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빈집털이 (4)
* * *
쪼르륵.
잔에 뜨거운 김을 내뿜는 차가 따라졌다.
그 향만으로도 심신을 안정시키고, 몸에 기운이 나는 듯한 고급진 차.
마치 다도(茶?)를 형상화한 듯한 소서화의 모습에 담소율은 소름이 끼쳤다.
‘이년은 올 때마다 차 따르는 짓에 진심이 되어가는구나.’
담소율은 과거의 친구와는 영 달라보이는 모습에 툭 내뱉듯 시비를 걸었다.
“네년은 맹주란 년이 허구한 날 차만 따르냐?”
“손녀 가르치고, 원로들 구박하고, 그러고 나면 할 게 없다.”
“...그래도 그렇지, 차 데우는 데에 삼매진화까지 쓸 필요가 있나?”
“내 맘이지, 이년아.”
하긴, 자신도 온갖 쓸데없는 곳에 내공을 쓰지 않던가.
문 닫고, 서류 태우고, 옷 입고.
‘어제만 해도...’
방안 가득한 애정의 향기를 날려보내는데에 진심을 다하지 않았었나.
무진의 생각에 슬며시 볼이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억눌렀다.
“마시기나 해.”
“그래. 잘 마시마.”
후룹. 생각보다 괜찮았다.
비싼 차에 고수의 손놀림까지 더해졌으니.
그렇게 오랜 친우 둘은 말없이 잔을 비웠다.
이년저년 욕하던 것도,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던 것도 어느새 전부 침묵에 가라앉아 사라졌다.
탁, 하고 담소율이 다 마신 잔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착각했던 겐가?”
“아니. 분명 네 검은 양광의 단전을 찔렀고. 내 검은 심장을 꿰뚫었다.”
둘의 시선은 몇십 년전의 과거를 거닐고 있었다.
전장의 역한 피냄새와, 시체가 산을 이루던 풍경이 지금도 생생했다.
거기서 양광은 분명 둘의 협공에 쓰러졌었다.
수많은 희생을 내고서야, 겨우.
“도망친 혈마가 살려냈나?”
“...모르지, 온갖 기이하고 끔찍한 방법을 쓰던 것들이니.”
“골이 지끈거리는군.”
담소율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혈혈동자 양광의 눈동자에서, 빛이 꺼져가던 그 순간을.
그리고 모두가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홀연히 나타난 혈옥신마 앙천화.
생각보다 재밌었다. 다음번은... 조금 더 확실히 준비해서 돌아오지.
그 뒤에 펼쳐진 것은 끔찍했지만, 한편으론 경외심이 일기도 했었다.
널따란 평원에서 나뒹굴던 시산혈해가 혈마의 손아귀로 빨려들어가는 그 광경은.
아직도 담소율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혈마를... 그때 반드시 죽였어야 했다, 서화.”
“...그건 불가능했다, 소율. 그녀가 그때 우리의 목숨을 살려준 건, 그저 흥미를 잃어서였어.”
소서화의 답에 쉽사리 반박할 수 없었다.
그때의 혈마는 신강의 천마에게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공포에 가슴이 옥죄어 감히 검을 맞대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었다.
소서화는 그런 담소율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나는... 무림맹을 세우고. 그때의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헌데 그 증거라고도 할 수 있는 섬서에 이미 종양이 자라고 있었다니.”
허무한 듯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소서화.
서로에게만 보여줄 수 있는 약한 모습을 바라보며, 담소율은 차분히 그녀를 다독였다.
“...그래도 발견한 것이 어디냐. 미리 잘라내면 괜찮을 게야.”
하지만 소서화는 고개를 저었다.
“어디까지 파고든 지도 모르는 상태야. 섣불리 뒤졌다간 꼬리조차 못 잡겠지.”
“...”
그 또한 맞는 말이었다.
고름을 짜내고 싶어도, 도대체 어디에 나있는지 모르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산을 부수고, 바다를 베어내는 경지에 올라도. 그때처럼 무력한 건 똑같구나, 소율아.”
“하지만 그래도 무엇을 해야할 지는 알지 않더냐, 서화.”
무진이 말해준 것. 그리고 지금 열심히 양광을 쫓고 있을 개방도와 추격대.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던 그때와는 분명 달랐다.
소서화 역시 담소율의 말뜻을 알아듣고는 희미하게 웃음을 지었다.
지금은 뭐든 해볼 수 있는 거대한 세력이 있었고, 그때와는 달리 진정한 절대지경의 무인이 되었다.
이리 침울한 것도 오랜 친우의 앞이라 잠시 투정부린 것뿐.
소서화는 길게 내쉬는 숨 하나에 무력함을 날려보냈다.
“흐, 그래. 네 서방이 말해준 것처럼, 뒤집어 엎기는 해야겠지.”
“무, 뭣! 뭔 소리를 하는 게야!!”
암코양이 마냥 하악질을 해대는 소율.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오히려 그 남자와 중요한 관계라는 걸 알려주는 꼴이었다.
“소율아, 그리 소리를 지르면 내가 더 확신하지 않겠냐.”
“이, 이... 망할 년이...!”
“그래서.”
날카롭게 번뜩이는 친우의 눈동자에 담소율이 바짝 얼었다.
그 모습을 본 소서화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처녀 딱지는 뗐냐?”
*
“츄붑, 푸하아...”
“혀를 훨씬 잘 쓰게 됐네요, 세령. 기특해요.”
“헤헤, 그런가요.”
백세령은 저릿한 입술 틈으로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후으... 하아...”
이미 몸에 힘은 풀려서 무진에게 온전히 맡긴 상태였고, 머릿속은 멍하니 꿈결 속을 거니는 듯 했다.
‘입술이, 이상해...’
숨이 내쉬어질 때마다 저릿저릿한 감각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마치 입술에 온 감각을 모아놓은 것 마냥, 숨결마저도 자극적이었다.
“무진, 무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달랬다.
짙은 흑단빛 피부를 깨물고, 빨고, 강아지처럼 핥아내며 바라는 게 있다는 걸 알렸다.
하지만 느긋한 미소로 자신의 뺨만을 쓰다듬는 무진.
“간지러워요, 세령.”
“우으... 흣...”
분명, 무진도 원하고 있을 텐데.
‘자꾸... 등을 찌르고 있는데...’
그 무엇보다도 단단한 무언가가 등허리를, 엉덩이를 쿡쿡 찌르고 있는데.
자신이 먼저 말하기를, 더 깊숙이 다가가기를 바라는 걸까.
어느새 아랫배를 집요하게 문지르는 커다란 손에 머릿속은 또 멍해지고.
무진의 타액으로 갈증을 해소하려 입술을 맞췄다.
“츕, 츄우...”
“여기 있었나요, 흐흥♡”
“흣?”
하지만 한 방울 삼키기도 전에,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백세령은 다급히 입술을 떼어내며 문쪽을 쳐다보았다
얄미운 얼굴로 웃고있는 여자.
“오랜만이에요, 허접♡”
바닷빛이 도는 푸른 머리칼. 세상 모든 걸 자신의 아래로 보는 건방진 눈동자.
무엇보다도, 언제나 실실 쪼개고 있는 저 살짝 말려올라간 입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세령이 서둘러 멍한 얼굴을 지워내며 답했다.
“오랜만이네, 소유.”
“흐흥♡ 허접선녀답게 사내 따위의 품에 안겨있는 것인가요? 꼴사나워라♡”
“아...”
생각해보니 입술 뿐만 아니라 무진에게 몸까지 맡기고 있었다.
완전 아기처럼 그에게 안겨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십니까?”
“무진, 그녀는...”
“별호도 없는 허접이라 소녀를 못 알아보는 것이에요?”
“소소유!”
아무리 그래도 초면에 저런 말을 내뱉는 건 몰상식한 행동이었다.
안하무인인 성격이라지만, 적어도 예의는 있는 줄 알았었는데.
백세령이 뭐라 입을 열기 전 무진이 그녀를 제지했다.
“허접이라니, 꼴받는 단어를 쓰시는군요.”
“무진.”
“괜찮아요, 세령.”
나는 옷소매를 붙잡는 백세령을 다독이며 일어섰다.
“그쪽이 천극혜검님의 새로운 제자인 것이에요?”
“맞습니다, 백무진이라고 합니다.”
“백? 새카만 깜둥이 주제에 무슨 염치로 백(白)자를 쓰는 것이에요.”
“...”
진짜 소설 속에서 보았던 그대로다.
무림맹주의 빽을 믿고 안하무인인 주둥아리.
송곳니가 살짝 보이는 듯하 저 꼴받는 웃음.
그리고 대체 왜 옷이 흘러내리지 않을까 의문인 빵빵한 젖탱이.
‘백세령보다도 크네, 확실히.’
무림맹주의 젖탱이는 자리가 자리인지라 제대로 못봤는데, 소소유는 아주 대놓고 보라고 있으니 열심히 관찰했다.
그러자 손으로 입술을 슬쩍 가리며 말하는 소소유.
팔짱 낀 자세 때문에 오히려 가슴이 더 툭 튀어나오듯 보였다.
“어딜 그렇게 보는 것이에요? 소녀의 가슴? 후훗,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군요♡”
“소소유, 적당히 해.”
“소녀는 그냥 얼굴 좀 보러왔을 뿐이에요. 다른 의도는 없어요, 허접♡”
없기는. 딱봐도 백세령을 놀리려 온 게 분명했다.
그녀가 겪은 처절한 패배의 원인이 바로 눈앞의 왕빨통년이니까.
의기소침한 백세령을 갈구면서 우월감을 맛보고 싶은 거겠지.
‘무림맹주의 인정을 바라고 있다고 했던가.’
너무나도 뛰어난 스승이자, 가족인 파천검선 소서화.
소소유는 그런 그녀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당연히 그런 소서화의 제자인 자신이 누구보다도 앞서야 한다는 향상심으로 똘똘 뭉친 년이다.
그래서 담소율의 제자인 백세령을 자꾸 깎아내리는 거고.
아무튼 이렇게 찾아온 이상 그냥 보내주기엔 아쉬웠다.
‘어떻게 따먹을까 했는데, 직접 찾아와주면 오히려 땡큐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앞으로 성큼 나섰다.
오히려 콧대를 높이 쳐들며 건방지게 물어오는 소소유.
“왜, 불만이라도 있나요? 소녀에게 패배한 허접은 평생 허접인 거에요.”
"읏..."
"같은 경지에 올라도 소녀가 무섭나요? 겁쟁이♡"
이런 년들의 특징이, 위아래를 제대로 각인시켜주면 순종적으로 변한다는 거다.
“초면에 그런 말을 하시다니, 예의는 뒷구멍으로 쳐드셨습니까?”
“...무, 무진?”
“이, 이자가 지금 뭐라는 것이에요!?”
툭 던진 말에 당황한 듯한 소소유.
절대 고수의 금지옥엽이니 평생 이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겠지.
나는 한 발 더 다가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경고했다.
“한 번만 더 저나, 세령에게 그딴 말을 하면 진짜로 뒷구멍에 예의를 주입시켜드리겠습니다.”
“무, 뭐... 다, 당신! 미친 것이에요!! 감히, 허접한 사내 주제에 소녀에게 그딴 망발을...”
짜아악!!
“꺄아아앙!!”
앙칼진 표정의 소소유를 쳐다보며 커다란 젖탱이에 강스파이크를 날렸다.
새하얀 살덩이에 진하게 남은 내 손바닥 자국.
당황과 옅은 두려움이 담긴 바다색 눈동자가 보였다.
‘여기서 멈추면 좆된다.’
솔직히 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갔다.
한 번쯤 존나 때려보고 싶은 젖탱이라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전 분명 경고했습니다, 소 소저.”
나는 소소유의 혈도를 짚기 위해 손가락을 내질렀다.
“어, 어딜 감히 소녀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인가요!!!”
초절정의 무인답게 그 짧은 순간 느릿하게 내 손을 감아오는 소소유의 손바닥.
‘묵직하구만.’
그녀의 진신무공, 파둔신공(????)의둔중한 내력이 나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런 금나수의 수법이나 초근접박투는 태극권으로 질리도록 연습했다.
주로 약점을 괴롭히려는 내 손길을, 필사적으로 막아내는 담소율과 함께하면서.
‘담소율에 비하면 좆밥이지, 이년은.’
거기다 소소유는 지금 약간의 당황과 함께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 몸이 굳은 상태.
“으읏?”
내 손이 마치 뱀처럼 소소유의 팔을 타고 올라갔다.
“어, 어딜... 큭!”
다급히 검을 꺼내려하던 그녀의 저항은 부질없이 무너져내렸다.
마혈(??)을 짚은 내 손가락이 소소유의 육체를 단숨에 제압했다.
“이, 이...!! 당장 풀지 못하는 것이에요! 허접선녀! 왜 보고만 있는 건가요!!”
“세령.”
“...무진. 지금이라도 푸는 게...”
“함을 가져와요.”
뒤돌아본 백세령의 눈동자에 망설임이 엿보였다.
순수하고 올바르던 그녀가 이런 나쁜 짓을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조교의 성과가 나타나는 듯했다.
그만큼 내게 거스르기 싫다는 증거.
“어서요, 세령.”
“세, 세령 언니!”
“...알겠어요.”
소소유가 다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오히려 백세령은 인상을 찌푸리며 함을 가져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