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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협지 속 곤륜노가 되었다-46화 (46/230)

〈 46화 〉 빈집털이 (3)

* * *

“잠시만 기다려보십쇼.”

나는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구석에 의자를 찾아 앉았다.

수첩은 일기였다.

위쪽에 x월 x일이라고 영어로 써져있었으니까.

이건 알아볼만 했다. 문제는 아래쪽이지.

‘아니... 뭔 필기체여, 염병...’

그것도 오래 지니고 있으면서 번진 건지, 아니면 원래 악필인 건지 좆같이도 써져있었다.

글이 아니라 그냥 지렁이 그림 수준이었다.

나는 괜시리 머리를 부여잡고서 이 수첩을 어떻게 써먹을지 고뇌에 빠졌다.

그런 무진을 보며 슬쩍 담소율에게 말을 거는 소서화.

“그동안 뭘하나 했더니, 저런 괴물을 키우고 있었는가?”

“...흐흥, 우리 무진이가 대단하긴 하지.”

“사내 주제에 기경팔맥이 저리도 넓고 튼튼하다니.”

“금방 초절정에 다다를 걸세. 앞날이 창창한 아이지. 필시 무당의 이름을 드높일 거고.”

한껏 콧대가 올라간 담소율을 보며 소서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자에 대한 칭찬인 것 같긴한데...

자신도 수많은 남정네에게 연모의 눈길을 받았던 만큼, 느낌이 오는 것이 있었다.

‘설마.’

아마 담소율 그녀 자신은 모르겠지만, 옆에서 보면 꽤나 티가 났다.

열기를 띤 여인의 눈빛, 달콤한 듯 노래하는 목소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아까부터 그녀의 시선이 저 무진이란 사내에게서 단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담소율이 사내라.’

평생 무당산에 처박혀 독수공방이나 할 줄 알았는데...

어디서 저리도 튼실한 사내를 주워오다니.

‘거미줄은 치워냈나 모르겠구나.’

오랜 친우의 변화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갑자기 왜 처웃느냐.”

“별 것 아니다.”

“실없는 년.”

“슬슬 남자 좀 찾거라. 그리 틱틱대니 사내들이 널 싫어하지.”

“무, 뭣! 뭔 소리를 하는 게야!! 본녀가 네년처럼 이놈저놈 다 만나는 줄 알아!”

흠칫. 가벼운 떠보기에 눈에 보일 정도로 담소율의 기세가 바짝 서는 것이 느껴졌다.

더불어 저기 앉아있는 무진이란 사내의 기세도.

여기까진 예상 내였는데...

‘...근데, 세령이는 왜?’

그러고 보니 세령이의 허리춤에 못 보던 장신구가 달려있었다.

기묘한 문양에 기묘한 글자가 새겨져있는 흑색의 노리개.

분명 후배가 줬다던 옥노리개를 차고 있지 않았었나?

‘그리고 색깔이 마치... 누군가를 상징하는 듯한데...?’

마침 저 색처럼 새카만 누군가가 이 방 안에 있지 않던가.

소서화가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망상의 나래에 콧김을 뿜어냈다.

이건... 삼각관계란 말인가!

‘허허, 평생 목석처럼 살 줄 알았던 둘이 동시에...?!’

소서화의 망상에 야릇함이 더해갈 무렵 무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흠... 대충 해석했습니다. 제가 아는 양이의 글자가 맞군요.”

긍정적인 이야기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혹, 네 부족의 사람이더냐?”

“아쉽게도 그건 아니더군요.”

“...너무 상심치 마요, 무진.”

“고마워요, 세령. 그럼... 우선 일기의 내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나는 앉아있는 동안 생각해둔 데로 각본을 짜냈다.

어차피 이 개좆같은 필기체는 통역사가 와도 해석 못할 거다.

애초에 여기에 그런 인간이 있을 지도 모르겠고.

그럼 내가 말하는 대로지 뭐.

“우선... 이자의 이름은 앙드레. 저와 같은 곤륜인입니다. 무역선을 탔다가 태풍을 만나 침몰했다고 써있더군요.”

“안두래라... 조난자였나, 애석하구나.”

고향도 가지 못하고 타지에서 잔인하게 죽었으니.

소서화의 말끝에 안타까움이 감돌았다.

“중간은 배 위에서의 내용이니 넘어가고, 중원에 도착한 뒤의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어서 말해보거라.”

적당히 페이지를 넘겨가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상해에서 구조된 뒤, 어찌저찌 섬서까지 왔더군요. 그러다 섬서의 한 대장간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며칠 전부터 계속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답니다.”

“쫓겼다라.”

“네, 섬뜩한 느낌이 하루종일 가시질 않았다고 써있군요.”

침까지 삼켜가며 이야기에 집중하는 셋.

나는 긴장한 듯 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근처의 낭인을 고용해, 호위와 조사를 부탁했고...”

“호위라, 죽은 낭인들이겠군. 그리고?”

사락. 넘어간 페이지가 비어있었다.

“...끊겼군요.”

“...하필 다음 일기를 쓰기 전에 당하신 걸까요.”

“이래서야 건진 게 없지 않느냐.”

실망하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섬서에 양가장만 혈교의 입김이 닿았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작중에서 대놓고 드러난 게 거기뿐이라 확실친 않지만...

‘뭐가 됐든 암중에 숨어있는 자들이 더 있겠지.’

무림맹을 위협하는 암덩어리들을 색출해내는 거다.

양가장은 그 사이에 내가 몰래 갔다 오고.

나는 지렁이들 중에 대충 마음에 드는 곳을 찝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여기, 며칠이라고 쓰여있... 아, 못 알아보시겠군요.”

“...본녀를 놀리는 게야.”

“오랜만에 이 글자를 봐서... 아무튼, 저희는 며칠이라는 단어에 집중해야 됩니다.”

“어째서요?”

이제 수첩은 필요없기에 접어서 옆에 두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맹주님, 그리고 태사부. 이 혈동자란 것들이 마치 범처럼 차분히 사냥감을 노릴까요?”

“...갑자기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은 멧돼지와도 같지. 혈기(血?)를 사용하는 만큼 폭급하고 잔인한 것들이다.”

“그래, 소율이의 말이 맞다. 금제를 통해 조절하지 않으면 미친놈들이나 다름이 없지.”

“그럼 그 금제는 양광이라는 자가 통제할 것이구요.”

“그렇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여길 보면 앙드레는 며칠 동안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즉... 장두식으로 추정되는 혈동자가 그를 죽일 기회를 며칠씩이나 차분히 노린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렇다면.”

“설마...”

역시 고수들답게 내 이야기를 단숨에 이해한 듯 싶었다.

나는 무거운 목소리로 그 생각에 쐐기를 박았다.

“양광 또한 섬서에 머물렀다는 이야깁니다. 무려 며칠씩이나.”

“...불가능하다. 본녀가 떡하니 있는 섬서에, 감히!”

이에 멈추지 않고 나는 한 발자국 더 몰아붙였다.

“그리고 또, 이는 섬서에 양광의 본거지. 혹은 잠시 머물다 떠날 만한 근거지가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맹주님.”

“...”

“양광이란 자가 심심해서 섬서에 들른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충격을 받은 듯 이마를 짚는 소서화.

그리고 담소율마저도 내 추리에 심각한 얼굴을 하는 것이 보였다.

둘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소매를 붙잡는 백세령.

“무진. 그 이야기가 진짜라면...”

“턱밑에 적의 칼이 이미 닿아있었다는 소리죠, 세령. 맹주님, 섬서를 뒤엎어야 합니다. 아주 은밀하게요.”

“...섬서에 얼마나 많은 무인들과 세력이 있는 줄은 알고나 하는 소리더냐.”

“그래도 해야지, 서화.”

“...그래, 나도 안다.”

소서화도 믿기지 않아 그저 투정부리듯 말한 것이었다.

소율의 말마따나, 해야하는 일이었다. 그러라고 만들어진 무림맹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와는 별개로.

‘...머리도 잘 돌아가는군. 소율이가 좋은 제자를 두었어.’

무진을 향한 소서화의 시선 또한 더욱 짙어져갔다.

“바로 조사단을 풀도록 하지. 자네 말대로 은밀하게. 혹시 더 생각해낸 추리가 있는가?”

“당장 떠오르는 것은 없군요. 하지만 옳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래. 미리 감사의 말을 전하지, 백무진.”

“오히려 변변찮은 별호도 없는 제 말을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담담한 얼굴로 소서화에게 포권을 했다.

이번엔 질투보다는 아주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담소율과,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백세령.

“본인은 이만 올라가보겠네. 조사가 꽤나 시일이 걸릴 듯 싶으니, 우선 숙소로 안내해주지.”

“너희는 먼저 가있거라.”

“네, 스승님.”

소서화와 이야기라도 나누려는 듯 그녀를 따라가는 담소율.

곧 갈단려가 다시 들어와 우리를 안내했다.

“여기, 손님패입니다. 식사나 다과는 안쪽에 있는 줄을 당겨주세요. 그리고 맹내에서는 가급적 숙소에 계시길 바랍니다. 혹 저잣거리로 가고 싶으시다면 상관없습니다. 또한 패 분실 시에는 바로 신고해주세요.”

“...네. 감사해요.”

“그럼, 이만.”

통신사 상담원같은 도움말에 잠깐 벙찌고 있으려니, 백세령이 내 대신 패를 받았다.

“뭔가... 딱딱한 듯 부드러우신 분이네요.”

“그러게요.”

가슴은 절벽이라 딱딱할 것 같긴 하다.

아무튼 그렇게 갈단려를 보내고 방으로 들어와 침상에 걸터앉았다.

갖고 온 짐도 이미 방 안에 있는 것이 보였다.

“놈들의 근거지가 어디일까요, 세령.”

내 물음에도 멍하니 창밖을 쳐다보는 그녀.

마음이 심란한가 싶어 다가가 뒤에서 껴안으니, 그대로 기대오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해요?”

“...무진.”

살며시 내 손을 맞잡고, 조용히 물어오는 백세령.

“솔직히 말해줘요, 무진. 어딘지 알고 있죠. 양광의 근거지.”

“...세령?”

“내 눈은 못 속여요. 무진의 눈동자는 분명 답을 알고 있는 눈빛이었어요.”

“...그게.”

날카롭게 찔러들어오는 백세령의 물음에 반박할 타이밍을 놓쳤다.

그것으로 이미 들통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답했다.

“...네, 의심 가는 곳은 있어요.”

“혼자 가려고 했죠. 다친 몸으로.”

춘약 뿌리고 방울만 딸랑이면 돼서 솔직히 쉽게 여기긴 했다.

거기에 담소율과 무당의 신당에서 떡치기 위해 배운 은신잠행술은 제운종을 배운 이후 그 효과가 비약적으로 늘었고.

‘흑인 패시브로 입만 다물면 밤에는 전혀 보이지 않지.’

아무튼 이러니저러니 해도 몸이 다친 건 사실이었고.

혼자 갔다가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긴 했다.

이러면 공범이 편하지.

“...도와줄래요? 가서 전투를 벌이거나 하지는 않을 거에요, 세령.”

“그... 색마의 도구를 쓰려는 거군요.”

“네.”

내가 직접 색마의 함을 들고 가면 담소율이 막을 게 뻔했으니, 백세령에게 몰래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대충 예상한 눈빛이었고.

백세령이 몸을 돌려 두 손으로 내 손을 마주잡으며 물어왔다.

“...그게 통하지 않는다면 바로 돌아오기로 약속해요, 무진.”

“알겠어요, 세령.”

고개를 끄덕이자 포옥, 하고 내가 안기는 그녀.

아릿하게 올라오는 통증보다도, 무복 위로 풍만하게 감겨오는 젖가슴에 자지가 딱딱하게 변해갔다.

“언제 갈 건가요?”

“으슥할 때요. 지금은... 조금 쉴까요, 세령?”

“그럴...까요.”

이젠 먼저 혀부터 내미는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덮어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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