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두더지 잡기 (7)
* * *
“으...”
정신이 들자마자 아릿하게 올라오는 통증.
여전히 무언가가 비부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듯한 느낌.
담소율이 겨우 정신을 차렸다.
“후우...”
분명 휑하니 벗은 채로 무진과 있었는데.
어느새 단정히 입혀진 의복과 턱 끝까지 꽁꽁 싸매둔 이불.
‘...실신했던 겐가.’
이부자리도 그렇고, 몸도 뽀송뽀송한 것이 무진이 실신한 자신을 위해 뒤처리도 해두고 간 듯 싶었다.
“...간다고 말이나 해줄 것이지.”
하지만 고마움과는 별개로, 아침에 혼자 깨어났다는 것이 조금 섭섭했다.
맨 살갗을 맞대며 아침잠의 여운에 함께 빠져드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데.
“흐흥, 그래도...”
슬며시 지어진 미소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질투와 불안, 애욕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던 마음이 진정된 기분.
심마가 사라졌달까.
널뛰던 가슴이 고작 하룻밤으로 가라앉은 것이 참으로 부끄러웠지만.
그만큼 어젯밤의 열락이 만족스러웠던 것일 터.
“후후후... 흐흣, 아핫...”
괜시리 침대 위에 발을 통통 구르며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이제 혈교의 잔당들을 때려잡고, 무당으로 돌아가 봉룡지회를 준비하면 되겠지.
‘녀석도 필시 출전하려 하겠지...?’
무당에서 두 명의 봉룡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담소율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그려졌다.
*
“갑작스럽게 모두를 모은 것에 대해 미리 사과를 하겠네.”
거대한 무림맹의 본단 어딘가.
서른 정도의 무인들이 한 곳에 모여있었다.
가장 상석에 위치한 것은 현 무림의 절대자 중 한 명.
파천검선 소서화.
그녀의 말에 누군가가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답했다.
“사과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맹주님. 저희는 모두 맹주님의 뜻 아래에 하나로 모인 자들 아닙니까.”
웅성거리는 소음과 함께 동조의 분위기가 퍼져나갔다.
허나 소서화의 단호한 한 마디와 함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니. 이것은 필시 죽음을 동반할 수도 있는 일이니. 그대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본인이 사과하지 않으면 누가 사과를 한단 말인가.”
죽음. 무겁기도, 때로는 가볍기도 한 단어에 좌중이 침묵에 휩싸였다.
말은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무게가 달라진다고 한다.
그런 면에서, 눈앞의 여인이 읊어낸 말은 그 무게가 가히 천금과도 같았다.
“며칠 전 곤륜노 하나가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났네.”
곤륜노라. 저멀리 서역에서 온 이방인의 죽음을 왜 말하시는 걸까.
그러고 보니, 은밀히 초대받은 밀실 안에 눈에 띄는 곤륜노가 하나 있긴 했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체구와, 우묵한 검은 눈동자.
“그저 그런 살인사건이라면 이리 그대들을 불러모을 필요도 없겠으나. 그 흉수가, 혈교의 잔당인 것으로 밝혀졌네.”
“그, 그런!”
“혈교라니요...!”
믿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 말을 한 본인이 혈사의 주역인 탓에 소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녀가 확신한다면 아무도 토를 달 수 없었다.
“혈혈동자, 양광. 그리고 그의 수하인 혈동자의 소행으로 보이네.”
역사 속 노괴의 이름이 꺼내지자.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곳곳에서 터져나왔다.
그 잔혹한 혈사의 기록 중에서도, 혈마와 더불어 가장 많은 무인을 사살한 것으로 알려진 노괴.
혈마의 우호법, 양광.
“그리고 이곳 섬서에...”
이어진 그녀의 이야기는 충격 그 자체였고.
밀실 안에 모인 무인들은 맹주가 어째서 자신들을 불러모았는지 깨달았다.
“...해서, 그대들에게 혈교의 잔당을 은밀히 수색하는 임무를 맡길 것이네. 신호탄을 나눠주도록.”
어디선가 튀어나온 시비들이길다란 막대 모양의 것을 모두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이어 맹주의 옆에 또다른 한 여인이 자리하는 것이 보였다.
새하얀 도포에 그려진 선명한 태극의 문양.
군청빛을 띠는 신비한 눈동자.
“처, 천극혜검 어르신...?”
“진정 그분이...?”
무림의 두 기둥이 한 곳에 모이다니!
평생을 가도 볼까말까한 절대 고수의 등장에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그들을 진정시키듯, 차분하게 말을 잇는 소서화.
“혹여나 조사 도중 양광을 만나거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적을 만나면 그 신호탄을 터트리도록 하게나. 본인이나 천극혜검, 둘 중 하나가 바람과도 같이 달려가 도울 걸세.”
“죽을 거면 터트리고 죽도록. 원수라도 갚아줄 수 있게.”
살짝 거친 듯한 그녀의 말투가 더더욱 진심처럼 다가왔다.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죽더라도... 꼭!!”
역시, 자신과 같은 동도들이 이곳에 가득했다.
저 두 분을 위해서 제 한 몸 불사를 수 있는 진정한 협객들!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부, 본인이 뼛속 깊이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 모은 걸세.”
“아아...”
“맹주님...”
혈교라는 단어도. 죽음이라는 단어도.
모두 저 두 분의 믿음과 기치 아래에서 빛을 바랬다.
남은 일은, 이제 그 기대에 응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
“의심되는 장소와 인물들을 추려놓았으니 전부 외우고 불태워버리도록 하게나. 무운을 비네.”
“존명!!”
벅차오르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고.
혈교의 잔당들을 찾아내기 위해 무인들이 무림맹 바깥으로 은밀히 흩어졌다.
그들에게는 각기 모두 다른 인물들과, 장소들과, 조사 시간이 적혀있었다.
최대한 은밀하게 조사하고자 고안해낸 방법.
“그럼, 우리들도 가볼까요.”
“흥, 어딜 허접 주제에 대장 행세인 것이에요!”
“소유야.”
“그럼 허접 대장이라고 부르십쇼, 소 소저.”
“이익...”
나와 세령, 그리고 소소유는 무인들이 받은 것과는 조금 다른 종이를 챙겼다.
종이에는 그동안 무림맹이 조사해온 세작과 간자들에 대한 정보가 전부 담겨있었다.
아마 맹주도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는 거겠지.
‘근데 진짜 꽁꽁 숨기긴 했네.’
혈동자에게 받은 서책과 비교할수록 그들의 철저함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다.
진짜 혈교의 수하들이 있는 세력은 하나도 없고.
그 끄나풀들의 세력만이 의심되는 곳으로 적혀있다니.
‘이러니 꼬리만 잡고 실체를 밝혀내질 못하지.’
조사가 진행될수록 억울하게 당할 이들만 늘어날 터.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오늘부로 전부 그 민낯을 드러내게 해줄 거니까.
이렇게 숨어사는 쥐새끼들은 한 번에 싹 뒤집어 엎어야 도망을 못 간다.
‘괜히 도망가면 의심 받을 뿐이니까.’
느긋하게 자기 둥지에 꼬리 말고 숨죽인 놈을 끄집어내면 된다.
나는 다 때려부술 생각에 즐거운 웃음을 흘려냈다.
“흐흐, 흐...”
“무, 무진...?”
“...허접다운 웃음인 것이에요.”
그리고 절대 고수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셋의 전력으로도 충분하다.
“허튼 짓 하다가 다치지 않게 조심하거라. 특히 무진이 너.”
“제가 잘 보살필게요, 스승님.”
“그래, 소유도 잘 챙기고.”
“걱정해주셔서 감사한 것이에요, 천극혜검님.”
출발하기 전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하나 물어봤다.
“맹주님, 혹시 섬서를 벗어날 수 있는 길목들의 방비는 어찌 되는 겁니까?”
“그쪽은 개방도들이 힘써줄 것이네. 걱정 말게나.”
음, 거지새끼들이 딱이긴 하지.
참고로 혈동자들이 잡은 거지년들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저 돈 때문에 시다바리 노릇을 한 것이라 아는 것도 없고.
미색령을 사용한 뒤 조용히 개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하거라.”
어젯밤 이후 맑은 미소를 띠는 담소율과 슬쩍 눈빛을 나누고.
세령과 소소유를 데리고 무림맹을 벗어났다.
이목을 끄는 것을 피하기 위해 둘은 면사를 쓰고, 나는 죽립을 썼다.
“잠깐!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것이에요, 허접 대장?”
“음...”
나오기가 무섭게 앞을 턱 가로막으며 틱틱대는 소소유.
확실히 각좆을 빼서 그런가, 몸놀림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아니, 젖탱이 무빙이 군더더기라면 군더더긴가.’
뽀얀 윗가슴이 출렁거리니 자꾸만 내 자지도 껄떡거린다.
“없는 것이라면 이 소녀의 계책을...”
“있습니다.”
“이잇... 그럼 얼른 말해보라는 것이에요.”
“어떻게 할 건가요, 무진?”
면사에 가려진 두 여자의 시선을 받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현재 섬서에 숨어든 혈교의 세력들은 총 세 곳.
왕가장, 철혈방, 그리고 활검문.
조지긴 조져야할텐데, 소소유를 일단 납득시켜야지.
“사실 요 이틀 동안 세령과 저잣거리에 나와 의심가는 사람들을 염탐했습니다.”
“한심하게 놀러다닌 게 아닌 것이에요?”
“...아니야. 같이 탐문 수, 수사를 조금...”
눈을 가늘게 뜨는 소소유와, 애써 장단을 맞춰주는 세령.
나는 철면피를 깔고 말을 이었다.
“소 소저도 알다시피 장두식, 그러니까 전 무당의 제자가 범인 아닙니까. 저희만의 방법으로 주변을 조사해봤습니다.”
“흐음...”
팔짱을 끼고 젖탱이를 강조하는 소소유.
왕모찌 젖탱이의 쫀득한 촉감을 떠올리며 구라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수사를 이어가다 보니... 활검문이라는 곳이 나오더군요.”
여기부터 터는 이유는 딱히 없다.
있다면 혈교 새끼들이 얼척 없게 활(?)자를 쓰는게 꼽달까.
“흠... 들어본 적 없는 곳이에요.”
“그저그런 중소문파니까요. 하지만 장두식의 흔적이 그곳까지 이어졌었습니다.”
“...허접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에요?”
“무, 무진의 말이 맞아. 응.”
“...그게 끝인 것이에요?”
잠시 어색한 침묵이 지나가고.
소소유가 애매하지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로서도 딱히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저 자신을 패배시킨 허접 깜둥이가 나서는 게 아니꼬왔을 뿐.
“명심하는 것이에요. 어디까지나 조사일 뿐이고, 본격적인 작전은 며칠 뒤라는 것이에요.”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은 제 말에 토달지 말고 따라 주십쇼.”
“읏, 소, 소녀가 언제 토를 달았다는 것이에요!”
앙칼진 표정으로 토를 다는 소소유.
뒷구멍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절정까지하는 모습을 본 나로서는 그저 귀여울 뿐이었다.
“자자, 우선 출발하자 소유야. 알겠지?”
“후우... 알겠다는 것이에요.”
세령의 달래기에 겨우 진정한 소소유를 데리고 활검문으로 향했다.
무림맹과 그다지 떨어져 있지 않아 금방 도착했다.
“흠, 이곳인 것이에요.”
“겉보기엔 평범하네요, 무진.”
실상은 아는 세령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느긋이 활검문 주변을 돌았다.
적당한 크기의 장원과 멋드러진 필체의 현판.
안쪽에서 기합성이 들려오는 걸 보면 제자들의 수련이라도 시키는 듯 싶었다.
그야말로 평범하디 평범한, 섬서에 자리잡은 중소문파 중 하나.
한 바퀴 돌아 다시금 활검문의 대문 앞에 섰다.
“이제 어떡할 것이에요, 허접 대장... 응?”
“무진, 우선은 기회를 보다가... 어, 어디 가요 무진?”
성큼성큼 대문을 향해가는 나를 보며 둘이 다급히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내 발이 단단한 나무 문짝을 걷어차는 것이 빨랐다.
콰아앙!
“이리 오너라!!!!”
* * *