혼자 도리질을 쳤다. 뒷걸음질 치며 수장고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갔지만, 결국 다리가 걸려 바닥을 뒹굴었다.
“한 가지 더 알려 줄 게 있어. 당신 빚은 다른 대부업체로 이관됐어. 친절한 사람들은 아니야. 돈을 제때 갚지 못하면 아마 좀 험하게 나올 거라더군.”
김주원의 빚은 추심 방식이 악랄하기로 유명한 대부업체가 가져갔다. 그들은 원금 회수를 위해서라면 폭력은 기본이고 납치나 장기밀매 같은 범죄도 서슴없이 저질렀다.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연이율이 300%에 달하는 고금리 불법 사채는 아마 죽었다 깨어나도 갚을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우선경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김주원을 내려다봤다.
“계속 도망 다니면서 살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면서. 하루하루 살아도 사는 게 아닌 것처럼.”
“…….”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이 외롭게 숨어 다녀. 평생 괴로워하면서 살라고.”
냉정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울화가 치미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분한 마음을 삭이느라 선경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뒤에 서 있던 한지석이 그의 손을 단단히 잡아 주었다.
멍하니 계단 위를 올려다보던 김주원은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술에 취한 사람처럼 비틀대더니 주머니 안에서 작은 갈색 병을 꺼냈다. 피로 회복제 라벨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내 뚜껑을 연 그녀가 그 안에 든 액체를 제 몸과 주변에 끼얹기 시작했다. 순간 코가 아릿해질 만큼 매캐한 냄새가 풍겼다.
“웃기지 마. 그 꼴을 겪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중얼거리던 김주원이 라이터 부싯돌을 돌렸다. 틱, 일회용 라이터에서 작은 불꽃이 튀더니, 휘발유가 묻은 흔적을 따라 삽시간에 불이 번졌다.
“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 소리와 함께 거센 불길이 솟구쳤다. 주홍빛의 화염은 김주원의 팔을 타고 몸과 머리카락, 옆에 있던 작품들까지 집어삼켰다. 검은 연기와 함께 살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안 돼!”
“선경아!”
김주원이 분신하는 모습을 보고 선경은 저도 모르게 안으로 뛰어 내려가려 했다. 한지석이 그의 가슴을 다급하게 붙잡았다.
“위험해, 밖에 나가 있어!”
“형! 김주원은…!”
“어서 나가! 빨리!”
곧바로 화재 경보가 울렸다. 다행히 방재 시스템이 제 역할을 톡톡히 해 주고 있었다. 방열 처리가 되어 있어 수장고 내부엔 불이 옮겨붙지 않았다. 다만 대부분의 작품들은 모두 화재에 취약할 뿐이었다.
김주원을 필두로 주변에 있는 그림들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화마에 잡아먹힌 김주원은 비명을 지르며 춤을 추듯 돌아다녔다. 이윽고 바닥에 쓰러져 사지를 비틀었다.
우선경을 먼저 밖으로 피신시킨 뒤 수장고로 내려온 한지석은 소화기를 들고 그녀의 몸에 분사했다. 하얀 분말 가루가 눈처럼 뿌려졌지만, 불길을 쉽게 잠재우진 못했다. 뒤이어 소화기 한 통을 더 쓰고 나서야 겨우 몸에 붙은 불을 끌 수 있었다.
“콜록, 콜록!”
유화 캔버스가 타들어 가며 검은 그을음을 만들어냈다. 통풍구가 열리고 자동 소화 장치가 돌아갔지만, 수장고 안은 금세 탁한 연기로 가득 찼다. 지석은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며 최대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숨을 참고 재킷을 벗었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김주원의 몸 위에 제 옷을 덮고 그녀를 짊어졌다. 온통 까맣게 타들어 간 몸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분간하기 어려웠다.
겨우 계단을 올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문 너머에선 우선경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주원을 땅에 내려놓고 기침과 쌕쌕거리는 숨을 토해냈다. 대뜸 달려와 오열하며 끌어안기에, 지석은 괜찮다며 그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얼굴이 온통 그을음이 묻어 검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갤러리 앞은 금세 소방차의 물결로 뒤덮였다.
- 지난달 발생했던 라움 갤러리 화재 사고로 인해 손상된 작품이 약 구백여 점에 이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중에는 고 우경환 회장의 수집품으로 알려진 유명 고전 작가들의 작품과 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들도 대거 포함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현재 재산 피해 추정액만 하더라도 약 사천억 원에 달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미술계에선 이번 사고에 대해 크나큰 애도의 뜻을…
화상 병원 휴게실에 있는 벽걸이 TV에선 정오 뉴스가 흘러나왔다. 반듯한 인상의 아나운서가 묵묵히 뉴스를 전했다.
그것을 멍하게 보고 있던 서울서부지검 조한일 검사는 옆에 서 있는 사람을 향해 힐끗 눈길을 던졌다.
“…갤러리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건물은 멀쩡하잖습니까.”
“글쎄요. 곳간이 타 버렸으니 당분간은 열기 힘들겠죠.”
“와… 사천억이 잿더미가 됐는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시네요?”
선경은 피식 웃고 말았다. 본인이라고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그렇지만 자신이나 한지석이 안 다친 것만 해도 충분히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사람 목숨에 비하면 그림 따위야, 얼마든지 태워 보낼 수 있었다.
마침 한지석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검찰 수사관들과 짧게 면담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당연하게 우선경과 조 검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긴 팔이 선경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조 검사님, 제 남편이랑 허락 없이 대화하시는 거 곤란합니다.”
“미친놈.”
조한일은 거침없이 욕설을 뱉으며 한지석의 어깨를 장난스레 밀쳤다. 지석 역시 웃으며 그의 장난을 기꺼이 받아넘겼다.
“위조지폐는 모두 수거하셨죠?”
“뭐, 덕분에. 사용처는… 여전히 말 안 해 줄 거냐?”
“그게 저희 거래 조건이었는걸요. 저희 덕분에 실적 채우신 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유들유들한 대답에 조한일은 눈을 흘겨 떴다. 마음은 영 못마땅한데 한지석의 말을 하나도 반박할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일단 약속한 게 있으니 묻어 주긴 하겠는데, 계속 지켜볼 거야. 조금이라도 꼬투리 잡혔다간 봐. 바로 취조실 구경시켜 준다.”
“그런 일 없을 겁니다.”
두고 보자고, 조한일은 더 볼일 없는지 짧게 눈인사를 던지곤 휴게실을 떠났다.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수사관들과 합류해 우르르 복도를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경이 지석의 옷깃을 살짝 쥐고 흔들었다.
“검찰 쪽이랑은 이제 다 끝난 거야?”
“응, 더 이상 볼 일 없어. 기획 수사도 완전히 종결됐고.”
“다행이다.”
그제야 후련한 한숨을 내쉰다. 검사 옆에선 여유로운 척했지만 알게 모르게 긴장을 많이 했었다. 손끝이 저린지 주먹을 쥐었다 펴자, 지석은 그 손을 끌어와 대신 주물러 줬다.
“우선경 여전히 표정 관리 못하네. 죄짓고는 못 살겠다.”
“…이미 지었는데? 만약에 나 잡혀 들어가면 어떻게 해?”
“괜찮아. 내가 너 절대 그렇게 안 둬.”
둘만의 비밀 이야기를 속닥거렸다. 잠시 뒤 그들은 휴게실을 빠져나갔고 TV에선 여전히 뉴스가 이어졌다.
-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새벽 한강 하류에서 변사체 두 구가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습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은 변사체를 20대 남성으로 추정하고 신원 확인에 들어갔으나 지문과 치아, DNA 검사로도 신원을 파악하지 못해 수사에 난항을 겪고 있습니다.
1인용 병실 안엔 가쁜 숨소리만 가득했다. 전신에 붕대를 감은 김주원은 흡사 미라를 연상케 했다. 여전히 단백질 탄 냄새가 진동했고, 독한 소독약 냄새도 코를 찔렀다.
발끝부터 머리카락까지 전부 타들어 가 온전한 부위라곤 눈밖에 없었다.
붕대 사이로 유일하게 내놓은 두 눈은 우선경과 한지석을 열렬히 노려보는 중이다. 실핏줄이 터져 흰자위가 온통 붉었고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몸은 좀 어때요.”
“으으…. 어… 으어….”
우선경은 여상스레 안부를 물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김주원은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그녀가 팔다리를 휘저을 때마다 연결된 링거줄이 함께 파닥거렸다.
“조심해요, 그러다 상처 덧날라. 빨리 나아야죠.”
선경은 흔들리는 링거 폴대를 붙잡았다.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이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김주원 씨. 당신은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끝까지 살아서 죗값 받아요.”
“…….”
“병원 치료에 대해선 걱정 말고요. 차도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김주원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었다. 겨우 숨이 붙어 있다 뿐이지 거의 반 시체와 다름없었다. 녹아내린 피부는 물론이고 손발가락은 살이 들러붙어 제 기능을 잃었다. 기도와 혓바닥도 심각한 손상을 입어 대화와 섭식이 불가능했다.
무엇보다 진통제가 없으면 일분일초도 버틸 수가 없었다. 약 기운이 조금이라도 떨어지는 순간 상상치 못할 고통이 덮쳐왔다.
우선경은 김주원의 병원비를 전액 지원하며 계속 돌봐 주기로 결정했다. 물론 말이 지원이지 거의 밀착 감시를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이제 김주원은 진통제 하나까지도 우선경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아 참, 그동안 계속 병원에 혼자 있었으니 외로웠을 거 같아서요. 김주원 씨가 보고 싶어 할 만한 사람을 불렀어요.”
“어… 으, 허어…”
“당신 약혼자.”
김주원이 눈을 크게 부릅떴다. 격정적인 거부의 기색이 눈빛에서부터 드러났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곧이어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간을 딱 맞춰 왔네요. 우린 이만 자리 피해 줄 테니 두 분이서 못다 한 이야기 나눠요.”
“허어! 으! 으어!”
“잘 지내요, 김 수석님.”
병실 문을 열었다. 마침 그 앞에는 초조한 낯빛을 한 김주원의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인사와 함께 그들은 교대하듯 자리를 바꿨다.
한지석이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나왔다. 그는 걱정스러운 듯 병실을 돌아보았다.
“…괜찮겠어? 둘을 만나게 해 줘도?”
“정말 사랑한다면 저런 꼴이라도 계속 옆에 있어 주겠지. 거기까진 나도 막을 생각 없어.”
김주원은 평생 지독한 고통 속에서 살 것이다. 가진 것을 다 잃은 그녀에게 좋은 것 하나쯤은 남겨 줘도 되지 않겠는가. 물론 약혼자가 끝까지 남아 있을지는 모를 일이지만.
묵묵히 화상 병원을 빠져나왔다. 원하는 대로 복수를 끝냈지만 어쩐지 끝맛은 그리 개운치 않았다. 아마 자신도 평생 김주원을 신경 쓰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선경은 그 또한 감내하기로 했다.
정확히 삼 개월 뒤, 김주원이 자살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가 목숨을 끊은 날은 약혼자였던 심승우가 다른 오메가와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결국 그들의 사랑은 현실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건 예상했던 바였다. 하지만 그렇게 빨리 새 사랑을 찾을 줄은 몰랐다.
욕심과 사랑에 눈먼 자의 말로는 몹시 초라했고, 쓸쓸했다. 인생에서 가장 비참함을 느낀 날, 그녀는 혼자 고립된 채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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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날이 화창했다.
창문을 활짝 열어 깨끗한 공기와 맑게 갠 하늘을 만끽했다. 하얀 목조 창틀 너머로는 런던의 시가지가 그림같이 펼쳐졌다.
막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석이 창문가에 매달려 바깥 구경에 심취해 있는 선경을 발견했다. 그 역시 선경의 옆에 자리를 잡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웬일로 날씨가 갰네? 한동안 눅눅하더니.”
“햇빛 너무 좋지? 우리 오늘 일정 다 재끼자. 이런 날을 놓치는 건 죄악이야.”
“그럴까? 난 좋아.”
지석이 눈매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햇빛이 그의 갈색 머리카락에 닿으며 빛났다. 마치 갓 구운 빵처럼 따뜻해 보였다.
런던으로 이주한 지 3년 차. 그사이 두 사람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우선경은 휴식과 재정비를 이유로 갤러리 대표직을 잠시 내려놓았다. 라움과 시렌치움은 그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당분간 나라에서 운영을 맡아 주기로 했다. 국립 미술관과 문화 공간의 형태가 될 거라 들었다.
많은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지만 후회는 없다. 여전히 갤러리에 대한 애정은 깊었지만 지난 과거에 매여 있기보단 잠시 숨을 돌리는 것을 택했다. 어쩌면 새로운 곳에서 무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지석도 회사를 그만두었다. 다만 여전히 대주주의 권한은 유지 중이다. 필요하다면 언제든 우재경에게 힘을 실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둘은 다시 새롭게 출발하자는 뜻에서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지석은 우선경의 권유로 다시 공부 중이다. 현재 BPP 로스쿨에서 법학 학사 과정을 밟고 있었다. 공부는 거의 끝물이었고, 이미 런던의 대형 로펌에 합격한 상태였다.
1년만 일하면 변호사 자격을 얻게 된다. 그는 나중에 우선경의 개인 변호사로 일하겠다고 선언했다. 나쁘지 않은 계획이었다.
선경은 집 근처에 작은 가게를 냈다. 그림과 책, 오래된 음반이나 빈티지 명품 같은 걸 수집해서 파는 편집숍으로, 그냥 소소한 취미 삼아 운영하고 있었다.
돈 벌 생각이 없다 보니 그냥 내키는 대로 열고 닫았는데, 어디서 입소문을 탔는지 장사가 잘됐다. 최근에는 늘어나는 손님을 감당할 수가 없어 일하는 직원까지 두게 되었다. 이 얘기를 들은 권무열은 ‘될 놈은 뭘 해도 된다’며 부러워했다.
몇 주간 지긋지긋하게 이어지던 흐린 날씨가 물러가고, 해가 떴다. 바삭바삭한 햇빛이 두 사람의 정수리 위를 노긋하게 적셨다.
선경은 고개를 꺾어 옆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알파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낀 지석이 몸을 돌리며 그를 마주 보았다. 습관처럼 손이 뻗어와 헝클어진 까만 머리를 세심하게 정리해 준다.
선경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살아가는 동안 모든 순간이 행복할 순 없다.
지금은 이렇게 평온하고 잔잔하지만, 분명 위기가 찾아오는 날도 있을 테고, 어쩌면 또다시 서로의 심기를 긁으며 싸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우리는 이제 서로가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다.
“준비됐어?”
지석이 손을 내밀었다.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던 선경은 흔쾌히 손을 마주 잡았다.
“응. 가자.”
우리의 사랑은 아직 완결 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인생의 결말을 맺기 전까지 우리는 늘 함께하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엔딩일지라도. 기꺼이.
당신을 잊은 사이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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