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화 〉 무당(??)에서 독식(??) (8)
* * *
혈혈동자 양광. 혈옥마교(血??)의 우호법. 혈옥마교의 재림을 위해 혈동자(血?子)가 될 제자들을 찾아다니는 중이다.
오랜만에 미약한 두통과 함께 찾아온 정보.
아무리 설렁설렁 봤다지만, 소설의 악의 축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혈옥신마(血???) 앙천화를 위시한 혈교의 미친 연놈들.
그중에서도 혈혈동자 양광은 주인공이 절대지경으로 오르는 데에 큰 도움을 주는 중간 보스역이다.
그 자신이 절대 고수이기도 하고.
끈질기고 잔인한, 그야말로 진정한 강자의 힘으로 큰 깨달음을 준다.
‘그리고 혈동자...’
혈혈동자가 키우는 제자들의 총칭이다.
중원 각지를 돌며 고아나, 문파 또는 세가에서 밀려난 떨거지들을 꼬셔서 만든 소위 자살특공부대.
뭐 특수한 대법을 써서 경지를 올리고 별지랄을 하는 건 중요치 않았고.
중요한 건 왜 지금 혈혈동자가 나타나냐 이거였다.
‘적어도 봉룡지회는 끝나고 나서부터 떡밥이 나오지 않았나?’
아직은 평화롭게 하하호호 웃어야할 시기인데, 등장이 너무 빨랐다.
나로 인해서 생겨난 변화일까.
그때.
“혈혈동자가... 살아있다라...”
“태사부...? 큭!”
콰드득. 순간 터져나온 기파에 거칠게 바닥을 굴렀다.
삽시간에 방안을 덮으며 퍼져나가는 끔찍할 정도로 진한 살기.
힘줄이 튀어나오도록 쥐어진 담소율의 주먹에 피가 뚝뚝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태사부...!”
“양광,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새끼가...”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말투.
폐부를 찌르는 살기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금방이라도 폭주할 것만 같은 담소율의 일그러진 얼굴.
더 놨두면 좆될 것 같은 예감에, 그녀가 내뿜는 기운 사이로 발을 내딛었다.
“크... 태사부! 아니, 담소율!”
평소엔 강아지마냥 내가 부르면 고개를 돌렸지만.
지금은 과거의 한 장면을 보는 듯 먼 곳을 바라보는 담소율의 눈동자.
그녀의 붉은 입술이 달싹거리며 이미 죽은 자를 불렀다.
“운예, 운림, 운형...”
카각! 카가가각!
“씹...”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운 예기가 방안 곳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그녀가 앉던 탁자가 쪼개지고, 벽을 장식하던 수묵화가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촤악!
“큭...”
결국 억지로 뚫고 가다 가슴팍에 길게 그어진 실선 하나.
붉은 피가 쏟아지며 새하얀 무복을 적셔냈다.
‘이 여자가 진짜...!’
감히 남편이 다쳤는데도 여전히 정신을 못차리는 담소율.
나는 조금씩 늘어가는 실선을 견뎌내며 한 발자국씩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흑천묵지신공의 내기를 폭발하듯 이끌어내며 담소율과의 거리를 좁혔다.
“담소율...!”
절대 고수의 태산 같은 기운이 나를 찍어눌렀지만.
그딴 것은 상관없었다.
흘려냈다.
날카로운 예기 사이를 거슬러 올라가며 발을 내딛었다.
짧은 순간 내가 체득해온 모든 것들을 사용해 길을 열었다.
‘흘려내라. 버티지 말고, 부드럽게 흘려내...!’
눈앞에 있는 여인은 내가 지켜야할 내 것.
“커흑...”
끔찍할 정도의 막대한 공력이 나를 짓눌렀다.
내장이 짜부라지는 격통.
입가에서 흐르는 한줄기 핏물.
그것을 삼켜내며 외쳤다.
“담소율!”
그렇게, 기어코 그녀에게 닿았다.
붉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몸으로 그녀를 붙잡았다.
“내가, 내가 지켜야했... 읏?!”
담소율을 커다란 몸으로 한아름 품에 안았다.
으스러지도록 껴안으며 속삭였다.
“소율아, 괜찮아.”
“나, 나는... 내가, 하아, 아으... 무, 무진?”
“괜찮아.”
가슴팍에 벌어진 상처가 그녀에게 짓눌리며 진한 고통이 새겨졌다.
피로 질척해진 손이 무복을 더럽히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달랬다.
눈앞에 흥건한 핏물을 본 담소율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무, 무진아... 이게, 무슨... 아니, 괘, 괜찮느냐?”
“괜찮습니다, 태사부.”
“사, 상처가... 상처가...”
패닉에 빠졌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손을 떠는 담소율.
두식이 가슴팍은 움푹 꺼져도 눈썹 하나 깜짝 않더니, 서방님이 다치니 안절부절하는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흐흐...”
“왜, 왜 웃는 게냐! 미친 놈이더냐! 아니다, 이럴 때가... 아, 지혈! 그래, 지혈부터 하자꾸나!”
부우욱. 그나마 멀쩡한 소매를 찢어내 내 가슴팍을 지그시 누르는 담소율.
아릿하게 차오르는 고통에, 순간 힘이 쭉 빠지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변이 온통 내가 흘려낸 피로 흥건했다.
“무진아!”
“괜찮데두요. 크... 따가버라.”
“왜, 왜...”
왜 그랬냐. 왜 무모한 짓을 했냐. 그런 물음이었다.
나는 그저 숨을 몰아쉬며 괜찮다, 하며 담소율을 달랬다.
울상인 얼굴로, 걱정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
“장문인!!”
“스승님!!!”
담소율을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멀어졌다.
*
“잘 잤어요, 무진?”
“...세령? 윽...”
흐릿한 시야에 애처롭게 웃고 있는 백세령과, 찐한 통증이 몰려오는 가슴팍이 느껴졌다.
일자로 죽 그어진 상처에 뭔지 모를 것들이 치덕치덕 발려있었다.
‘...기절했었나.’
역시 아직 담소율에게는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인 듯 했다.
흑천묵지신공의 내기가 제대로 된 초식도 아니고, 그저 뿜어낸 기파에 갈갈이 찢기다니.
“누워있어요. 피를 많이 흘렸데요...”
“...미안해요, 세령. 걱정시키게 만들어서.”
“아니에요.”
내 뺨을 쓰다듬는 백세령의 손길.
살며시 손을 올려 마주잡고, 체온을 나눴다.
“여기... 약이에요. 쭉 들이켜요, 무진.”
그녀가 건네주는 약사발을 쭈욱 들이키고, 떨림이 진정될 때까지 백세령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냈다.
좋은 약인지 마시자마자 바로 몸에 기운이 조금 돌아오는 듯 했다.
차분히 운기를 하며 몸상태를 점검했다.
‘상처가 꽤 많구만...’
훤히 드러난 흑단빛 피부 곳곳에 피멍과 자상이 새겨진 것이 보였다.
그대로 두면 백세령이 금방이라도 울 것만 같아서, 옆에 놓인 겉옷을 집어 상처를 가렸다.
“태사부께선 괜찮으십니까?”
“...네. 지금쯤 회의가 끝났겠네요.”
“무슨 일이었습니까?”
“...장 소협의 일이에요.”
장두식이라.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혈혈동자의 이야기.
나는 곧바로 진실에 다다랐다.
“...혈혈동자공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 장두식이었군요.”
“...확실친 않아요.”
고개를 저으며, 맞잡은 손에 꾸욱하고 힘을 주는 백세령.
자기 때문에 그렇게 됐을 거라는 자책이 손을 통해 느껴지는 듯했다.
실망하고, 또 실망했지만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알아왔던 사람이었다.
비록 적이라도 10년을 알았다면 떨어져있는 가족보다도 친근하게 느껴질 때가 있을진데.
‘...나 때문에.’
그 한 마디가 백세령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래서 더더욱 무진의 위로가 가슴에 와닿았다.
“세령의 잘못이 아니에요. 힘들고 괴로웠을 장두식을 꾀어낸 그 쇼타충... 아니, 마귀 새끼의 잘못이지.”
“...그런, 가요?”
“네, 그래요. 세령의 잘못이 아닙니다. 절대로.”
“...흑.”
백세령이 무진의 어깨에 이마를 묻으며 흐느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이 그녀의 여린 마음을 쥐고 흔들었었다.
언제나 강인해 보이던 이장로의 불안한 모습도.
산을 진득하게 덮어가던 소름끼치는 스승의 살기도.
그리고, 죽을 것처럼 피를 쏟던 무진의 모습도.
“무진은, 저를 떠나면 안돼요... 알았죠...?”
“제가 왜 떠납니까. 울지 마요, 세령.”
“훌쩍... 우, 우는 거 아니에요.”
고개를 돌리곤 눈물을 닦아내는 그녀.
나는 맞잡은 손을 어루만지며 능글맞게 속삭였다.
“코가 빨간데요.”
“읏... 아니라구요.”
“봐봐요, 응?”
내 재촉에 결국 울음을 꾸욱 눌러담는 얼굴로 눈을 마주치는 백세령.
그대로 목덜미를 끌어안아 천천히 입을 맞췄다.
“웁... 츄우, 움...”
입술을 쓸어내는 혀 끝에서 진한 한숨이 새어나오고.
그녀의 입가를 핥으며 달달한 타액을 삼켰다.
“하아... 무진...”
발갛게 상기된 그녀의 뺨.
“걱정마요. 다 잘 해결될 거니까.”
“...네.”
이제야 좀 밝은 웃음을 짓는 백세령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놈도 이렇게 덜미가 잡힐 줄은 몰랐겠지.’
소설 중후반부까지 꼬리조차 못 잡는 놈일텐데, 오히려 지금 걸린 게 놀라울 정도다.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으니...
차라리 지금 일망타진하는 게 낫지 않을까.
‘아마... 하북팽가였나, 거기가 양광의 습격을 처음 받은 곳이었지.’
그리고 그대로 하북팽가는 멸문당하고, 이어 옆에 있던 모용세가마저도 반쯤 멸문에 이른다.
그렇게 된 원인이 바로 장두식처럼 쇼타충에게 조교당한 혈동자들 때문이고.
‘...그래, 지금 치자.’
후환을 남겨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혈동자들을 키우고 있는 곳을 급습하는 거다.
마음을 먹자 방법은 금방 떠올랐다.
'색혼미령술이라고, 쇼타충 새끼가 알라나 모르겠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잠깐 좀 쉬려는데, 백세령의 손길이 내 얼굴을 붙잡았다.
따뜻하기보다는 뜨겁다 느껴지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세령?”
“...무진, 또 해줘요.”
“뭘... 아.”
촉촉이 젖은 눈빛으로 입맞춰달라 애원하는 그녀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
슬며시 침상 위로 올라오는 백세령.
우리는 누운 채로, 입술을 부비며, 서로의 몸을 더듬으며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