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선녀님과 제자 (4)
* * *
“...괜찮아요, 백 소협. 선물이라니...”
“받아주십쇼, 선녀님. 제가 직접 조각한 겁니다.”
장두식은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달이 밝게 비추는 야밤에, 도대체 둘이 이 들판에서 무얼하고 있는단 말인가.
마치, 마치 연인들이 몰래 만나는 것처럼!!
‘대사저!!!’
장두식은 당장 튀어나가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기척을 감췄다. 이렇게 몰래 바라보고 있는 것을 대사저가 좋게 생각할 리 없었다.
장두식은, 어두워지는 마음처럼, 어둠 속으로 파고들었다.
“직접... 조각 하셨다구요? 와아, 예술에도 소질이 있으셨네요.”
“하하, 별 거 아닙니다.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으로 약소하나마 제 마음을 표현한 것이지요.”
굴러다니는 나무토막? 그럼 그렇지.
거지 새끼나 다름없을 곤륜노가 무슨 돈이 있다고 노리개를 사겠나.
‘대사저께서는 마음만 먹으시면, 열 손가락을 다 채울 금반지와 봉황을 새긴 금비녀도 가지실 수 있는 분이시다!!’
장두식은 마음속으로 무진을 마음껏 비웃었다.
당장 그녀의 방의 패물함에 저것보다 수백 배는 아름다울 보석들이 가득할 텐데, 검소한 대사저가 끼우고 다니지 않으실 뿐.
왠지 모를 승리감이 장두식을 감쌌다.
하지만 저급한 선물에 얼굴을 굳힐 것이라 예상했던 백세령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고작 나무토막으로 이렇게 예쁜 조각을 만들어내시다니,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리고 싶은 걸요.”
“그리 좋아해주시니, 저도 좋습니다.”
저리 밝게도 웃는 대사저는 처음 보았다.
저리 얼굴을 붉히는 대사저는 처음 보았다.
그녀는 그것이 정말 소중한 듯 두 손으로 품어안았다.
“한 번 달아보시지요, 새하얀 도복과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아... 그럴까요.”
무당의 도포를 걷어내고, 안쪽의 도복을 드러내는 백세령.
얼굴을 붉히게 만드는 풍만한 여성스러움과 잘록한 곡선을 따라내려간 허리.
그곳엔 조금 해진 듯한 노리개가 하나 달려있었다.
‘저것은...’
장두식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그건...”
“...몇 년 전쯤, 장 사제가 선물로 사줬던 거에요.”
“아, 장 도사님이...”
그럼 그렇지. 제가 아무리 잘못을 했더라도, 대사저의 마음속에는 아직 자신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무당의 제자가 된 지 8년, 대사저와는 자신이 무당에 입적한 그날부터 인연이 있었다.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그 옆에 서고 싶어 피가 나도록 수련했다.
‘대사저, 제가 반드시... 깜둥이의 마수에서 구해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여자가 되던 날, 저 옥빛 노리개를 선물했었다.
대사저는 조금 당황한 듯 했지만, 그래도 웃으며 자신의 선물을 받아주었었다.
그랬었는데...
“그럼 제가 직접 달아드리겠습니다.”
“네? 백 소협, 제가 해도... 아...”
투둑.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망할 깜둥이의 시꺼먼 손이, 대사저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옥빛 노리개를 거칠게 쥐어뜯어버렸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해진 실들이 터져나가며, 풀밭으로 힘없이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대사저는 그것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싸구려군요.”
“...그때는 그 아이도 어렸을테니까요.”
“제 건 백년 천년이 가도 튼튼할 겁니다.”
“후훗, 말씀만 들어도 좋네요.”
툭툭.
마치 더러운 것을 터는 듯한 행동에, 대사저의 도복에 간신히 매달려있던 실들도 허망하게 사라졌다.
‘안된다.’
뿌드드득. 장두식의 입가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이를 너무 세게 꽉 문 탓에, 잇몸이 터져 비릿한 핏물이 줄줄 새어나왔다.
‘대사저, 제가 드린 선물입니다! 왜, 왜 막지 않으시는 겁니까!!!’
소리없이 외쳤다. 제발 들어달라고. 무례하게 남의 선물을 찢어내는 저 천박하고 흉악한 놈을 막아달라고.
하지만, 하지만.
결국 기묘한 문양의 흑색 노리개가, 백세령의 새하얀 도복 위에 걸렸다.
장두식은 그것이 오물처럼 보였다.
눈 내린 들판처럼 새하얀, 순백색의 대사저를 더럽히는 발자국같은, 온갖 더러운 것들이 섞인 구정물.
그러나 백세령은, 그냥 굴러다니는 나무토막에 불과한 그것을, 아주 소중하게 쓰다듬고 있었다.
장두식은 가슴이 갈갈이 찢기고 무너져내리는 듯 했다.
“역시...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선녀님. 선녀님께 장가갈 남자는 정말 행복할 겁니다.”
“후훗, 그런 말 마세요. 저는 도사예요. 혼인에 대한 생각은... 아직 없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언젠가, 마음에 쏙 드는 사내를 찾으실 겁니다.”
둘의 눈빛이 마주치는 것이 보였다.
달빛 속에서, 백세령의 밤하늘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그녀의 새하얀 피부가 복숭아처럼 달달하게 열이 오른 것이 느껴졌다.
“정말... 그럴까요?”
“그럼요. 제가 장담하겠습니다.”
네놈이 뭐라고 장담을 해!!!
꾸드득... 장두식의 주먹이 피가 나도록 쥐어졌다.
분노가 머릿속을 용광로처럼 달구고 있었다.
“엇, 선녀님.”
“네?”
“머리에 벌레가...”
“버, 벌레요?”
벌레라는 말에 딱딱하게 굳는 백세령.
그녀는 태생적으로 벌레가 싫었다. 아무리 무공을 쌓아도, 이상하게 무서웠다.
“치, 치워주세요! 얼른!!”
“아이고, 알겠습니다.”
백무진의 두꺼운 손이 벌레를 털어내려는 때, 녀석은 죽음을 느꼈는지 백세령의 눈앞으로 튀어올랐다.
그리고 자신의 콧잔등에 얹힌 벌레를 본 백세령은, 길게 비명을 내지르며 넘어졌다.
“꺄, 꺄아아아아악!!!!”
“선녀님!!”
그리고 넘어지는 백세령을 껴안으며 함께 쓰러지는 백무진.
‘저, 저 육시랄 놈이!!!!!’
장두식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았지만, 머릿속엔 딱 하나만이 남았다.
깜둥이가, 백세령을 덮치려한다!
더 이상 참지 못했다. 아니 참지 않았다.
그는 주먹에 태청신공(太??)의 내기를 한가득 우겨넣으며 풀숲 밖으로 뛰쳐나갔다.
“당장 대사저에게서 떨어져라 이 찢어죽일 새끼야!!!!”
커다란 노호성에 쓰러진 백무진과 백세령 모두 장두식을 쳐다보았다.
“자, 장 사제?!”
“장가?”
뻐어억!!
“컥...!”
8년간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장두식의 초식도 없는 그저 막주먹이 꽤 커다란 내기를 품은 채 백무진을 가격했다.
‘무슨, 몸뚱아리가 돌덩어리같이...!’
뻑! 뻐억!
주먹 쥔 손이 강철판을 때리는 것처럼 아렸지만, 장두식의 머릿속엔 지금 그런 게 들어올 틈이 없었다.
아픔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대사저를 깔아뭉갠 깜둥이를 줘패야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악! 억!!”
“뒤져! 뒤져라!! 당장 대사저에게서 떨어지지 못할까!!!”
백세령은 벌레 때문에 딱딱하게 굳은 와중에서도, 자신의 위를 덮은 백무진의 단단한 육체를 느꼈다.
희미한 땀내와,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하복부를 짓누르는, 묵직하고 뜨거운 것.
‘그때와는... 느낌이 달라...’
객잔에서는 영문도 모른 채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마치 자신이 그의 연인처럼 아래에 깔려서, 자꾸만 꾹꾹 눌리는 하초가 느껴졌다.
그때마다 기이한 열기가 하복부에서부터 퍼져나가 머릿속을 들뜨게 만들었다.
‘계속 이러고 싶... 아니지, 정신 차려 백세령!’
장 사제의 주먹에는 태청신공의 푸른 기운이 맺혀있었고, 그것이 백무진을 향해 자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것을 고통에 찬 얼굴로 견뎌내고 있는 백무진.
혼자만의 야릇한 생각에 빠져 그를 내버려두었다는 미안함이 가득 차올랐다.
“장두식!!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대사저! 이 망할 쓰레기가!! 지금 대사저를...”
동시에 화가 났다. 도대체 무엇을 오해했길래 백 소협을 저렇게 죽일 기세로 공격한단 말인가.
장두식의 생각 없는 행동에, 백세령이 벌떡 일어나며 그의 손을 잡아챘다.
“입 닥쳐!!”
“대, 대사저...?”
장두식은 백세령의 외침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난 수년간, 대사저가 저런 욕설을 입에 담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손이 꺾여 오는 육체적 고통보다도, 그녀에게서 들은 욕설이 가슴속을 후벼파는 것이 수만 배는 고통스러웠다.
“백 소협은 제대로 무공도 배우지 않은 양민이야, 그런데 지금 내기를 담아 공격해?”
“야, 양민이라뇨. 저놈은 수기(手?)까지 사용하는 일류 무인입니다!!”
장두식은 그때 분명 저놈의 손가락에, 묵빛의 수기(手?)가 감도는 것을 보았다.
그것으로 장도를 박살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백세령은 싸늘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백 소협의 근골을 만져봤어. 그는 분명히 무공을 배우지 않은 양민이야.”
“그, 그런... 거짓일 겁니다, 그건...”
짜악!!
“...”
“정말로... 실망이야, 장두식.”
장두식은 얼얼한 볼을 감싸쥐고는, 털썩 무릎을 꿇었다.
*
‘개씨발...’
망할 장가놈. 좋은 기회가 찾아와서 그대로 같이 쓰러졌는데.
자지를 비비려고 하자마자 장가놈이 내 옆구리를 박 터트리듯 후려갈겼다.
정타로 들어온 일격.
순간 숨이 턱하고 막혔지만, 곧 자지에서 흑천묵지신공의 내기가 전신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오오...!!’
그동안 여인부 누님들을 쉬지 않고 따먹으며 운기를 한 것이 효과가 있는지, 흑단빛으로 물든 내 피부는 더 이상 무른 살결이 아니었다.
뻑! 뻐억!!
처음 제대로 들어온 일격의 후폭풍 때문에 아픈 것이지, 그 뒤에 들어온 주먹질은 솜뭉치를 맞는 듯 가벼웠다.
그렇게 곧 정신을 차린 백세령이 장가놈을 제압하고, 따귀까지 처맞은 놈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 보였다.
놈의 허망한 얼굴이 나를 보고 있었다.
‘등, 신, 새, 끼.’
하지만 장가놈은 눈썹만 꿈틀거릴 뿐, 내 도발에 응하지 않았다.
“장두식. 이번 일은 이장로님께 반드시 이야기할 거고, 그 후의 처분은... 너도 알고 있겠지.”
아, 레드 카드구나. 이대로 떠나보내기에는 아쉬운데.
그동안 두식이 때문에 공사판이 얼마나 재미있었는가.
놈이 땡볕에서 땀 뻘뻘 흘리고 있을 때, 나도 땀 뻘뻘 흘리며 허리를 흔드는 것이 참 즐거웠다.
“크... 선녀님.”
“아, 백 소협! 괜찮으신가요? 당장 의각으로 가요. 제가 부축해드릴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아니라뇨! 내기가 담긴 주먹에 수십 번을 맞으셨어요, 지금 당장...”
“선녀님.”
“...백 소협.”
걱정이 한가득 들어찬 그녀의 입을 막고, 가녀린 팔에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여전히 허무한 얼굴로 주저앉아있는 장두식.
이렇게 둘만이 있는 곳에서 녀석의 끝을 내기엔 성에 차지 않았다. 모두에게 끝을 보여주고 싶었다.
“장 도사님이 충분히 오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녀님.”
“제가 용서할 수 없어요, 백 소협.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구요!”
“진정하세요, 선녀님.”
나는 아파도 괜찮은 척 그녀의 등허리를 토닥이며 백세령을 달랬다.
크고 둔탁한 울림에 결국 입을 다무는 그녀. 백세령에게 반쯤 기댄 채, 장두식에게 미끼를 던졌다.
“아무래도... 그동안 장 도사님이 제게 쌓인 것이 많나봅니다. 이렇게 복날 개패듯 때리신 걸 보면.”
“...”
“장두식. 뭐라고 변명이라도 해봐!”
“그래서... 장 도사님께 제안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백 소협?”
그제서야 고개를 드는 녀석. 눈동자 깊은 곳에, 혹시...? 하는 희망이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저와 남자 대 남자로, 화끈하게 한판 붙읍시다, 장 도사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