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 대결(??) (3)
* * *
드문드문 보이는 관객들.
저멀리 백세령과 진소월이 내게 손을 흔들고 있었고, 조금 옆에는 저번에 보았던 남제자들도 있었다.
“백무진. 장두식.”
“네.”
“예.”
내리쬐는 햇살, 눈이 시리도록 새하얀 도포를 입은 중년 여자가 나와 장두식의 사이에 섰다.
그녀의 옷깃에는 제이장로(?二??)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본인은 무당파 제 이장로이자, 제자들의 계도를 담당하는 집법각의 각주를 맡고 있는 운휘(雲?)라 하오.”
운(雲)자배라. 장로이니만큼 운령이라는 도호를 가진 장문인과 동년배인 듯했다.
느낌상 아마도 초절정의 경지에 다다른 고수.
피부가 매끈한 게 어째 사군자들보다 더 건강해 보였다.
이어 나를 노려보며 말을 잇는 그녀.
“본인은 이 대결의 심판관이 될 것이며. 공정한 판결을 내릴 것을 원시천존과 개파조사이신 장삼봉 진인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소.”
“저 장두식. 저 또한 원시천존과 개파조사이신 장삼봉 진인의 이름 앞에 대결의 결과에 승복할 것을 맹세합니다.”
수척한 얼굴로 이장로의 뒤를 잇는 장두식.
그리고 마뜩찮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이장로를 따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저는...”
찌릿. 막상 할 말이 없어서 살짝 더듬자, 이장로년의 눈빛이 불처럼 타올랐다.
‘왜 야리고 지랄이야.’
제자놈이 나 때문에 망가졌다고 생각하는 건가.
스승과 제자가 쌍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튼, 뭐를 걸어야 내 진심이 전해질까.
원시천존이고 장삼봉이고 다 개풀 뜯어 먹는 소리지만, 이곳에 와서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저는 제 자신과, 제 단전을 걸고 대결의 결과에 따를 것을 맹세하겠습니다.”
“호오, 단전이라.”
바로 나. 어차피 이 세계관 속 나는 혼자 동떨어진 존재고.
강해지기 위해서 믿을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약한 채로 자지만 크면 그냥 정액탱크가 될 뿐.
그렇게 마음가짐을 새로 하자, 조금 긴장됐던 마음이 진정되는 듯 했다.
“덩치만큼이나 배포는 크군. 어디 대결에서도 통할지 보겠소.”
살짝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바뀐 이장로와, 으르렁대는 두식이.
“단전을 건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깜둥이.”
“장가야. 네 개파조사를 건 걸 후회하게 해주마.”
“미친놈이...!!”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장삼봉도 보진가?’
아쉽게도 ‘무림일통’에는 나오질 않아서 모른다.
나중에 장문인까지 손에 넣고나면 물어봐야겠다.
“...대결은 한쪽이 항복을 외치거나, 내가 전투불능이라 판단하면 멈춘다, 그 외의 자잘한 부상은 대결을 속행한다.”
“예, 알겠습니다.”
아주 그냥 눈을 희번덕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장두식.
곧 다른 장로로 보이는 여자 둘이 다가와 나와 장두식의 혈도를 짚어 내공을 금제했다.
“호오...”
내게 다가온 장로가 자지 근처를 주물럭대며 콕콕 찌르자, 전신을 순환하던 흑천묵지신공의 내기가 쥐죽은 듯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의 흐름이 꽤나 묵직하구나.”
“...?”
뜻 모를 말을 흘리는 장로.
얇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탓에 흐릿하게 보였지만, 언뜻 군청색의 눈동자가 스친 듯 했다.
‘...뭐하는 년이야.’
아무튼 내공의 금제까지 마치고, 물러선 이장로를 뒤로 하고 나와 장두식이 마주 보고 섰다.
장가놈이 눈깔을 살벌하게 뜨며 내뱉었다.
“분근착골(????)을 해주마, 깜둥이.”
“그렇게 얇은 팔뚝으로?”
딱 봐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살이 쪽 빠진 녀석.
근력으로는 상대가 안되겠지만, 그래도 방심하지는 않았다.
“큭... 태극의 묘리를 네 놈의 몸뚱아리에 똑똑히 새겨주지.”
나는 딱히 받아치지 않고, 그저 자세를 잡았다.
이내 나와 똑같이, 태극권의 기수식을 잡는 장가놈.
마보 자세에서 오른 다리를 살짝 뒤로 빼고, 두 손을 위아래로 넓게 펼쳤다.
그리고 들려오는 이장로의 목소리.
“대결... 시작!”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짧은 기합성과 함께 달려드는 장두식.
체급이 딸리니 반격으로 역전을 노릴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공세로 나서고 있었다.
“하압!!”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온 녀석의 주먹이 내 명치를 노리고 날아왔다.
나는 왼손을 돌려 놈의 주먹을 잡아채려했다.
“고작 일주일의 배움으로 가당키나 하겠느냐!!”
대뜸 일갈을 내지르는 장가놈. 그래도 8년 동안 헛배운 건 아닌지, 내 왼손이 허공을 잡았다.
짧게 드러난 빈틈. 놈이 놓치지 않고 그것을 파고들어왔다.
“이놈!!”
“큽!”
옆구리로 묵직하게 들어오는 주먹. 눈앞에 순간 별이 반짝였다.
하지만 강건한 몸뚱아리는 금세 회복했고, 후속타를 팔뚝으로 막아냈다.
“흐읍!”
장두식이 재빨리 보법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고, 크게 휘두른 무진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맞으면 뼈도 못 추리겠군.’
육중한 신체에서 나오는 파괴적인 권(?).
‘허나 그뿐이다.’
그동안 날카롭게 정신을 가다듬은 장두식의 눈에, 백무진의 허점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고작 일주일의 배움으로 익혀질 만큼, 무당의 가르침은 허술하지 않다.
쉬지 않고 쌓아온 시간들이 승리의 발판이 되어줄 것이다.
‘약점을 노려 단숨에 쓰러트려주마.’
반격의 묘리가 담긴 태극권이 아닌, 보다 공격적인 권법을 택한 장두식.
그의 발이 일곱 개의 별을 그리며 무진에게로 쇄도했다.
“칠성권(七??)이라! 장 사형이 공격적으로 나가는구려.”
“내공도 금해졌는데, 저래서야 승산이 있겠는가...?”
목우진과 심익, 두 남제자가 손에 땀을 쥐며 둘의 대결을 관람했다.
“제아무리 무식하게 큰 몸뚱아리라도, 요혈을 타격하면 얄짤 없는 걸세, 익.”
“그렇다 해도...”
심익의 눈에는, 저 새카만 남자의 몸을 타격하는 장두식의 주먹이 더욱 아파보였다.
*
‘처음 보는 초식인데.’
백세령에게 간단히 배운 것들을 떠올렸다. 장두식이 꺼내올 만한 수단들.
태극권을 포함한 무당의 박투술. 머릿속에서 잡념들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아니, 필요없다.’
고개를 털며 잡생각을 지워냈다.
눈앞에서 녀석이 일진일퇴(一?一?)를 반복하며 내 몸뚱아리를 노리고 있었지만.
장두식이 하고 있는 게 태극권이든, 다른 무언가의 무공이든. 백세령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딱 하나였다.
그녀와의 대련은 항상 그런 식이었다.
‘흐름.’
그것을 읽어야 했다. 어젯밤 백세령과의 대련 이후, 마침내 무공이란 것에 한 발자국 내딛은 기분이 들지 않았던가.
지금의 나는 애새끼들의 막싸움처럼 몸만 믿고 싸우려하고 있었다.
단순히 막고 때리는 것이라면 이 몸뚱아리가 최강일 것이다.
허나 지금 처맞고 있는 것은 바로 나였다.
“포기한 거냐!! 역시네놈은 나를 이기지 못해!!!”
저 비실비실한 녀석에게 휘둘릴 필요가 없었다.
백세령의 말대로, 흐름은 더 큰 흐름으로 덮어버리면 될 뿐.
아랫도리에 잠들어 있는 내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사용할 흐름은 딱 하나.
“흐아압!!”
인중을 노리고 질러오는 주먹. 오른손으로 막아내자, 단숨에 관자놀이를 향해 다가오는 발길질.
나는 마치 그것을 미리 알고 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장두식의 발을 잡아챘다.
“...뭣!!”
꽤나 단단한 종아리가 잡혔다.
손목을 비틀며 가볍게 공격을 흘려내고, 놈의 발을 축으로 회전을 걸었다.
공중에 떠오른 장두식의 등에 주먹을 내질렀다.
콰앙!!
“커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장두식이 연무장의 판석 위를 거칠게 굴렀다.
아크로바틱한 몸짓을 보여주며, 날아가는 속도를 줄여 간신히 일어선 장두식.
놈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허억, 크흐...”
“...속행!”
이장로의 단호한 외침. 피 좀 흘렀다고 멈추진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우리 두식이도 오히려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고.
“오냐, 곱게 죽여주진 않으마!!!”
대놓고 본심을 드러내는 놈. 나도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까딱였다.
“드루와, 좆만아.”
“이런 찢어죽일 새끼!!”
장두식의 움직임이 이전보다 훨씬 광폭해졌다.
마지막 투지라도 불태우고 있는 것인지, 정신사납게 돌아가는 녀석의 주먹과 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공격들을 흘려냈다.
“제자님...”
“제자라, 벌써 그리 가까워진 것이냐?”
스승의 물음에 백세령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게 무언가를 배웠으니, 사제의 연을 맺어야 한다더군요.”
“바람직한 얘기로구나. 그래서, 배꼽은 맞춰봤느냐?”
“아뇨, 그런 것은 나중... 네, 네?!”
백무진의 모습에 집중하느라 저도 모르게 말해버린 백세령.
당황한 그녀의 눈동자가 스승을 향했다.
담소율은 그런 제자의 모습을 바라보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뭘 그리 당황하느냐. 사랑에 빠진 계집의 심장 소리가 아까부터 귓가를 울리는데.”
“그,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스승님!”
“조용히 하거라. 대결에 방해되게.”
“읏... 하여튼, 제자를 놀리기만 하시고...”
새빨갛게 달아오른 백세령이 스승에게서 몸을 돌렸다.
담소율은 붉어진 제자의 귓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제자가 이리 귀여운 것을 어찌 하겠느냐. 그건 그렇고. 슬슬 네 제자가 흐름을 읽어낸 것 같구나.”
“네? 제자님이요?”
담소율이 혀로 입술을 축이며 낮게 읊조렸다.
“그래. 네 말대로사내놈치고 제법이야.”
아까까지만 해도 밀리고 있던 무진.
여전히 밀리는 듯 보였지만, 드높은 스승의 경지를 쫓아온 백세령의 눈에도 이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죽어! 죽어!!”
“후우, 후욱...”
매섭게 들어오는 주먹은 아팠고, 발길질은 무인의 그것답게 묵직했다.
도저히 저 비리비리한 몸으로는 가능할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움직임.
하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이놈, 이노옴!!”
장두식이 뭐라 소리치는 듯 했지만, 들리지 않았다.
놈이 만들어내는 흐름만을 보았다.
‘명치. 다음은 오금.’
요혈을 노리고 들어오는 주먹은 슬쩍 올려친 손등에 허공을 갈랐고.
묵직하게 들어오는 발차기는 방향이 비틀려 힘을 잃었다.
내게서 이상을 감지한 놈의 전신 근육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온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장두식의 눈동자가 새빨갛게 빛났다.
송곳처럼 파고드는 녀석의 주먹.
심장을 노리는 일권(一?).
그것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잡아채, 회(回)의 묘리를 더했다.
무진류(???)태극권(太??)
“아?”
며칠 전의 나처럼, 장두식의 몸 전체가 한 바퀴 빙글 돌아갔다.
멈추지 않고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내 손안에 응어리진 장두식의 흐름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일권(一?)
콰아앙!!
뱃거죽이 움푹 꺼진 장두식이 연무장의 판석 바깥으로 튕겨져 날아갔다.
“후...”
녀석은,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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